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
1.
오와콘이라는 말이 있다. 끝장난 콘텐츠(終わったコンテンツ)의 약어로, 한때 흥행했지만 지금은 기세가 꺾여 예전 만하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퇴물’정도의 느낌이겠지만 아무쪼록 그래선 느낌이 살지 않는다. ‘퇴박맞은 물건’을 줄여 만든 ‘퇴물’은 단순히 거절당했다는 느낌일 뿐이지만, ‘끝장났다’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구슬프다. 왜냐하면 ‘끝장’은 비가역적인 것, 결말이라던가 하는 마지막 순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와콘은 이젠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려서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사태를 가리킨다. 가능성이랄 게 없는 이 죽음의 땅은 톰 후퍼의 <캐츠>에 대한 모 논평처럼 “남겨진 우리는 불행하게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후자에 가깝다. <바람이 분다>의 결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로 끝난다면 <그어살>은 “전쟁이 끝났다”라는 말로 끝난다. 지브리의 ‘오와콘’이라 볼 정도로 여기에는 이루 못할 쓸쓸함이 있다.
세간에 잘 알려진 것처럼 <그어살>은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만들었다. ‘끝’을 뒤집었다는 점에서는 다소 믿을 만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번 끝냈던 걸 살려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낮아졌고, 낮은 기대치는 영화를 별다른 생각 없이 보게 했다. 기본적으로 이는 해동했던 식품을 다시 얼리는 일과도 마찬가지라서 작품을 씹는 맛이 없는 푸석푸석한 식품으로 만들고야 만다. 이는 개인적인 판단이라기보단 “왜 끝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시리즈물의 공식을 답습한 것이다. 위에 말해두었듯이 <바람>과 <그어살>을 두편의 연작으로 본다면, 자연스레 ‘끝내는 쪽’이 되어야 할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보기 싫은 이야기’가 되고야 만다. 마치 서부극의 존 웨인이 살아돌아오는 이야기라거나 할까. 하지만 그런 점에서 <그어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이야기다. 늙은 영웅은 자신이 죽이거나 살렸던 작품 속의 인물들을 데리고서, 마지막의 무대를 연다.
그 제목처럼 관객에게 남겨진 질문은 이미 전작에서 “살아야겠다”라는 형태로 답해진 바 있다. 이런 추측에서라면 <그어살>은 “이젠 끝내도 좋겠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영화는 탑의 주인이 된 할아버지 스스로 탑을 무너트리는 일로 끝맺음한다. 혈육인 손자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를 스스로 끝내는” 이 이야기는 그 입구를 열고 닫는다는 점에 충실하다. 가령 탑의 주인이 소년에 “넌 순수하니 나를 대신해 세계를 지탱해다오”라고 말하자 그는 다음처럼 답한다. “머리의 이 상처는 제가 스스로 낸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소년의 이 말은 영화가 처음 시작하던 군수공장 장면으로 되돌아가, “상상력으로 일궈낸 이상향의 세계”따윈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하야오는 일평생 현실의 부족함을 상상력으로 메우려 했지만 <붉은 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맺어지지 못한 채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앵무새의 날갯짓이 표현하듯, 상상은 현실에 닿기를 포기해버린다.
