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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31. 2023

한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 되기

<플루토>(2023)


“과학은 [세계]에 대한 환멸로서 여겨졌다”, “미래와 과거가 모두 현재 속에 포함된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시간의 화살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 무질서로부터의 비가역성에 관한 이러한 구성은 과학 그 자체를 넘어서는 많은 중요성들을 지니고 있으리라”. 


일리야 프리고진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에서 말하려는 건 엔트로피로 대변되는 우주가 인간의 존재의식까지 지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엔트로피의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우주가 폐쇄적이라고 한들, 인간의 운명이나 가능성까지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불균형의 상황이 가장 간단한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질서에서 혼돈이 풀려난다면, 혼돈에서 질서로 귀결되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말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는 정확히 후자를 말하는 작품이다. 이 만화의 주제의식은 “증오에서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는 작중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로 제시되고 있다. 가령 주역 로봇 7기와 빌런 로봇의 사연은 증오에 얽힌 개인사를 가리키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인간성’이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개중에서도 메인 빌런인 플루토의 사연은, ‘아버지’ 아브라 박사의 이야기와 더불어 증오의 대물림과 차세대 로봇의 인간다움을 중첩한다: 증오는 강한 에너지를 생성하지만, 이 생성은 창조가 아닌 파괴를 위해 소모될 뿐이기에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는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 일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브라우 1589라는 이름의 로봇이 처형되지 않고 현장에 구금되었던 건 논리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과학자들은 인간을 살해한 브라우가 ‘감염’되거나 ‘손상’되었으리라고 여겼지만, 여기엔 아무런 결점도 없었으며 말하자면 ‘증오’는 자연발생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인간 사회에 ‘증오’는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줬고, 이는 그만큼 ‘자연스럽기에’ ‘인간답다’고 말할 만했다. 결과적으로 ‘강함’은 얼마나 증오심을 품는지에 달렸다. 다만 그 힘이 아무런 것도 품어내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할 뿐이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생각을 인용하는 일은 이 대목에서 중요해진다. 간혈적이거나 단발성으로 보이는 범죄들에서 발견되는 증오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체계들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다고. 세계가 점점 혼돈에 빠져들어가고 로봇 공학이 발달하는 상황에서 증오의 발생은 무척 자연스럽다고. 이른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보는 이 관점에서는 ‘필연’이 도드라지고 숙명이 부각된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시작해 가장 불확실해 보이던 사건을 파고 들어가던 이야기는 이윽고 모든 사건의 중심에서 하나의 규칙성을 발견한다. 


인간들은 로봇을 두고 ‘로봇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인간만이 알 수 있는 것’을 논하지만 정작 이들이 가장 마지막에 배운 건 ‘증오’의 인간다움이다. 기쁨과 슬픔, 행복이 인간처럼 보이는 요인이라면, ‘증오’는 가장 인간스러운 감정임에도 인간을 적대하기에 용납될 수 없다. 로봇은 인간을 능가하려 해서는 안 되며 이는 더는 로봇이 인간의 통제에 놓여있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혼돈이라면, 증오를 배운 로봇 또한 그렇다. 증오를 배운 로봇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야 만다. 그런데 증오가 인간다움에 관한 감정이라면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증오를 배운 인간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폭탄과도 같다. 그리고 전장의 인간이 로봇처럼 변해간다면 전장의 로봇은 점점 인간을 닮아간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상 최강의 로봇 7기’는 대개 그런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39차 중앙아시아 분쟁에 징집된 로봇들은 분쟁의 당사자인 트라키아와 페르시아 양측 모두에 상처를 남겼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사막 녹지화 작업에 투입되었어야 했을 보라는 아브라 박사에 의해 파괴 병기로 개조되고, 플루토는 침략의 야욕에 무너지며 증오에 삼켜진 괴물이 되고야 만다. 


