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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0. 2023

풀려나는 일들의 최전선



"의식적 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최애의 아이>는 16살의 나이로 쌍둥이를 임신한 아이돌 소녀가 스토커에게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칫 스포일러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내용은 사실 프롤로그에 가까우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진 않겠다. 만화는 아이돌 부모를 잃은 두 남매, 아쿠아와 루비가 범인을 찾아 세간에 일을 고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아이’의 죽음은 언급을 피해 가기 어렵다. 문제는 만화의 표지에 그려진 소녀의 얼굴이 이를 주인공으로 여기게끔 하던 중이라는 점이다. 소녀의 살해장면에서, 그동안 아이의 모습에 끌렸던 팬들은 큰 충격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아이’의 팬이었던 두 사람이 ‘아이’의 아이로 환생해왔다는 설정은 이러한 프롤로그를 위한 흥밋거리로 전락하고야 만다. ‘최애’의 아이로 환생했다는 설정이 일종의 <다!다!다!> 같은 식의 육아물을 기대하게 했다면, 아이의 살해장면 이후로 만화는 그냥 자기 부모를 죽인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여기서 환생이라는 설정은 내적으로 딱히 필요없어져 버리며 작품 외적으로는 독자가 작품의 안의 세계에 이입하게 하는 장치에 불과해져 버린다. 헌데 그렇다면, 작품 밖에서 작품 안으로 ‘전생’해간 독자가 자신이 끌렸던 ‘최애’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건 일종의 기분 나쁜 농담인 게 아닐까. 표지사기와 같은 부류로 사람을 끌어모으다가 그 속내와 전개에서 기대를 배신하는 작법처럼, <최애의 아이>는 독자를 배신하고 또 그러한 두 명의 아이(‘아이’와 그녀의 아이들)를 내버려둔다.


생각해보건대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꺼낼 수 있는 두 개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아이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며, 하나는 아이의 살해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다. 먼저 전자를 말해두자면 서브컬쳐 문화에서 작품의 인물 연령대가 주로 성인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설정은 고착화되어 더는 진행해도 새로울 것이 없는 성인들에게서 어떠한 발전적인 이야기, 혹은 성장담을 보여주기가 어렵다는 점에 귀안한다. 성인이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를 뜻한다면 ‘성인이 아닌’ 것은 아직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며, 또한 그에 준하는 능력이 없거나 혹은 아직 발전의 가능성이 유구하다는 점으로 풀이된다. 다른 한편 어른들이 게임을 할 때 과금을 하는 이유를 떠올려볼 수 있다. 어른들이 게임에 과금을 하는 건, 기본적으로 경제력이 있어서지만 ‘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관점에서 이를 접근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른들은 시간이 부족하며 이에 따라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 등장해올 여지도 적다. 이는 신체나 능력적인 면을 떠나 그냥 단순히 절대적 엔트로피의 부족에 시달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아주 많고 그렇기에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마주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아직 무언가를 책임지지 않고, 무언가에 얽메이지 않으면서 줄곧 재도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나이가 바로 ‘성인 이전’인 셈이다. 말하자면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은 어떠한 결론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이전’이다.


결론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아이’란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미성숙함의 상징으로 보았던 일과는 정반대의 접근 가능성이 있다. 어른이나 선생이 책임지는 존재이자 성숙의 끝자락에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면, 아이와 학생은 어떠한 끌림의 작용점이자 열린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보아도 좋다. 쉽게 말해 ‘아이’란 자신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뜻하며 이런 의미에서 <최애의 아이>에서의 도입부는 단순한 이입의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가능성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자구조가 단단해서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게 어른의 책임감을 구성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가족의 끈끈함이라던가 사내에서의 업무적 고유함은 아이의 상태로 퇴행할 때 견고한 구조를 잃고서 다시금 가능 상태로 환원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이’가 미완의 존재로 풀이된다는 점에서 아직 이야기를 끝내기엔 이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열린 구조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아이가 가능세계의 일원이라면 어른은 왜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가? 어떤 관점에서 아이는 어른이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아지고, 이는 ‘미래’를 맡긴다는 식으로 표현되곤 한다. 계승이라 부를 법한 행위가 이루어지고 여기서 아이는 어른의 책임을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사회적 구성원의 일부로 그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관점에서 어른은 아이와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다.


