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의 마녀>는 레이와 시대의 건담이자, 첫 여성 주연을 내세운 작품이다. 건담 시리즈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아는 게 없는 입장에서 레이와 시대와 건담의 조합은 어딘지 모를 이미지가 있다. 가령 건담에 관한 유명한 짤방 하나를 살펴보자. “이런 현실이… 이런 현실이 있단 말이냐?”라는 짤방으로 유명한 <기동전사 V건담>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뒤엔 “한창 뛰놀 때인 어린아이가…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어린아이가 전쟁을 하면 안 돼! 이런 짓을 하면 모두가 미쳐버린다!”라는 대사가 있다. 이들 장면은 반전의 논리를 펼치고 있으며 특히나 이는 토미노 요시유키가 감독한 건담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토미노가 건담 시리즈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실질상의 전후론이었기 때문이다. 토미노가 건담의 우주세기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을 말했다면, <건담> 시리즈는 메카물의 전통인 소년소녀 클리셰를 전후 일후 일본의 소년성에 결탁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건담>은 단순히 건담으로 풀이되기보다 “아직 간직한 것”의 맥락에 더 가깝다.
‘아직 간직한 것’의 맥락으로 바라보는 건담은 부흥 문화론의 연장선에 있는 듯 보인다. 후쿠시마 료타의 『부흥 문화론』과 같은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는 ‘재난’과 ‘극복’의 반복이며, 여기서는 전쟁도 마찬가지다. 일본국가의 성질을 자생과 회복으로 파악하는 이 논의에서 2차 대전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일본적인 것’을 솎아내는 과정이 된다. ‘옛것을 모조리 버리지는 않되, 새로운 것과 결합시켜 새 시대에 쓰이게끔 한다.’는 일본 고유의 문화는 ‘부흥’이라는 말의 어원을 짐작게 한다. 부흥은 옛것이라 해서 전부 버리지 않고 취할 건 취한다는 뜻이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런 부흥이 개인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소년성’을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한 순수쯤으로 풀이한다면, ‘유년기’는 분명 옛것이지만 파괴할 것만 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유년기를 새 시대에 쓰이게끔 하려면 그것을 어떻게 현재에 결합할 것인지를 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파괴되어야 할 것이 분명 있다. 그리고 이 파괴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를 거쳐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 일어섬은 단순한 자해가 아니라 시련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흐름에서 부흥문화론은 단순한 재난론에만 그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해서 무작정 폭우를 긍정할 이유는 없다. 말하자면 부흥문화론에서 재난은 역사의 흐름이지 역사에 대한 발견과 수정 시도가 아니다. 부흥문화론의 핵심은 지금의 공동체가 성립할 수 있게 된 이유를 탐색하는 것이고, 그 점에서 ‘전후’는 전쟁의 과정과 해법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부흥문화는 강도와 생성으로 풀이되는 들뢰즈의 철학에 더 가까운 풀이법이다: 가령 들뢰즈 철학의 핵심으로 ‘생성하는 힘으로의 차이’를 지적하는 제인 베넷은 『생동하는 물질』에서 사변적 실재론으로부터의 전회를 꾀한다. 세계와의 관계를 시간성 안에서 파악할 수 없다고 바라보는 사변적 실재론의 유행은 ‘존재’를 상관주의로 파악하는 일에 대한 반발심리를 담보로 한다. 이른바 ‘존재’는 그 무엇과도 상관하지 않으며 그저 사변적인 고찰을 통해 어떠한 지표적 흔적의 집합점으로만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쉽게 말해 이것은 주변인의 철학이다. 여기까지가 2010년대다.
반면 제인 베넷의 생기론적 유물론이 떠오른 시점은 2020년대의 판데믹으로, 2019년의 레이와 개막과 기묘한 시기적 일치가 있다. 이 둘이 엮인 건 사실상 우연이라는 점에서 ‘억지’라거나 ‘무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둘 간에는 자연과의 공존과 그들과의 정치를 논하는 생기적 유물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자연재해를 우주세기의 흑역사로 가정하는 일은 꽤 그럴듯하다. 흑역사는 어떤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이야기였고, 그 안에의 인간 군상이나 사건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집합체이다. 마찬가지로 생기론적 유물론에서 자연은 ‘바깥’으로 가정되지 않으며, 각각의 사물이 모두 생동력이 있으므로 거대 담론에 대한 하나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건담> 시리즈는 항상 우주세기를 역사의 과오로 인식했고, 여기서 흑역사는 그런 과오를 가르치는 기반이 되었다. 즉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에서 역사란 흑역사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 흑역사는 어떠한 재난 이후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흑역사 이후의 이들에게 각자의 삶과 이야기가 있는 만큼 흑역사도 그렇다.