가장 잘 드는 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전하게 믿고 맏길 수 있는 칼이다. 바꾸어 말하면 불확실함은 예리하지만 그만큼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들다. 작품 내에서 아브라 박사와 아톰, 게지히트에 내려지는 진단인 “로봇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참의 조건항에 하나를 더함으로써 모든 확률의 폭을 넓힌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상대를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고, 그만큼 세계가 불투명해진다는 뜻이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기만 할 뿐 단순해지진 않아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그렇게 된다. <플루토>는 로봇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인간에 대한 로봇의 이해를 중첩한다. 서로를 ‘혼돈’에 두면서, 그런 혼돈을 잠재우는 질서로 증오를 택한다. 인간과 로봇이 유사해짐에 따라 로봇은 인간의 증오를 배우는데 어떤 면에서 이는 로봇의 권리가 보장된 작중 시점에서 정말로 인간과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로봇과 인간에 감정 말고는 차이를 찾을 수 없다면,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는 필연이다. 자신마저 속이는 로봇이었던 아브라 박사의 등장은 그런 비극의 서막을 알린다. 자신조차 모르게 되는 것, [세계]에 대한 거짓말은 어떤 면에서 과학을 환멸한 결과이기도 하다.  


오챠노미즈 박사는 작중에서 두어 차례 정도 ‘과학자인 내가 비과학적 소리를 하면 이상하겠다’는 취지의 대사를 한다. 그만큼 이 세계는 과학적으로 발달했지만, 로봇의 메모리칩을 두고서 “인간이라면 영혼에 해당하겠지”라고 말하는 등, 이성이 감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다. 브라우 1589의 인간살해는 그에 대한 실례로, 게지히트가 벌인 2번째 인간 살해 사건은 증오가 학습의 결과라는 점을 말해줌으로써 감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작품에 등장하는 최강의 로봇 7기는 인간다움에 대한 일곱 가지 면모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감성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작중에서 인간다움이 곧 로봇 성능의 척도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간다움’은 이들이 왜 세계 최강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른바, 가장 인간다운 것이란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을 잘 죽이는 일이기도 한 셈이다. 특히 이 이야기의 마지막엔 게지히트가 자리하는데 이는 최후의 인간적인 감정은 증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품을 추리물로 끌어가던 형사 게지히트의 죽음은 그가 2번째 인간 살해 로봇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사악한 기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진상은 내면의 사악함이며, 분노를 어디에 쏟아낼지만이 달랐던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또한 고도로 발달한 인간성은 로봇과 구분할 수 없다. 플루토와 아톰에게 99억 인구의 데이터를 주입했다는 설정은 ‘어떤 로봇이 되어야 할지’를 알 수 없기에 깨어날 수 없다는 말로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콤마 상태를 깨우는 건 ‘치우친 감정’이라고 말하면서 이 둘에겐 증오가 백신으로 투입된다. 아톰의 죽음을 목격한 게지히트가 모종의 사건으로 사망에 이르고, 재건된 아톰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자 텐마 박사는 아톰에게 게지히트의 기억을 주입한다. 내면의 증오를 목격한 게지히트의 감정으로 정렬된 아톰은 그런 증오를 마주하며 극복하는 게 바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몰라 로봇처럼 변한다면, 로봇은 어떤 로봇이 되어야 할지를 몰라서 인간이 된다. 무질서를 다시 질서로 되돌리려 할 때,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들만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증오는 어떠한 감정이기보다 세계의 무질서함에서 대두하는 하나의 질서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복수를 위한 삶, 콤마에 빠진 로봇, 혼란스러운 정국, 이들을 깨운 건 하나로 치우친 감정이었다.


