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Dec 30. 2023

순간을 권리로써 행사하지 않기

<장송의 프리렌>(2023)


“확장하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세계’의 구성원리인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VADOMORI의 지적을 따르자면 <장송의 프리렌>은 ‘성장하지 않는다’는 피터팬적 상상력이 불멸자의 콤플렉스로 변환되고 있다. 엘프 종족인 프리렌은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마족과의 싸움에서 진 후 500여 년 넘게 숲에서 요양중이었다. 여기서 프리렌은 500여 년간 세상이 무언가 변했다는 인식보다는 그런 세계 안에서 마력이 발산하는 기척을 지운다는 은폐의 기술을 익힌다. 설사 스승의 가르침일지라도, 이 은폐는 개인의 성장이 능력의 증대와 연결되는 대목으로 가정해볼 때 ‘늙는다’거나 ‘원숙해진다’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기척을 지우는 프리렌은 신체=세계의 맥락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을 따라 ‘성장’이라는 것을 지우려 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성장하지도 않으니 죽지도 않으며 자연스레 만화의 목표는 ‘프리렌을 성장시키기’라는 다소 원초적인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단순히 생각하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이 되기 싫어하는 일, “어른이 되면 책임을 져야 할 게 많아지니까” 그런 복잡다단한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장생종에 관한 묘사는 많은 경우 그러한 두 가지 맥락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하나는 ‘오랜 세월을 보내 거진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 마모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겁의 세월을 보낸 나머지 죽음과 같은 일에 무감각해진 경우’이다. 다수 무덤덤해 보이는 프리렌의 얼굴을 떠올리며, 여기서는 후자를 논해볼까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더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우선 어른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을 마주함에 따라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바꿀 수 없는지’를 알게 되는데, 그 점에서 죽음은 책임을 초과한다. 죽음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항상 끝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영화에서 마주하는 결말 비스름한 역할을 한다. 


‘아톰적 세계관’에서 출발해 하나의 장르로 안착한 이 속성들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느껴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자신보다 훨씬 오래 존속하리라는 생각은 세계를 살아감에 있어 ‘성장’의 기쁨을 앗아간다. 변하지 않거나,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가 느리다면 세계를 바꾼다는 상상은 미약하거나 작동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그래서 프리렌은 혼자가 아니라 파티원과 함께 할 때 마왕을 죽여 평화를 얻는다는 거국적인 목표를 수행하게 된다. 죽음과 거리가 먼 장생종에게서 [세계]는 자신이 성장하지 않기에 그 성장이 파악되지 않는 장소일 뿐이다. 즉, 죽음을 자각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순수란 그 본질에서 평화와 속성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장송>은 단지 그런 정도의 미약함만으로 작동하는 것뿐일까. 아이다움과 평화로움이 한 자리에 겹쳐지는 일은 우리가 어른이 되기를 망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우선 변치 않은 채로 산다는 것에 관한 이론을 재점검해보자. <장송>에는 기계가 아니라 마법을 사용하지만, 어쨌거나 사진이란 게 존재한다. 프리렌처럼 오래 사는 종족일수록 더욱 간절해질지도 모르는 이 기술은 우리들 현실과 마찬가지로 ‘찌른다’고 볼 법한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운명이 현재에 고정되어버리는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란 이야기의 시제를 과거로 되돌리지 않고서 줄곧 현재에 머무르게끔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힘멜을 추억하는 프리렌의 모습이 ‘사진적’이라고 볼 법한 게 되어 이야기 전반에 틈입해오는 틈새가 된다. 나이를 먹지 않고서 수백 년 넘게 같은 외모로 목격되는 프리렌을 인간 세상에서는 ‘사진’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야기되는 구전들에서 프리렌은 약간의 미화를 겪으며, 개중에서는 프리렌의 스승처럼 아예 성별이 달라진 채로 기억되거나 동족 엘프인 크라프트처럼 너무 세월이 많이 흘러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름없는 영웅’으로만 기억되는 경우도 있다. 


작중에서 오래된 영웅을 기리는 방식으로 동상을 세운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힘멜은 프리렌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기억’을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세계 각지에 동상을 세운다. 사진과 동상의 공통점은 대상을 박물화하여 보관한다는 것이며, 프리렌의 주정뱅이 성직자 동료가 ‘고릴라’를 추억하는 방식만큼이나 회고적이다. 프리렌 일행의 목표 자체는 마왕성 인근의 전설적인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주정뱅이 성직자의 개인적인 목표가 어린 시절 동료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임을 고려할 때, 이는 마치 기억의 물리적인 경로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프리렌에게 기억이 ‘찌른다’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사진적이라면 성직자의 기억은 흔적을 따라 현행적으로 제시되고, 또 지속된다는 점에서 영화적이다. 이처럼 사진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사이에서 [세계]는 기억을 밀고 나간다. 또한 이때 육체와 죽음은 그런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존재 원리가 되어주고 있다. 


