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는 여성 주연을 내세운 최초의 건담 시리즈다. 다만 이는 대외적인 설명일 뿐이고 작품의 독자에게는 다른 표현이 있다. “끝에 가서 말아먹은 건담 시리즈.” 건담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다소 조심스러운 일이다만, 그럼에도 궁금한 대목은 있다. 우노 츠네히로는 <수성의 마녀>를 두고서 모험을 전혀 하지 않는 작품으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일만 하고 다른 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약했을 때 주인공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우정담으로 볼 수 있을 이 이야기에서는, 나쁘게 말하면 우정놀이가 이루어지고 있고 돌려 말하자면 분위기가 진중하지 않다. 기업과 기업 간의 MOU에 가까운 장치인 혼약은 여성 대 여성 구도의 장르적 흥미를 끌어내는 일에 투자되어, 마지막에 가서는 누가 1등 신(부/랑)감인지를 따져 묻는 일로 변모한다. 쉽게 말해 여기에는 극이 아니라 장르가 더 우선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장르란 관객에게 예측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고 알려졌다. 이야기의 작법이 클리셰화되고, 이들을 학습한 관객들에게선 자신의 상상력과 세계의 상상력을 맞춰보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 이벤트는 꽤나 정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부위와의 조합을 통해 취향을 DIY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흥거리가 된다. 그러나 이 만화에서 취향은 유흥거리이기보다 취향 자신이 서사에 앞서 나가려는 듯 보인다. 먼저, 구엘과 미오리네의 약혼으로 시작한 이 이야기에 슬레타가 난입하는 일은 학원물의 장르적 클리셰를 깨부순다. 붙잡힌 히로인의 구도에 있는 모험물에서 따온 이 설정은 흥미롭게도 재능러인 슬레타가 학원 1위 구엘을 이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도 우연이 아니라 온전한 실력으로 이뤄냈기에 이 설정은 방어나 부진에서 오는 갈등이 아니라 슬레타와 미오리네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다.
인물의 성별이 어떻든 간에 학원 1위는 미오리네의 반려로 규정되는, 서사적으로 배치된 역할에 해당한다. 작품은 이 배치에서 두 사람 이외의 세계를 밀어내고자 하며, 이는 ‘1위’라는 타이틀을 통해 지켜진다. 이른바 이 작품에서 관계성은, 상호 간의 호감이 아니라 어떠한 배제의 원리에서 자신을 출발시킨다. 상호 간에 공통점을 발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간에 공통된 세계인 ‘학원’을 바깥 삼아, 공통의 바깥을 발견하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가령 작품은 학원 결투의 일인자는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설정을 관철하면서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관계를 엮는다. 여기서 슬레타와 미오리네 사이에 놓인 끌림은 캐릭터의 성향이 아니라 작품의 외적 형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듯 보인다. 기호적으로 대립하는 성향의 두 인물이 서로 마주 봄에 따라 작품은 둘 사이에 인위적인 관계의 끈을 놓는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서사가 아니라 장르적인 특성 안에서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장르적인 특성 안에서 만남이 발현한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우리가 알다시피 서브컬처의 특징 중 하나는 장르가 우선한다는 점이다. 서브컬처는 자신이 구축해둔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게 인물이 아니라 독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브컬처에서 인물은 안정화된 지표, 기호의 집합으로 표상되므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가만히 있어야 할 필요는 있다. 모에론의 관점에서 캐릭터는 분열된 서사와 관계없이 하나의 기호로서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이를 따라 모에로서의 서브컬처 캐릭터는 서사를 초과하거나 분열된 상태로서도 작품 안에 머무를 수 있다. 여기서 ‘바깥’이란 배제의 논리라기보다는 파악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더 가까우며, 이러한 미지는 우리가 흔히 ‘기호’라고 말하는 것에 포섭되지 않는 부분으로서의 ‘바깥’이 발현된 결과이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바로 그러한 바깥에서 진행한다.
기호에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의 학원은 반-기호적인 세계가 아니라 비-기호적인 세계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학원 안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공통 세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공통점이 꼭 학원일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이 작품에서 학원은 이야기를 진행하는 무대에만 그치며 실질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건담을 둘러싼 암투에 방점이 찍혀있다. 물론 미오리네 렘블랑은 작품의 무대가 되는 학원 이사장의 외동딸이기는 하다. 학원결투 1등은 홀더로서 렘블랑의 약혼자가 된다는 다소 낭만적인 설정이 여기 따라붙는다. 작품이 전복을 꾀하는 초기 1~3화는 약혼자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독자에게 클리셰 파괴에 따른 해방감을 준다. 이 점에서 학원은 렘블랑의 심적 세계나 지위, 외부 관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 되는데, 줄곧 지구에 가고 싶어하는 렘블랑의 모습은 이를 잘 반영했다고 할 수 있겠다. 관계의 진행에 따라 학원에 남고자 하는 렘블랑의 모습도 그렇다.
