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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3. 2023

스스로가 온전한 책임으로만 남을 수 있는 세계

<진격의 거인>의 수정된 결말에 관한 단상


근래에는 ‘범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모 만화에서 등장해 밈화된 이 말은 불교적 의미에서의 ‘범인’ 정도로 풀이된다. <진격의 거인>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어떤 시대에서도 ‘진격’이 자유를 추구했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모종의 횡단성을 가장하는데, 이 말은 작품의 결말과 더불어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느 시대든 전쟁은 존재해왔고, 생명체의 본능이 ‘번식’이라면 이 말은 상대방을 미워할 이유 따위로 일반화될 공산이 크다. 즉, 우리는 ‘범부’를 통해 자기를 포기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평범하다’라는 말은 의외로 폭력성이 커서 우리가 거기에 숨어버릴 때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말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가령 에렌은 어떻게 하든 정해진 결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관해 말한다. 에렌은 미카사와 함께 도피를 택했던 과거를 보여주며, 이것이 ‘대안’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자기 스스로가 대안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때 아르민은 에렌에게 “함께 지옥에 떨어지자”고 말하며 그가 현재에 이르게 된 것엔 자신의 지분이 있음을 말한다. 그건 ‘대안’이 아니라 ‘사지’이며, 자신은 선택을 종용하게 한 거라고.



만화에서 문제가 되었던 대목을 수정한 채 막을 내린 이 작품에서, 에렌은 그렇게 말한다. “어디에나 있을만한 흔해빠진 바보”가 바로 자신이라고. 원작이 ‘학살자’를 운운하며 에렌에게 세계의 원죄를 맡기는 쪽, 그러니까 ‘대속’을 보여준다면 애니메이션은 다소 다른 방향이다. 문제의 대사는 ‘우리’를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고통은 분담됐고, 책임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원작이 대속의 서사였다면 수정된 판본은 말 그대로 대안이 없다는 쪽이다. 이들은 ‘범인’이어서 짧은 머리로는 고작 그 정도의 대안밖엔 내놓지 못한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고맙다’라는 말이 에렌을 특수한 사례로 꼽는다면, 수정된 대사는 아무쪼록 아렌트의 말에 가깝다. 악은 평범하기에 되려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다는 점. 즉, 어디에나 있는 ‘범인’의 시선에서 ‘악’은 자신이 특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출몰해 있다=평범이 되어being있다(한국어 문법으로는 틀렸지만)”라는 맥락에서, 에렌의 이 말은 자신이 지금에 이르게 된 일을 두고서 ‘가장 평범한 것’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게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에 어떠한 이유나 설명,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원작에서 에렌은 빠져나갈 구석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스스로가 막장이 되어버렸다. 인간사의 혐오나 폭력, 모든 분쟁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이 모습은 아르민의 “학살자”와 더불어 참극을 불러일으켰다. 작가의 의도는 아마도 에렌이 세계의 원죄를 짊어지고 나면, 이를 죽임으로써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점이었을 테다.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대목에선 에렌의 의식이 확장되며 세계와 개인의 처지가 역전된다. ‘바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그 자신을 바깥으로 추방해버리면서, ‘나’가 없다면 세상이 뭔가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으로 바뀐다. 그러니 여기서는,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며 세계의 ‘바깥’이 되어버리는 게 간편한 방법이 된다. 그리고 나만 없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란 이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뻔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 만화를 더는 제정신으로 볼 수 없게 됐다; 말하자면 모든 추방담은 <에반게리온>의 변형판본이다. 에렌이 세상 모든 나라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허물어버리자고 말하는 ‘에바’의 방법론과도 같다. 결정적으로 둘다 제정신이 아니다! 누구나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은 할 수 있어도,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개인의 입장을 [세계]로 확장하는 일은 결국 ‘나’를 강요하는 타의적 폭력일 뿐이다. 적절한 수정이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이 수정 자체도 만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방향이다. 결말에 다가서는 방식은 같았지만, 그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수정될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그렇다. 원작이 무언가를 말하는 방식에서 보다 추상적이었다면, 수정된 판본에서 ‘나’는 자신을 세계에 의탁해버린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는 식의 긍정론을 설파하려는 건 아니지만, ‘혐오’라던가 ‘증오’라던가 하는 감정이 한데 어울릴 때 파국은 자신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기에 이곳에서 파국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돌출해있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더는 평범할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이 이야기는 ‘나’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성장담이기도 하지만, 그 종착지에서 ‘나’가 없다면 이는 결국 자기살해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에렌이 태어나 삶의 이유를 찾는 과정이 자기살해의 탐색으로 이어지는 일이나 다름없다. 이른바 ‘특수’로서의 세계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채 각인돼버린, 왜곡 그 자체이다.