흑역사를 자연의 위치에 놓는 건 그게 ‘자연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의 극복이 불가능한 만큼, ‘모두’가 다르게 이를 극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판데믹과 같은 재난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각자 다르다는 맥락에서 레이와는 ‘재난’과 ‘극복’의 연장선으로만은 파악될 수 없다. ‘재난’과 ‘극복’이 차이와 반복의 흐름으로 이해된다면 판데믹과 같은 재난에서 인간은 획일화되고야 만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세계자아로 확장될 수는 있겠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단 하나를 선택하지는 못한다. 레이와의 <수성의 마녀>가 연애담이 된 것엔 필시 그런 이해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재난을 하나의 거대한 바깥으로, 자연에 두는 관점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도 그렇게 된다. 어떤 망가진 사회가 있고 여기에서 다시금 개인이 일어서는 이야기엔 주변이 없다. 이곳에서 주변인물은 마치 <하루히>의 세계처럼 주인공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레이와 시대의 부흥론에서는 어떠한 환경에서 자생하는 이들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
소년소녀 클리셰의 특징 중 하나는 서로를 ‘간직’하려는 시도가 곧 세계에 등치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상대방이 세상의 전부라고 말하면서, 둘을 동시에 구한다는 그럴싸한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어 보인다. 허나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첫눈에 반함, 즉 ‘세계’에서의 어긋남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사랑에 빠진 건 그/녀가 세계와 괴리돼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를 배경 삼은 연극배우처럼, 무대에 녹아들기에는 너무 툭 튀어나왔고 또 그만큼 입체감 있다. 바로 이 ‘있을 법한’ 것들이 “아직 간직한 것”을 대변할 때 이 이야기는 의미있어진다. “정말로 그렇다”고, 긍정하는 힘은 이들 사회가 끝내 잃어버리지 않은 가치를 상상가능한 범주로 옮긴다. 그리고 상상가능한 범주가 확장될 때 세계는 ‘바깥’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면서 재난을 삶의 무대로 바꾼다. 그러니까 비평적인 관점으로 보면 레이와의 저작물은 마치 그러한 재난을 터전 삼는 것처럼 느껴진다. 헤이세이가 여러 방면에서 상실의 시대였다면, 레이와는 그런 상실이 ‘현재’의 대립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생하는 가치라고 말한다.
상실을 두고서 자생하는 가치로 포지셔닝하는 건, 상실이 무라카미류의 단순한 유행이 아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 같다. 잃어버린 마음을 표현하고자 갈구했던 여러 방안들은 그게 이미 법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클리셰화되고, 또 공식화된다. 이른바 상처를 말하는 방법의 표준화, 는 우리가 슬픔을 소비하는 방식조차 획일화되었음을 뜻하는 것만 같다. 이때 잠시 맥락을 이탈해보면 한국에서는 학교폭력을 다룬 <더 글로리>를 두고서 그런 논평이 있기도 했다. “요즘 나오는 학폭물은 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논평에서 해외 시청자의 반응은 “바로 맞서 싸우면 되는 걸 왜 굳이 어른이 된 시점까지 기다리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이건 학교폭력에 대한 고발의 양상이 사후로 진행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해외 시청자들의 말은 다시금 ‘바깥’을 떠올리게끔 한다. 본래부터 자기의 것이 아니었던 걸 구분 짓는 일은 타인의 취향을 ‘내 것’으로 착각했던 것만큼이나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재난이나 학교폭력 등의 외상에 주체가 대응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외재화다. 뇌는 사건을 객관화함으로써 그곳의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려 든다. 이렇게 분리하면 ‘그것’을 발판 삼아 어떠한 생성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생기론으로 돌아오면, 기억은 과거에서 항상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것은 벤야민적인 맥락에서 (언젠가는) 현재를 파열한다. 그리고 이 파열에서, 당사자는 역사의 천사를 만나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헤이세이와 레이와는 단순한 연표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삶에서 명목상의 지표를 제공할 뿐이다. 또한 이런 구분보다는, 이런 구분에서 레이와를 상상가능한 범주로 옮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말해질 수도 없고, 그러므로 미래를 말하는 방식은 ‘미래’를 ‘바깥’에서 내부인 현재로 들여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틈입의 과정이 바로 ‘맞서 싸운다’는 감각이다.
재난을 맞서 싸우는 일은 과거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과거를 밖으로 밀어내 극복 가능한 것으로 삼는 일보다는 과거를 줄곧 생기해온 삶으로 여길 때 비로소 과거는 싸움 대상이 된다. 최근 하라 케이이치의 <거울 속 외딴 성>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그렇다. 이 영화는 거울을 통한 서술 트릭으로 세계를 조각내지만 그 조각은 각각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을 보여준다. 같은 학교를 다니지만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곳에 모인다는 이 가정은 각자의 트라우마가 섞인 장소를 ‘바깥’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공통화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각자의 고민은 학교로 뭉치는 듯 보인다. 허나 이들은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함에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자는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다녔거나, 다니게 될 학생이기에 그들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이를 따라 과업은 자신의 손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미래’는 도피해온 ‘이곳’이 아니라 상상가능한 ‘곳’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래는 재난과 맞서 싸우는 장소에서야 상상가능한 형식으로 변질된다.
다시금 <수성의 마녀>로 돌아와 보면 ‘아직 간직한 것’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재난이나 상처, 트라우마는 그에 맞서 싸우면서 살해하는 방식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소년성처럼 자신이 줄곧 품고 가는 것이면서, 이따금 현재에 발작해오는 양상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발작이 극복되는 건 단순히 뇌간을 끊어놓는 일이 아니라 사건과 감정을 연결하는 신경물질에 맞서 싸우는 덕택이다. 미래와 바깥의 상관관계는 ‘상상’가능한 세계가 바로 그러한 상상으로 연결된 덕택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어쩌면 극장이 사라진 시대에 영화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져야만 할 것도 같다. 적어도 극장은 분열된 것과 괴리된 것 사이를 말끔히 봉합한다는 점에서 관객을 치유하는 듯 보이지만. 관객이 분열되든 세계가 분열되든 양측이 각자를 ‘현실’로 여긴다는 점에서 한쪽의 봉합은 다른 쪽의 분열을 일으키고야 만다. 그래서 존재는 세계가 돼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로 확장되라는 게 아니라, 아직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세계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자신에게도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