크게 볼 때 작품의 서사는 다음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 수성의 마녀 프로스페라, 베네리트-헤비 머시너리-우주의회와의 암투, 미오리네 렘블랑과 구엘 제타크 그리고 슬레타 머큐리의 관계. 작품의 주요 흥행 포인트가 되는 GL은 이들 테마를 하나로 엮는 축이 된다. 폭풍의 전학생이 학원에 등장하고 나면, 기존 학원의 권력구도가 흔들림에 따라 몇 가지 흥미로운 균열이 발생하고 여기서 지하의 서사들이 밖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즉 이를 위해서는 기존에 전제된 세계관이나 등장인물의 관계가 섬세해야만 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들에서 출발해 이것이 외부와 접촉하거나 서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화려함이 벌어지길 고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문제는 미오리네의 심상 세계라 할 만한 학원이 그 근본에서 갖고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스페시언과 어시언의 대립은 건담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할 뿐이거나 또는 바깥을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미오리네가 지구에 가고 싶어하던 시즌 1의 이야기는 시즌 2에서 수미상관이 된다.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미오리네에게 지구가 일종의 바깥이었다면, 아버지의 사망에서 상실되어버린 영향력이 지구로 가는 추력이 되는 게 바로 2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 과정에서 미오리네는, 그들 간에 얽힌 갈등을 풀고서 이를 토대로 회사를 재건해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는다. 이는 미오리네에게 새로운 기능이나 능력이 부여된다기보다는 기존에 얽혔던 걸 풀어냄으로써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게 된 것에 가깝다. 즉 미오리네는 극이 진행되며 성장했다기보단 일종의 해방을 겪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슬레타는 최초의 1화, 전학을 오는 과정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제에 가깝게 사용되며 이는 그녀의 어머니인 프로스페라가 지휘한 것임을 염두했을 때 기본적으로는 슬레타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없다. 슬레타를 메인으로 하여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서 슬레타는 ‘바깥’에 속한다.
미오리네의 심상 세계에 해당하는 학원에 전학을 온 슬레타는 그 관용어구처럼, 미오리네에 다가온 사랑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바깥은 미오리네의 ‘지구’가 아니라 지구가 아닌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에 투입된다. 즉 이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미오리네가 슬레타라는 바깥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토대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분류상으로 이는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삶의 터전으로 확장시키거나, 또는 슬레타의 안으로 귀속되는 방식으로 풀이되어야 마땅해 보인다. 전자의 경우는 아버지의 유산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을 바깥으로 추방함으로써 슬레타를 만나는 방식, 즉 내부와 자신을 긍정하는 방식이다. 후자의 경우는 아버지의 유산에 사로잡히면서 항상 그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식, 획득될 수 없는 지구의 대리물로써 슬레타를 선임하는 방식이다. 이 모든 일에서 지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있다기보단, 이야기의 바깥에 대입된다.
즉 작품에서 슬레타는 마치 렘블랑의 학원 그 자체와도 같으며, 이에 미오리네가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미오리네가 기르는 토마토는 지구의 것이자 어머니의 유산이기도 한데 이 토마토는 어머니의 숨겨진 메시지를 유전자 단에 숨겨놓음으로써 그 자신을 바깥에 추방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여기서 ‘지구’란 그 안에 바깥을 숨겨놓고 있는 비밀스러운 무언가이자 그럴 것이 기대받는 유망주이다. 그런데 2의 후반부에 미오리네가 토마토의 비밀을 슬레타에게서 전달받을 때 여기서 ‘바깥’은 예상치 못한 형식으로 귀환한다. 미오리네는 토마토를 통해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점을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이 거부하던 아버지 또한 ‘바깥’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애정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른바 이 작품에서 바깥은 인물의 직접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우회로로 사용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미오리네가 갈망하던 지구가 바깥으로 사용되는 일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우선 미오리네에게 슬레타가 해방구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슬레타는 학원의 규율과 규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 즉 기성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깥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실상 이 작품에서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지구 아닌 ‘바깥’을 발견하는 일을 촉발할 뿐 그 자신이 목적이 되진 않는다. 만약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발견하는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보다 학원 생활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2에서 학원보다는 물밑의 암투를 다루는 일에 집중하며 이 과정에서 미오리네와 슬레타의 관계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물밑의 환경 변화를 따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바깥을 우회하는 방식을 따르는 셈이다. 아마도 작품은 두 사람이 그러한 바깥, 시스템이라던가 하는 부분들을 거치지 않고서 직접 소통하며 대화하는 일을 내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났는지를 생각해보자.
