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평행우주를 다루는 영화이자, 평행우주를 부정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는 어느 하나만의 세계를 구심점 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일스 모랄레스를 주인공 삼지만, 미겔 오하라를 통해 각자의 이상향에 대해 말한다. 미겔에 따르면 정해진 사건을 바꾸는 건 세계의 붕괴를 초래하며 이를 따라 ‘일어날 일’을 마주하는 건 필연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 전체가 붕괴해버린다고 말하는 미겔의 논리는 말 그대로의 ‘세계’에 관한다. 그는 전작의 악당 킹핀과 마찬가지로 평행우주에서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려 했지만, 정작 이 우주는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붕괴하고야 만다. 즉, 이때 이들의 모습은 마치 모든 평행우주에서 단 하나로만 존재하는 듯 보인다. 어떤 세계로 가든 결국에 ‘자신’이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점은 영화가 ‘평행우주’를 소재 삼지만 정작 그러한 평행선을 달리는 주체의 아이러니를 말함을 보여준다. 이 아이러니는 평행하기에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고, 또 이들의 역사가 쉽게 대체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 모든 세계에서 개체는 ‘고유함’을 갖기에 세계선을 넘나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이들 각자에 고유함이 없다면 다른 세계로 갔을 때 더는 ‘자신’일 수 없었을 테지만, 스파이더맨이 몇 명이든 간에 이들은 각자로 통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고유성이 자신을 만날 때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른 세계에 떨어진 마일스는 평행세계의 자신을 만난다. 이곳이 지구-1610이 아닌 지구-42라는 점을 눈치챈 마일스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죽은 삼촌을 만난다. 그는 프라울러로 활동하며 마일스와 대립했던 애런 데이비스다. 마일스는 삼촌을 보며 반가운 내색을 하지만, 이내 그가 프라울러임을 자각하며 이에 관한 조언을 하려 한다. 하지만 정작 42의 프라울러는 마일스 자신임이 드러난다. 본래 42의 마일스가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돼야 하지만, 방사능 거미가 1610으로 이동함에 따라 두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이때 이야기의 양상은 다음처럼 요약된다. 42와 1610의 마일스는 삼촌/아버지를 잃음에 따라 각자 스파이더맨/프라울러가 될 운명이었다. 흥미로운 이 비교에서 우리는 평행우주 설정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이들 간에 각자의 고유성이 있음을 확인한다. 두 사람은 머리모양과 말투가 다르며 각자의 신념이나 신분도 다르다. 하지만 방사능 거미의 사례에서 확인했듯, 이들의 운명은 그저 거미를 두고 갈라졌을 뿐이며 어쨌거나 둘 다 마일스다.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자신을 마일스로 규정할 때, ‘마일스’는 단지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이 둘은 서로 같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고 따라서 서로 다른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로를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는 대목, 바로 이게 <어크로스>의 논점이다. 서로를 향해 “스파이더맨?”을 외치는 밈을 구현하는 영화의 한 대목이 우스꽝스럽게도 이를 잘 드러낸다. 평행우주론에서 우리는 이들이 겉보기만 같을 뿐 서로가 다른 개체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설정은 ‘자기’라는 외양적 정체성으로 응집되며 여기서 개체가 갖는 가능성이나 분열은 봉합된다. 그런데 <로키> 같은 부류의 드라마에서 평행은 곧 자신의 다른 판본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평행우주를 화해시키자고 말하는 <어크로스>의 화법은 ‘자기’를 봉합하는 일이 아닌가? 영화가 본격적인 심화를 겪는 건 이 지점이다. 하나를 위해 전체를 구하거나, 전체를 위해 하나를 구하거나. 트롤리 딜레마를 내세우는 미겔의 말은 세계를 구하는 게 곧 자신을 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분열을 세계의 봉합에 등치한다. 세계가 찢어지지 않으려면 ‘나’가 찢어져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헌데 평행우주라는 설정에서부터 이미 ‘나’는 찢어져 있고 이를 따라 존재의 분열이라는 평행우주는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렇다면 이 완벽한 세상에서 우리가 더 얹을 말이 있을까. 미겔의 주장에 따르면 ‘나’의 분열은 곧 세계의 봉합이므로, 이 수많은 스파이디가 존재의 고민을 겪는 것은 필연이라 하겠다. 존재는 분열되어야만 비로소 세계는 치유되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전반부의 내용만을 다루는 <어크로스>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쉽사리 유추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정답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정답이 없기에 이들은 서로 싸우며 인정 투쟁을 하는 것이다. 가령 자기 말이 옳다고 말하는 미겔의 모습은 정체성에의 통합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열된 사회를 한데 모을 수 있는 건 오직 자기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숱한 스파이디들에게 ‘응집’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해 스파이디가 방사능 거미에 물린 이들의 다양한 변형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응집은 ‘자기’에로의 결속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인 ‘나’는 분열된 세계에 의해 ‘나’일 수 있으므로 ‘나’의 분열은 세계의 안정을 위해 필연적이다. 그래서 스파이디는 항상 불행해야만 하고 이런 불행 자체가 스파이디로의 ‘나’를 규정한다. 사실상 스파이디는 이런 불행을 겪지 않으면 ‘큰 힘’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마일스가 프라바카르의 지인을 구하면서 변화한다. 미겔의 설명에 따르면 마일스는 모든 스파이디가 겪어야 할 ‘캐넌 이벤트’를 막아섬으로써 질서를 해쳤다. 