혼란의 국면에 빠진 전쟁 상황에서 ‘증오’는 콤마에 빠진 국민들을 하나로 행동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혼돈의 상황을 잠재운 건 ‘증오’라는 하나의 질서였지만, 이 질서는 그들의 과거에서 주어진 몇몇 단서를 건드리는 것만으로 쉽게 무너지고야 만다. 전쟁에 파견된 평화유지군이 남긴 건 평화가 아니라 플루토라는 증오의 산물이었다. 페르시아를 침공한 트라키아 합중국은 페르시아에 대량 살상 병기 따윈 없다는 걸 알았고, 이를 따라 이들의 전쟁은 명분을 잃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명분을 잃은 만큼이나 전쟁의 존재 이유는 없었고, 이들 로봇의 기억도 트라우마에 지나지 않게 됐다. 허나 역설적으로 이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건 그런 과거의 기억이었다. 이들 로봇은 자신이 전쟁에서 보고 들은 것과 그에 따른 선택의 결과를 삶의 원동력 삼는다. 피아노를 배우거나 가족을 꾸리는 등의 이야기는 세계의 무의미에서 삶의 질서를 발견한 결과였다.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그런 암흑 속을 헤쳐나가는 건 실낱같은 희망이었고 마찬가지로 플루토와 아톰을 깨어나게 한 건 무질서보다 더한 질서였다. 가령 아톰의 경우, 그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던 건 게지히트의 마지막 기억에서 환멸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플루토가 세계 최강을 말할 때 사하드는 주변을 말라 죽이고 홀로되는 튤립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튤립은 만연하는 세계에서 의식을 되찾아오는 일이 왜 치우친 감정을 주입하는 일이었는지를 묘사한다. 그런 감정은 홀로 부각되어 오는 게 아니라 다른 모두를 죽일 뿐이라는 것, 말하자면 증오란 선택한 단 하나가 아니라 판도라의 희망처럼 모든 게 빠져나가고 남은 유일한 감정일 뿐이다. 그래서 게지히트는 증오가 아니라 증오하는 자신에 환멸을 느낀다. 세계에 가득한 증오보다 더 중요한 건 그런 감정에 의해 주변을 말라가게 하는 자신이라고.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주지만 정작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로봇이 되어버린 아브라가 사하드를 만든 우화를 가리킨다. 역설적으로 증오를 통해서야 로봇은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던 것이다. 증오처럼 강렬한 감정이야말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는 세계를 말라 죽이면서 홀로 되는 것일 뿐, 세계를 많이 알기에 자신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건 아니다. 질서가 인간다움의 증거라면 이런 생생함은 세계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느끼는 일이다. 결정적으로 아톰은 플루토와의 결전에서 그런 말을 한다. “내 증오가 너의 것보다 더 강력해.” 


플루토보다 성능이 더 좋은 로봇은 있었지만 이들은 증오 앞에서 무너지고야 만다. 엡실론은 플루토를 궁지에 몰아넣지만 플루토에게서 느껴지는 ‘슬픈’ 감정에 삶을 포기한다. 엡실론은 7인 중 징병을 거부한 유일한 로봇이지만 이를 대신해 그는 전쟁이 남긴 실무적인 것, 로봇의 시체산과 전쟁고아와 엮이게 된다. 다른 한편 게지히트는 자신에게 증오를 안긴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식처럼 여겼던 로봇과 닮은 구석이 있는 로봇에 살해당한다. 제로니움 합금의 게지히트는 무엇보다 내구성이 강했지만 내면에 있는 증오까지 막아내진 못했다. 만화판과 비교했을 때 게지히트가 주역으로 떠오름으로써 입은 수혜는 그런 인간화의 끝에 용서가 자리함으로써, 어찌 보면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되었다는 점이다. 아브라 박사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인격이 로봇 아브라로 재탄생할 때 그는 용서를 배울 기회를 잃는다. 반면 게지히트는 증오를 배웠음에도 자기 연민을 배우고, 마지막 순간에 용서를 이루어낸다. 게지히트의 표현을 따르면, “무엇보다 증오스러운 건 그런 증오심을 배운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톰에게 계승되어 삶을 증오로 정렬하지만 이는 증오의 범주에 자신을 포함함으로써 내파된다.


플루토와의 첫 번째 결전에서 살해당한 아톰이 게지히트의 기억으로 되살아날 때, 여기엔 깊은 증오가 자리하지만, 아톰은 마지막 기억에서 연민을 느꼈다고 말한다. 게지히트는 증오를 배운 로봇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행위인 ‘용서’를 배웠다. 이는 아브라 박사의 증오가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을 만날 때 스스로를 속이는 인간성이 되었듯, 게지히트의 증오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부류로써 상대를 용서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은 자기마저 속인다는 말은, ‘인간다움’에 대한 가치가 세계가 아닌 자신으로써 남는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가령 작품 초반의 노스2호 에피소드에는 자신을 위한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가 나오는데, 노스2호에 의해 밝혀진 진상에서 그는 사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증오의 감정은 자기를 속이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노스2호에 의해 치유된다. 그런 측면으로 보면 <플루토>에서 용서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지만, 그것이 자기를 속이는 행위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푸코의 말처럼, 인간다움의 가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질서를 세우는 일인 셈이다. 그렇기에 아톰은 과학 너머의 혼돈에서 돌아올 수 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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