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an 25. 2024

어차피 어른이 될 수 없는데

<마보로시>(2023) 


오카다 마리의 <마보로시>는 제철소 폭발 사건 이후 멈춰버린 세계와 그 안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잔잔한 내일>이나 <아노하나>, <이별의 아침>처럼 ‘멈춰버린 것’에 관심이 많은 듯 보이는 오카다 마리는 <마보로시>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주제의식을 끌고 나간다. <마보로시>는 자신들의 세계가 환영임을 알지만, 이미 현실이 별도로 독립하여 진행되는 상황에서 ‘종말’은 세계의 존속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제철소가 폭발해 만들어진 환영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어른이 되지도 못하고 계절이 바뀌지도 않는 ‘영원’을 살고 있으며, 이는 마치 영화처럼 ‘리얼 월드’가 아니므로 현실이 풀려나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서둘러 폐쇄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마보로시>는 마치 자신들을 영화로 여기는 것만 같다. 영화 <바빌론>의 모 대사처럼, 자신들이 영화 속 인물이라는 점을 잘 안다면 존재하지 않는 기억 속에서도 배우들은 영영 기억될 수 있으니 말이다. 


<마보로시>는 마치 티브이나 영화관처럼 화면이 꺼지면 관객이 현실로 풀려날 뿐이라는 간단한 명제에서 출발한다. 두 남녀 주인공이 현실에서 낳은 딸이 영화의 세계로 이입해왔고, 자기들의 세계가 유지되려면 그녀가 계속해서 세계를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 설정은 영화가 존속하려면 관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에서 두 남녀는 그들 자신의 현실과 이전으로 남겨진 영화 속 세계를 구분 지으려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는 지워지지 않는다. 해상과 육로 모두 어떤 이유로 봉쇄된 가운데, 작품은 한때 열차가 다녔었던 터널에 현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그들 자신의 딸을 현실에 실어 보낸다(이는 공간적으로 어떠한 영역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분리’를 확고히 한다). 이제 현실과 영화를 잇던 마지막 관객이 영화를 떠났고, 이들 영화가 꺼지고 나면 장면은 미래로 바뀌어 그들의 딸이 폐허가 된 제철소 터를 방문하는 것을 보여준다. 


폐허가 된 제철소는 본편이 진행되던 세계의 이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에필로그에 해당하지만, 작품이 내내 “영화는 현실을 초과해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지평선의 감각을 연장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트루먼쇼>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루먼이 세트장 밖으로 나가더라도, 여전히 그곳 세계는 티브이 속 프로그램 쇼의 일환으로써 사람들 속에 계속되리라는 믿음을 심어주듯 말이다. 단적으로 풀어보자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처럼 <마보로시>는 친절한 설명과 이해를 담보로 하는 작품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의 원리처럼 메시지가 이미지를 초과한 듯 보이는 면이 있고 이는 ‘모에’의 본래 말뜻처럼 영화 전체에 솟아나고 있다. 인물의 대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관행은 전달 방식에서 가장 초보적인 것임에도 산발적으로 사용되는데, 작품 전체의 성격을 떠올리면 부조리극의 일종은 아닐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가령 “이 세계는 아무런 냄새도 갖고 있지 않다”는 말과 “우리는 어른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은 하라 케이이치의 <어른 제국의 역습>을 연상케 한다. 20세기와 21세기를 냄새로 구분 짓는 이 영화에서 ‘어른’은 현재를 중지하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여기서 냄새는 그런 과거로 이행하는 돌파구가 된다. <어른제국>은 두 세기간에 경계를 확보할 요령으로 냄새의 농도를 설정하며 여기서 ‘냄새’는 관객에게 고저 차를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짱구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타고 탑에 오를 때 시간을 가로지르는 감각은 극대화되어, 구한다(Save)라는 말의 의미가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남겨두는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전한다. 즉, 여기서 경계는 ‘잔존’의 감각을 두고서 부정사로 서술하지 않는 일에 중점을 둔다. 