기업의 세력싸움으로 시작되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프로스페라는 자신의 딸 에리에게서 재능을 발견한다. 에리는 건담을 조종할 때 가해지는 부하를 견뎌낼 수 있었고, 이를 따라 사람을 죽이는 병기를 잘 다루는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작품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2기를 거치고 나면, 슬레타의 에어리얼에 에리크트가 깃들어있음이 밝혀지는데 이때 프로스페라의 목적도 드러난다. 그동안 십수 년 전의 사변에 복수하려는 것처럼 보이던 프로스페라의 목적은 자신의 딸 에리가 데이터스톰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데이터스톰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0화의 사변이 작품을 복수극으로 설정하기 위함이 아닌, 친딸을 살려내는 일의 복선임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프로스페라가 지구에 데이터스톰을 덮어씌우면서 이를 토대로 에리를 지구에 살 수 있게 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앞서 지구가 바깥으로 설정되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 지구는 누구를 위한 행성인가?
스코어8에 도달한 건담 기체는 자의적인 행동이 가능하고 또한 세계에 실체화되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데이터망이 표면에 드러내는 방식에서, 우리의 현실이 되려 인터넷 관계의 바깥으로 여겨지는 일을 연상케 한다. 작품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전쟁에 관한 전언은 데이터스톰의 바다 안에서 인류가 정신적 합일에 따른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추론케 한다. 그러나 데이터스톰을 통한 오버라이드는 대상이나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소통과 합의에 따른 평화는 아니다. 만약 이게 평화가 된다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바깥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오리네가 지구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을 때 지구는 도피의 수단으로서 문제 해결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지만, 여기서 바깥은 현실에 반(反)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아닌 곳(非)일 뿐이다. 미오리네는 자신과 연결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했으며 바꾸어 말하면 에리크트도 그랬다.
이를 요약하자면 다음처럼 쓸 수 있다. “자신이 아니고 싶다.” 자신일 수 있는 방법이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 자신에 반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바깥을 탐색하려 한다는 점에서 학원의 전학생 슬레타는 일종의 우회로였을 것이다. 이는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만남이 GL 노선을 따르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기성 장르 관습을 우회하려 하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인류의 고향인 지구는 건담 세계관에서 버려진 축에 속하고, 이는 우주인과 지구인 간의 갈등을 낳는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어버린 지구의 사람들은 우주인과는 달리 자기네 현실을 우회할 방법이 없으며 이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바깥이 없음을 뜻한다. 그 점에서 학원은 두 지역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장소로써 무언가 대안을 찾는 위치여야만 한다. 하지만 작품은 극의 무대를 학원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으로써 미오리네의 동력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도록 한다. 미오리네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슬레타를 내부에 버려버린다.
슬레타를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추방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미 자신에 속한 것을 두고서 에둘러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까. 구엘의 경우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미오리네와 전략적인 동맹을 맺지만, 그는 샤디크를 비롯한 집단의 테러를 겪는 과정에서 지구를 자기 시야에 들여놓는다. 이를 통해 지구는 단순한 집단이나 문자가 아닌, 그가 아닌 곳을 통해 그 자신을 만들어내는 응집과 결전의 전초기지가 되어준다. 그런 점에서 구엘의 이야기는 사적으로 보았을 때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미오리네의 방식에 관한 IF 항으로만 소모된다면, 지구를 발견한다는 미오리네의 이야기는 그런 비교 안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이후 프로스페라가 에어리얼로 데이터스톰 영역을 전개했을 때, 세계의 바깥은 잠시나마 현현하지만 에리가 살아갈 곳은 이들이 살아갈 현실이 아니라 바깥이었다. 공통의 바깥을 모색하는 일로 출발했던 작품이 붕괴하는 건 이 대목이다.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과 이야기를 하려고 장르를 택하는 일은 명실상부 다르다. 무언가를 부수기 위해 무언가를 먼저 세우는 일 자체가 부당한 건 아니다. 아무런 악역이 없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쾌감은 내적인 부분으로 크게 제한되기 마련이다. <수성의 마녀>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학원을 데이터스톰의 우주로 확장함으로써 학원은 어떤 면에서 아이들에게 바깥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현현하는 장소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에리의 복제본인 슬레타의 모습은 마치 1순위와 차순위로 나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는 거대 정치 논리와 인물 간의 서사가 바로 그렇게 겹쳐져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둘은 명실상부 서로 다른 것이다. 두 세계에서는 지구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 거대 정치 논리에서 우주와 지구가 서로 반대된다면 인물 간의 서사에서 지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것으로 포섭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은 이들 간의 만남이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에게 살아갈 장소를 부여하려던 프로스페라의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세계와의 마찰을 빚는다. 그녀는 에리를 위해 슬레타를 버리며, 이 과정은 ‘바깥’을 내부로 들여오는 일에 비견된다. 그러니 이 작품이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여기서 배제의 논리는 둘 만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지 관습을 실현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됐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이 작품에서 학원이라는 장소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학원은 배움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적절히 있을 만한 장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바로 그렇기에 학원은 프로스페라가 베네딕트 그룹에 복수할 만한 적절한 장소라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이는 슬레타와 미오리네 모두에 바깥으로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학원물의 관습이 우주 정치로 확장되는 일은 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