즉, ‘불행’을 겪지 않게 됨으로써 이를 대신해 세계가 불행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계는 스파이디의 원죄를 짊어지는 대속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만 할까? 스파이디가 행복해지려면 세계는 불행해져야만 한다. 죄의 총량은 같으며 둘 중 하나는 죄를 짊어져야만 한다. 트롤리 딜레마의 원리이기도 한 이 양자택일론은 평행우주론이 감춘 세계를 지시하기도 한다. 평행우주, 그러니까 이 거품우주는 각자가 모두 고유한 세계이지만 이들이 담긴 욕조는 없다. 이들을 하나로 엮는 ‘우주’ 같은 게 없다는 소리다. 평행우주는 나란히 나열되어있을 뿐 절대적인 한 가지 판본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평행’이란 판본이나 변형이기보다는 횡단과 종합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평행우주는 이들 간에 ‘절대’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곳에선 죽었던 캐릭터가 다른 곳에서는 멀쩡히 되살아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캐넌 이벤트’라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은 비가역성을 담지한 전회의 순간이라기보다 횡단과 종합의 지점으로 사유된다. 스파이디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경험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해주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겪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는 건 아니다. 그 단계에 도달하는 지점은 필시 또 있으리라. 왜냐하면 바로 그게 평행우주, 나란히 있어서 개인에게 선택지를 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두 명의 마일스가 마주보는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이 장면에서 마일스는 또 한 명의 마일스가 공격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설정대로라면 스파이더 센스가 작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이런 연출을 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장면은 ‘자신’은 ‘자신’을 위협으로 여길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위에서 말한대로 고유성을 고려한다면 이 둘은 서로 다른 개체이므로 감지 능력이 발휘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본다면, 이 대목은 횡단과 종합의 지점이 아니며 사실은 본래부터 하나였다고 보는 게 옳다. 즉 두 마일스의 만남은 자신은 오직 자신에 의해서만 구해질 수 있음을 말함과 동시에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두 세계를 봉합한다. 쉽게 말해, 두 명의 마일스가 공존할 수 있다면 ‘나’와 ‘세계’가 양립하는 세계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1610과 42의 마일스는 서로를 말함으로써 미겔의 말이 틀렸음을 몸소 입증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미겔의 말과는 달리, 이곳에는 객관적 현실은 오직 서로에 상관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그렇기에, 이 둘은 서로에게 ‘각자’여야만 비로소 객관적 현실을 이루어낼 수 있다. 결국 스파이디가 하나로 모이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도 미겔 자신의 고유한 현실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정답이란 게 없으며, 영화를 보다 보면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그렇다. 영화는 마일스의 반대자로 미겔을 선보이지만, 정작 미겔도 자신의 세계를 살고 있을 뿐 유일한 세계를 살고 있지는 않다. 미겔은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지배적인 현실을 모두의 현실에 대입하지만, 스파이더 햄의 말처럼 이런저런 종류의 ‘스파이디’는 이상하더라도 충분히 있을법하다.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들을 하나로 엮는 일은 방사능 거미와 같은 부류의 능력이 된다. 자신에게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신체적 원리야말로, 이들을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서 빠져나오게끔 해준다. 요컨대 스파이더 소사이어티를 구성하는 건 스파이더 유니버스가 아니라 스파이디를 통해 불려가거나 불려오는 절대적인 상관이다. 사건은 세계 안에 독립 변수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개체들의 교집합으로 태어난다. 스파이더 소사이어티가 사건을 막는 게 아니라 이들 사회가 되려 사건을 만들어낸다. 스파이디는 자신을 스파이디로 규정하는 다른 세계에 의해서만 자신을 스파이디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다고 보면 ‘절대적’인 사건은 이들의 사건이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현실 안에서만 유효할 뿐, 이들에 의해 상관적으로 작동하는 다른 세계들 안에서는 무용하다.
마치 배트맨이 있는 고담이 되려 범죄자 소굴이 되는 것처럼, 이들을 엮는 건 존재의 알레고리다. 가령 거대한 악으로 성장한 스팟이 구멍에 몸을 밀어넣으면, 그 안엔 작은 세계가 보이는데 사실 이는 각각의 독립된 평행세계이다. 이 장면은 스팟이 마일스에게 “나는 너로 인해 태어났고, 너도 나로 인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목과 얼추 겹쳐지는 듯한 인상이 있다. 심연을 들여다본 사람은 심연에 의해 들여다보아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말처럼, 평행우주도 그들을 그렇게 돌아본다. 정확하게는 서로를 의식함에 따라 이들 간에 하나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마일스가 마일스를 만났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걸까?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 의해 존속하는 관계다. 독립된 세계가 서로에 상관적으로 되면서 객관적 현실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미겔이 불변의 진리라고 보았던 캐넌에 가깝다. 지배적인 현실이 사실은 곧게 뻗은 선이 아니라 어떠한 것 사이를 가로지른다는 점 말이다. 말하자면 이는 전작의 빌런인 킹핀이 가족을 데려오려던 시도가 ‘그’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흐름에서 빼낼 뿐이라는 점에서 실패했던 이유와도 같다. 애초에 이들을 담을 욕조란 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