<바람>이 다소 열린 결말로 끝났다면 <그어살>은 보다 자신에 다가섬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편이다. 두 영화는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하는데 여기엔 군수공장을 하던 집안과 거기서 자란 ‘나’가 있으며, 비행기와 하늘에 대한 동경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도착하는 곳은 다르다. <바람>이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야기라면 <그어살>은 그런 하늘에서 추락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일단 이야기의 출발점부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던가. <그어살>은 하늘 위에 아름다운 세계가 있던 <라퓨타>나 세계의 한복판을 부유하는 <붉은 돼지>, <마녀배달부 키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영화가 아니다. <그어살>은 어머니에 대한 심층 기억에 다가서고자 무의식의 바닥으로 침전하는 작품이면서, 그 안엔 어두컴컴한 현실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무의식은 꾸밈없는 현실의 잔재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어살>은 하야오가 꿈꾸던 세계의 무의식이 무너져내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
아이가 태어난다. 전쟁이 끝난다. 영화가 끝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 세 가지에 순서를 매기는 건 쉽지 않다. 영화는 모험이 마무리되고 난 후의 후일담을 ‘전쟁이 끝나고 2년 뒤’로 설정하는데, 마지막 장면을 가족사진으로 끝내고 있다. 이 모습은 결과적으로 새엄마를 구한다는 모험의 목표가 마무리되었음을 말함과 동시에 소년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공장도 더는 이전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이가 태어나는 일과 전쟁체계가 무너지는 일이 교차한다. 한 세계가 태어나려면 먼저 무언가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말처럼 <그어살>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끝내려 한다. 모험의 종료를 유년기의 끝에 빗대면서,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을 소년의 가장 큰 성장으로 묘사한다. 이런 작법은 흔히 사용되는 부류여서 크게 통찰하거나 감탄할 만한 점은 아니다. 그러나 하야오의 이 작품에서 의미 있는 순간은 영화가 하야오 본인의 삶을 가져올 때다.
하야오가 만들 법한 캐릭터와 설정이 여럿 등장한다. 의도했다기보단, 앵무새들처럼 무너져내린 세계에서 탈출해온 난민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그들의 출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그들이 현실에 포섭되었을 뿐이라는 점이고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는 일은 그리 비참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어살>은 전적으로 지키지 못한 것들에 관한 영화다. 심지어 자신과의 약속일지라도 현실은 자신 있게 건네지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킬 수 없어서 그나마 지킬 수 있는 형태로써 애니메이션은 현실에 합의될 수 있기도 하다. <그어살>이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부류라면, 이 이야기는 후회하는 쪽보다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찍는다고 해서 세계가 멈추진 않지만 애니메이션은 살아야겠다는 유치한 마음이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세계다. 그러니 여기엔 딱히 별다른 이유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추락에서 동력을 얻으면서, 발걸음을 내딛으며 줄곧 한 세계를 끝장내려만 한다.
탑의 주인이 소년의 외고조 할아버지임이 밝혀질 때,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단서를 전달한다. 첫 번째는 탑의 후계자는 큰할아버지의 혈육이여야 한다는 점. 두 번째는 돌을 깎아 작은 탑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이 세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 탑의 주인은 다음처럼 말한다. “지금까지 13개의 블록이 있고 이를 4년에 한 번 정도로 쌓아올리면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탑의 세계가 외부와는 다른 순수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혹은 바깥 세계와는 다른 무언가라는 점에서 ‘영화적 체계’라고 볼 수 있을 법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지막’을 번복하고 나온 이 작품에서 세계의 종말은 작품세계의 종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해왔던 작업과 제작 주기에 관한 설교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후계에 대한 욕심을 엿보게 된다. 지브리의 세계 안에서만 생명을 얻는 것들이 있고, 이는 <토토로>나 <마루 밑>, <포뇨>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앵무대왕이 탑의 주인과 사자대면을 하는 장면에서 탑은 붕괴의 조짐을 피하지 못한다. 앵무대왕은 탑의 블록을 쌓아보지만 그는 혈육이 아니어서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탑의 주인이 선출을 포기하고, 앵무대왕은 자격이 없고, 후계자는 세계에 남기를 거부한 상황에서 세계는 결국 무너지고야 만다. 이 구도에서 탑의 주인을 지브리의 입장에 대입하면 이야기는 꽤 묘해진다. 하야오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에 살기를 포기한 걸까? 요는 이 장면이 마치 지브리를 이을 후계자가 없고, 탑의 주인은 소년을 선출하는 일을 포기하면서 그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다는 점이다. 앞서 세계가 태어나려면 먼저 무너져야 할 게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지브리의 마술적 세계-탑의 붕괴 또한 그런 맥락에 선다. 이는 어쩌면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직감하면서, 지브리가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그어살>은 현실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침투적이다.