어쩌면 가장 거대한 변화를 가장 작은 행동에서 끌어내는 게 만화의 주된 목표일지도 모른다. 아즈마 히로키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일을 두고서 세계의 결핍을 지적한 바 있다. 이 경우,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반대로 모두에게 닫혀있기도 하기에 세상은 만성적인 결핍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영화가 현행적이라면, 사진이 항상 결론으로 제시되는 이유가 하나의 표면으로만 이해되어서라면, 영화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다양한 표면으로 이해되는 것은 다양한 시제가 한 자리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인물들이 프리렌을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시제에서 만났음에도 공통적인 기억으로 수렴되는 듯 보인다. 프리렌은 자신이 과거에 방문했던 마을들을 재방문하면서, 기억에 남았던 장소를 방문하고 또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프리렌의 기억에 남은 ‘가까운’ 것들은 그녀와 가까웠던 인간인 힘멜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기억이 공간을 따라 각인되어, 이를 따라가는 일이 일종의 술회가 되는 형식은 작품이 제시하는 ‘신체’ 또한 하나의 장소로 사유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맥락에서 늙지 않는 신체는 그만큼 이야기로서 구전되는 장소들, 특히나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구해준 영웅들을 기리는 행위에 힘을 얻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예컨대 사진적 이미지의 ‘찌른다’가 어떠한 결핍으로 이해되는 일은 프리렌의 육체가 성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건 아닐까. 경우는 다르지만 <바이센테니얼 맨> 같은 영화에서도 ‘늙는다’는 건 기억의 단편화와 연결되고 있다. 다소 인간 중심적이지만, 어쨌거나 엘프 종족의 장생적인 면을 고려하면 엘프란 포스트휴머니즘으로도 바라보아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말인즉, 프리렌은 인간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도 프리렌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금 모더니즘의 세계로 끌어오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장송>은 장생종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바깥’을 탐구하는 21세기적 경향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용사 힘멜의 죽음 29년 후”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제를 갱신하는 이들 작품에서 ‘프리렌’은 시간들 사이를 가로질러 존재하는 준거점이 되어주는데, 이는 주인공이 프리렌이라는 점에서 작품이 보여주는 것들의 시작과 끝에 프리렌을 위치시킨다. 즉, 이 만화가 프리렌을 곧 [세계]로 삼는 만큼 프리렌의 이전과 이후에 관한 탐구는 그런 [세계]의 바깥을 가리키는 게 된다. 이는 곧 [세계] 안에서 자신이 자리할 곳을 주체적으로 정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모든 여정의 끝자락이 마왕성으로 고정되었다면 이들의 여정을 계속 보여주는 일은 이미 <명탐정 코난>처럼 이야기를 지속할 의미 따위는 사라지고야 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멈춘다’고 말할 때는 여기에 연루된 ‘바깥’도 멈춰버리고야 마니까, “’바깥’을 지속하는 동인이 되어주는 건 확장하지 않는 육체, ‘불멸’의 속성이다.” 


20세기라는 아이가 21세기라는 어른이 되기 싫어한다고 말해왔던 아톰적 세계관에서 ‘미래’는 [바깥]과 동의어가 아니다. 여기서 미래는 지속의 과정 안에 있기보다 지속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요구되는 준거점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만화는 프리렌을 그런 준거점을 삼아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순수를 오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쪼록 공간 안에서 ‘장소’라는 게 신체를 경유해서만 지각된다면, 매한가지로 만화에서 ‘이야기’란 인물의 신체를 통해서만 성립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른바 세계 신체로서의 프리렌은 영화가 행사하는 권리들에서 자신을 빗겨나가게끔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의 신체가 ‘불멸’에 가까운 속성을 지녔다면, 이들 이야기는 결론을 앞지르거나 초과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장송>이 책임을 말하는 방식은 바로 그러한 불멸 속성을 통해 개인의 죽음을 [세계]의 망각에 초과하게끔 하는 것, 순간을 권리로써 행사하지 않는 악인의 서사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