*


원작에서 문제가 된 대사는 “살육자가 되어줘서 고마워”로, 이는 ‘살육의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 것으로 오인받은 바 있다. 부연하자면 이런 오해는 바로 앞에 ‘인류의 8할’이라는 단서가 붙어서일 공산이 크다. ‘우리를 위해 적을 쳐부수어 주어 고맙다’ 정도의 인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살육자’는 이들의 죄를 대리하는 일에 관한 호칭이 되었다. 이를 통해 아르민은 에렌에 자신의 죄를 전가하면서, 이를 통해 자유를 찾는 인물로 해석되었다. 이른바 ‘살육’이라는 단어는 행위에 마땅한 감정을 보상하지 않는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만약 죄를 저지르는 일에 따라 인과가 비례한다면, ‘살육자’는 살육의 인과를 모두 짊어지고서 다른 이들에겐 살육의 행위에 면제권을 부여한다. 이는 학살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으로 오인되기에 십상이었고, 이런 전제에서 살육자는 ‘우리의 살육은 정당했다’고 말할 법한 게 되어버리고야 만다. 이른바 살육자란, 개인과 세계를 분리해 바라보며 그 과정에서 세계의 운명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의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고, 혹은 운명론이나 결정론을 믿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원작과 비교해보았을 때 바뀐 애니메이션의 대사는, 무난한 선택이지만 오히려 원작에 비례해 작품의 방향성을 다르게 가져가는 듯하다. 우선 원작에서 수정된 몇몇 대사를 보면, 특징으로 잡고 갈만한 게 몇몇 있다. 첫 번째는 “네가 결심하고 네가 한 일”이라고 응수하는 대목이다. 이 대사는 책임 소재와 시점을 명확히 하면서 대화의 맥락은 에렌의 땅울림과 그 선택에 있음을 보여준다. 에렌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소재가 어긋나지 않게 함과 동시에 일의 시작과 끝을 한 자리에 매듭짓는다. 이는 작품의 결말에서 나무를 배경으로, 이야기의 무대가 다른 시대로 이어지는 일을 통해 에렌의 행위는 에르디아 역사의 한 막을 내린 일에 불과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선 에르디아를 위해 세계 전역에 땅울림을 수행한 일이 수반되며 이를 통해 에르디아의 역사는 세계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학살’이 ‘기록’의 형태로 남겨진 셈이다. 에렌의 선택이 역사[세계]를 에렌에게 귀결되도록 만들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큰 틀에서도 무언가 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진격의 거인>의 이야기가 미카사가 에렌에게서 독립하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점은, 작품에서 ‘자유’가 서로가 아닌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천지전을 수행할 무렵에 에렌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의 정의를 전달한다. 그의 말을 따르면, 자신이 땅울림을 수행하는 일이 자유라면 그걸 막는 것 또한 자유이므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거인의 힘을 통해 모든 에르디안을 굴복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이 자신에 ‘반대’하도록 내버려둔 건 이들의 의지를 존중한 처사였다. 그러니까 에렌의 입장은 ‘운명’과 ‘의지’는 서로 다르며, 운명 안에서도 개인의 의지는 어딘가에 이끌릴 수는 있어도 강제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에렌은 자신이 ‘자유의 노예’였다고 설명하며, 여태껏 자유라고 생각해왔던 일은 사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진격의 거인’은 ‘시조’의 힘을 전달하여 최후를 결성하기 위한 밈에 가까웠다. 생명체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뿐이라는 주장에서 인간이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듯 이들 간에 ‘자유’란 의지와 동의어가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자유는 근대 이후 발생한 ‘개인’의 산물로 풀이된다. 개인과 세계의 인식에서 개인이 처음 발생함에 따라 자유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무언가를 하지 않을 권리’야말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권리’로 통하게 되어, 말 그대로 “부자유가 자유로 통하는 일”을 가리키게 된다. 이른바 <진격의 거인>에서 에렌의 입장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권리야말로 자유라고 말하는 일에 다름없다. 친구들이 더는 싸움을 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자유는 친구들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일에 대한 강제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 이 자유롭지 않은 행동이 바로 이들을 자유로 이끈다. 이처럼 ‘구축’은 거인을 모두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전투를 하지 않는 일에 대한 자유를 가리키며,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선택하지 않는 일”이 바로 자유다. 왜냐하면 선택이 곧 책임으로 귀결되는 상황에서는 ‘선택하도록 예비된 것’이 바로 인간의 결정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르민이 에렌에게 ‘살육자’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대목은 그런 면에서 선택들에 대한 처우로 이해된다.