3.
지브리의 큰 틀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싶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센과 치히로>의 경이로운 순간은 낮이 무너지고 밤이 내려오는 장면, 이계의 음식을 먹은 가족들이 돼지로 변하면서 시장판에 요괴의 모습이 드러날 때일 것이다. 이 묘사에서 현실은 어느 순간 이계로 변모해버리며 그 경계가 자동차가 지나온 비석이었다는 점은 영화가 끝나고서야 밝혀진다. <이웃집 토토로>는 어떤가. 한때 아이들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괴담이 돌았기도 한 까닭은 영화가 이계의 지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는 점에 귀인했다. 이처럼 지브리 영화는 현실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시작점이 풀려나는 형식을 취하고, <그어살>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만나 모험을 떠나게 된다는 점에서는 <고양이의 보은> 같은 작품을 떠올릴 수도 있다. 지브리 영화에서 동물은 인간계와 자연계의 사이를 잇는 존재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푸른 왜가리가 두 세계의 예외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그러니까 결말 이후에 생각해볼 수 있을 지점은, 내내 동행했던 왜가리는 탑이 무너지면서 자신의 힘도 잃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여러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규칙이나 힘 따위는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동시에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고, 여기엔 성장담도 포함된다. 성장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얻어낼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허구이고, 그러한 허구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우린 연속성과 유지가 순간들에 의존할 뿐이라는 걸 발견한다. 열렸던 문을 닫으면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말하는 히미처럼, <그어살>은 ‘나’란 존재가 하나 아닌 여러 세계에 걸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꾸어 말하면, 그렇기에 이 탑이 무너져야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영화가 지닌 해체의 면모는 그런 점에서 분열이기보다 분해에 가깝다. <그어살>은 이야기를 닫고 사진으로 빠져나온다는 점에서 <비정성시>의 필름 그레인과도 같다.
세계가 무너진다는 건 관계를 다시 성찰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야기를 돌아본다는 건 이야기를 끝내는 법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어살>은 <원령공주>나 <붉은 돼지>에서 살생을 주저하던 일을 끝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끝내는 방식으로 절단과 상실을 사용하기보다 탈출과 소실을 택한다. 가령 우리는 이계에서 넘어온 것 중에는 탑을 경계로 평범해져 버리는 동물이나, 가치들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평범함으로 돌아가는 일은 삶에 부가된 걸 본래로 돌려놓는다는 점에서 삶을 부정하는 요인이 되진 못한다. 오히려 이들 장면에서는 상실에서 진입점을 상상하게 되는 면이 있다.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일보다 뱃속의 아이에 더 집중하게 되는 일은 회복이라는 말의 뜻을 재고하게 한다. 왜 그녀는 특별함이 역전되는 이계에 가서 아이를 낳으려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본질적으로 영화 매체에 대한 질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장면은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는 일을 연상케 한다. 영화로의 진입은 기본적으로 모호하고 붕 뜬 경험이지만, 여기서 진입점이 되어주는 건 문을 열고 극장에 들어가는 일이다. 이와 유사하게 <그어살>의 탑과 그곳의 기묘한 입구는 현실과의 분리를 이루어내는 지점이 되어준다. 이 신화적 세계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스페인과도 같아서 희극과 비극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여기엔 단순히 영화적 경험이라 부를만한 것만이 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탑 속 세계는 현실을 잃어버린 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의탁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영화가 구분하는 시간선들에서 우리는 그런 영화적 경험의 주인은 항상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점에서 아이를 낳는 여정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만 온전히 주어진 경험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는 건 그런 경험이 망가지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 찬란히 분해되는 것, 회복의 과정이라는 점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