반면 <마보로시>는 그것이 환영이기에 아무런 냄새도 갖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환영의 정의를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로 평면화한다. <마보로시>는 경계를 지우는 일에 적극적이며 이를 통해 세계가 결국에는 하나의 흐름을 탈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인다. 가령 문장을 평면화해서 가져와 보면 <마보로시>는 김병규가 <너와 나>를 두고서 한국 독립영화의 관행을 지적한 비평과 거의 유사한 문제를 되풀이한다. 우선, 김병규는 “추한 화면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영화가 시도하는 위로와 애도에 조응하는 형식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다시 반복하지만 비평의 몫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오쓰카 에이지의 경우 『감정화하는 사회』에서 “비평의 역할은 감정의 바깥에 서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마보로시>는 그 평면에서 입방체를 무너뜨리고, 세계를 완전함의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감정의 바깥에 선다’는 대목에 중점을 두고 싶다. 최근 <스즈메의 문단속>을 재관람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영화가 3월 11일을 기억해내는 방식이 문과 같은 형식을 통해 자체적인 분리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스즈메>는 기본적으로 현세와 명계를 구분 지음으로써 3월 11일의 정동이 영화와 현실 간에 오가지 않도록 한다. 감정적인 거리 두기는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표하는 일이지만 그 이전에 영화나 현실이 상호 간에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 요구하는 최소한의 낙차이기도 하다. 여기서 경계를 피에르 부르디외 식의 문화적 자본이나 세계의 주민으로 이해하는 일은 부적절하며, 그런 점에서는 ‘경계’라는 표현을 문턱으로 고쳐 부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턱은 상호 간에 분리를 이루어낸다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있지만 그 안에 같은 시간을 통용시킨다. 그래서 문턱은 바깥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형식으로써 시간이 흘러가는 일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점에서 <스즈메>가 문을 이용하는 방식은 적어도 세계를 애도하는 방식에서 윤리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꽤 적절하다고 볼 법한 게 된다. 미미즈와 명계를 따라가며 국토를 횡단하는 여행은 스즈메가 과거의 기억을 마주할 때 비로소 일본의 동쪽을 향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스즈메가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관객에게는 문밖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문을 닫는다’라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현실을 향해 ‘열린다’는 것은 이 대목이다. 실존하는 사건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하라 케이이치의 <거울 속 외딴 성> 또한,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거울을 통해 하나로 모으는 형식에서 ‘영화’를 현실에 상대화하는 식으로 자기를 구분 짓지 않는다. 이들을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 방식으로 채택된 ‘문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로의 형식이 되고, <거울>은 감정이 시간을 따라가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자체적인 비평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마보로시>는 영화를 두고서 현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환상’으로 소개하는 것들에 관해 아무런 향기나 정취도 남겨두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광산 가스는 무색무취의 가스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를 맡고, 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달리 말하자면 어떻게 파국이 다가오는 것을 보겠는가? 그러한 도래-보기, 그러한 시간-응시의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이 말은 시각적 이미지에서 벗어난 ‘냄새’를 일련의 은유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매체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가령 영화가 오색천연의 색을 입고 입체와 냄새에 힘입을 때 영화는 완전영화에 들어선다고 보았던 바쟁의 경우가 그렇다. 바쟁은 영화가 현실에 가까워질 때 비로소 영화는 완전한 의미에서 영화가 된다고 믿었는데, 이때 영화는 현실에 튀어나오는 쪽의 요철이 된다. 바쟁은 영화를 입체로 바라보며 ‘가까워진다’라는 설명을 덧붙였으며, 바꾸어 말하면 이는 영화가 어디까지나 스크린에 기반을 둔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과 영화는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는 관찰자인 우리가 얼마나 굳건히도 자리를 유지하는지를 설명한다. 바쟁이 강조하는 것은 관찰자의 감각으로, 완전영화는 둘 사이에 뚜렷한 선을 가정하면서 이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되기보다는 마치 두 눈의 모여 하나의 세계를 직시하듯이 현실과 영화가 한데 어우러짐에 따라 도출되는 ‘환상’을 가정한다. 


다른 한편 바르트 또한 비슷한 취지에서 그렇게 지적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영화관을 나오는 일 자체에 매료됨을 고백하며 영화와 현실이 분리됨에 따른 감정에 헌사를 바친다. 바쟁은 영화가 현실에 다가서는 일 이전에, 관객이 영화관을 나와버리면 ‘영화’와 ‘현실’은 완벽히 분리되어버린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영화관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영화가 자신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문턱 같은 역할을 해줬다. 이 점에서 영화관을 나온다는 건 이 둘을 서로 다른 세계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두고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 혹은 과거’로 여기게끔 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통용시키는 식으로 현실을 초과한 어떤 이미지를 상기하는 일이다. 이처럼 영화의 물성이 초래하는 냄새들을 따라가는 일은 프루스트식의 회고와는 다르다. 무언가를 떠올리며 감각하는 일에서 주가 되는 것은 이미지로, 꿈을 꾸거나 활동하는 일에는 냄새를 염두하는 일이 제외된다. 


<마보로시>에서 배제되어버린 상상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에 관한 것, 스스로를 바라보며 비평할 수 있는 시간선에 대한 가정이다. <마보로시>는 터널을 따라 섞여 들어온 현실이 영화를 유지하는데 사용된다는 설정으로 시작되는데, 작품은 그런 현실을 영화에 바침으로써 영화가 유지될 수 있노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언젠가 도래할 현실로의 귀환을 위해 최대한 사태가 벌어졌던 상황과 자신을 동일하게 유지하고자 하며, 이곳에선 계절이나 공간이 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인식 상에서 ‘시간’은 명백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정신에게 공간이라 할만한 신체는 나이를 먹지 않아서 이곳의 인간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자살하거나 하지는 않는 이상 죽음을 마주할 수는 없다. 이는 기절놀이나 왕따처럼 점점 더 자극적인 것들, 시간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이 몸담은 것들에 교섭하고자 하는 인물의 태도로 나타나며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세계는 ‘바깥’을 내부로 사유한다. 


흔히 애니메이션에서 ‘신체’는 세계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현존하는 인물의 양상을 초과한 무언가로 여겨져 왔다. 또한 이를 의도적으로 통제하면서 세계의 크기를 축소, 즉 현실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는 몇몇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태도, “기억은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식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는 생각, 세계를 완전히 닫힌 것으로 가정하는 일은 캐릭터적 신체들에 대한 좋지 않은 해법이다. <마보로시>는 작중 학생들의 입을 빌려 “어차피 어른이 될 수 없는데 진로조사표 따위는 거짓으로 작성해도 되지 않은가”하는 이야기를 하며, 이때의 영화란 부귀를 누리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함만을 끌어안을 뿐이어서 미래를 향한 발전적이거나 진취적인 방안을 내놓지는 못한다. 문턱을 만들어두지 않는 일은 이들이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오히려 “감정의 역할은 비평의 바깥에 선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부정적이고, 또 그릇된 경계로 나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간을 권리로써 행사하지 않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