*



실질상의 기관에 가까운 에렌은 세계의 선택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세계의 부자유가 되고자 한다. [세계]는 부자유에서 자유를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원작이 ‘살육자’라는 표현으로 의도하는 것이다. 한편의 부조리극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에는 살육의 행위로 인해 살육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할 수 없는 반강제의 평화가 깃들어있다. 부정에서 정이 생겨난다고 보는 이 관점은 우리가 이 작품에서의 ‘책임’을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로 바라보게 한다. 즉, 자유의 노예라고 풀이하는 에렌의 입장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자유에 대해 설명한다면, 책임이란 부자유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살육자가 되어줘서 고맙다’라는 말은 그러한 면에서의 부자유, ‘부조리한 것’을 끌어안고 사라지는 일에 대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대속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의 죽음과 함께 거인의 힘이 사라지는 일은 역사의 한 말미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원죄를 청산한다. 거인의 힘이 전쟁병기로 이용되는 부조리를 고려했을 때, 거인의 힘을 없애는 일은 에르디아인들의 핏줄에서 거인의 힘을 제거함과 동시에 이들이 속해있던 원죄와 존재 사이의 고리를 제거한다.



즉, 이를 통해 부자유와 자유는 그 관계를 잃으며 이 대목은 ‘책임’ 개념의 상실로 이어진다. 살육자라는 표현에 관한 오해의 뉘앙스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책임을 지지 않는 것과 책임의 대상과 소재과 불분명해지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가령 대속의 가장 큰 핵심은 죄의 총량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 즉 ‘죄의 크기’는 확대되거나 축소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즉, 전자의 사례에서 죄에 가역성을 부여하는 일로 풀이한다면 후자의 사례는 비가역성의 노선을 택하고 있음을 뜻한다. 문제는 대속의 특징이 회복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자신이 모두 짊어지는 일일 때다. 이 경우 ‘살육자’는 정말로 문제적인 대사가 된다. 한 사람에 고통을 몰아줌으로써 세계의 고통을 숨기는 일은 정당한가? 바꾸어 말하자면, 살육자라는 표현은 그러한 가역성에서 마치 이 세계에 고통이 없어질 것만 같은 뉘앙스를 준다. 실제로 이런 뉘앙스는 살육의 행위를 한 명에 몰아주면서 부정성을 탐하고, 나머지는 긍정적인 면만을 취득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원죄라는 말을 다름 아닌 [세계]의 것으로 이해할 때 이 이야기는 변화의 국면을 맞이한다.



이를 위해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 보자. 두 번째 대사는 “어디에나 있을법한 흔한”이라는 뉘앙스로 그가 범인(凡人)임을 강조한다. 이 대사는 살육의 행위와 결과가 하나의 운명으로 고정되어있었다고 말하는 일에서, 그가 특별하게 선택된 누군가가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세계의 일원임을 보여준다. 결국 에렌도 세계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 대사는, 책임의 소재를 에렌에 묻기보다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말한다. 자유는 획득되는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풀려나는 가치라고, 신이 죽은 세계를 보여주는 이 대사는 원작과 애니메이션이 어떤 점에서 뉘앙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원작이 에렌의 땅울림과 시조거인을 어떠한 신적인 존재처럼 묘사하고 이를 죽이는 일을 곧 인간의 해방, 즉 ‘존재’의 시작으로 그린다면. 애니메이션에서 범인의 범주로 설정된 에렌은 부정성에 대한 극복 즉 ‘존속’에 가깝다. 악역을 자처해 모든 에르디아인의 업보를 안고 살아진다는 이야기가 원작의 구성이었다면, 애니메이션에서 자유의 노예가 되는 건 오히려 [세계]이다.



에렌은 어느 순간 시계열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며, 자신은 [세계]를 상대로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연기의 문제는 결국 자신을 속이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존재와 존속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평범함의 다른 표현이 특별하지 않음이라는 점에서, ‘자유’란 특별하지 않음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냥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살아가기보단 어떠한 삶의 목적을 갖고서 살아가는 일이 자유라고 이 이야기는 말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결국 자유에 누가 속박되어 있을지를 고민하는 문제이자, 세계를 상대로 연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아르민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에렌은 미카사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그동안의 행동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다. 에렌에게 방벽 바깥에 대해 말하면서 여기에 ‘자유’를 대입한 게 자신의 죄라고 말하는 아르민에게 [세계]는 자신이 특별함을 잃는 세계이며, 달리 말해서 스스로가 온전한 책임으로만 남을 수 있는 세계이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어야만 하는 [세계]는, 인간에게 줄곧 삶의 이유를 묻는다는 점에서 평범함에 대한 가치를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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