여기서 후자의 관점인 “아이의 살해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를 짚어보도록 하자. 살해라는 표현은 문학에서 이전까지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우화의 성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문맥에서 살해는 이야기에 하나의 결절을 만들어두는 것으로, 시간이 리니어해서 별다른 사건이라 할법한 게 벌어지지 않는 어른의 일상에서 ‘사건’이 하나의 결절로 이해된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살해가 시간의 흐름을 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벤트가 된다면 <최애의 아이>의 프롤로그는 책임이라는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에 비견된다. 평범한 육아물에서 아이는 자신이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소중한 존재지만, 그런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살해당하면서 벌어지는 일은 남겨진 자의 삶이 아니라 어떠한 이전 세계를 그리는 것에 집중한다는 걸 염두에 두자. 그와는 반대로 이들은 퇴로가 아닌 미래방향을 모색하곤 하는데, 이는 아이가 죽은 시점에서 이미 삶이 끝났다고 여기는 부모의 세계가 아니라 ‘아이’가 살해당하면서 부모와 우상 모두를 잃은 아이들의 관점에서는 이 세계가 종주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의 살해에서 출발하는 건,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 과거의 세계가 살인자를 더 많이 다루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그 피해자의 처우에서 이야기가 서술되는 경향이 더 크다는 점을 말이다.


가령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병에 걸린 시한부 소녀와 또래 남자아이의 연애담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이 이야기의 끝은 소녀가 병에 걸려 죽는 게 아니다. 소녀는 병에 걸려 일반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소설의 도입부에 암시되던 묻지마 살인마에게 살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독자들이 예측하는 선에서의 수위를 넘어섰으며, 그건 예측의 가능성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책임질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다. 소설은 살해의 방식으로 독자에게 결론을 추론하고 예측하는 책임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이를 통해 이야기는 이전에 집중된다. 이 소설에서 소녀가 살해당하는 일은 직설적으로 표현했을 때 “일반적이지 않기에 특수한 경우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하자면 어른들이 대개 사회적 관습 안에서 보편타당하거나 관습적이고 일반적인 경로를 따르는 것과는 달리 모든 아이는 그러한 일반 이전의 특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른바, 아이는 무언가를 묶어두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책임이나 과업을 묶어 둘만한 고정력은 없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의 살해는 사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가능성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반대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가능한 존재이므로 타인의 가능성을 빼앗는 것은 인류의 중대범죄가 된 것이다. 요컨대 어른이 아이를 책임지는 건 아이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규제하려 드는 게 아니라 일반성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함이 좌초되지 않도록 돕는 일이라 보아도 좋다.


물론 살해를 두고서 가해의 입장에서 피해의 입장으로의 전회를 다루는 건 그 시대상에 따라 요구받는 특정 가치에 영향받기 마련이다. 1960년대의 학생운동에서 1990년대의 묻지마 테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에서 우리는 무자비한 악인으로의 마왕에서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라는 식의 서술로 바뀌는 걸 본다. 힘을 가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움직일 수 없으며(가능세계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어떠한 힘의 역학들을 가르칠 때 세계는 비로소 작동한다. 그렇다면 여기서(이들 작품에서) 묻지마 살해라는 현상은 과연 어떤 힘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건 바로 가능세계라는 전제를 묻는 게 아니라 세계의 가능성을 베르그손의 원뿔처럼 따라가는 알리기에리 식의 탐구이다. 묻지마 살인의 행위는 가해의 입장을 세계의 것으로 둔다는 점에서 피해에 관한 원초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이곳에서의 ‘이전’은 무한한 가능함에 등치된다. 즉 피해의 만연은 수혜받는 세계, 은총의 만연으로 변환되는 것이 바로 살해의 반대편에 있다. 그러니까 <너의 췌장>의 결론이 살해로 끝난다는 점에서 감정선을 따라가는 예측의 서술과는 달리 특정한 감정선을 두지 않는 무한한 감정선을 의도한다면, <최애의 아이>의 이야기는 아이의 살해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아이돌과 연기자라는 재능의 상한선을 따로 두지 않는 일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아이가 살해당하면서 그녀의 아이가 다시금 당시의 나이대로 성장해버린 이 상황 자체는 사건의 이후가 아니라 줄곧 어른의 ‘이전’으로 돌아가길 시도한다고 보여진다. 어른이 아이를 특정한 가능성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의 책임을 보여준다면, 어른의 ‘이전’에서의 아이란 가능형으로의 수사다. 여기서 아이의 살해는 현실 세계의 몇몇 사건들에서 맥락을 읽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가능세계의 중단이거나 혹은 힘의 역학을 짜내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아아 한다. 그래야만 이 복수극은 그저 허망한 것으로만 남지 않을 수 있고 또 현실의 우울함과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한국사회의 학폭물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만도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사회에서 학교폭력에 관한 인식과 처벌은 보다 엄중하게 다뤄지지만, 반대로 웹툰이나 드라마에서 학폭은 하나의 장르적 배경이나 클리셰에 가까우며 더 나아가서는 그냥 액션을 보여주려는 용도로만 소모되는 일이 잦다. 이런 미디어에서 학생은 사실상 과거의 조폭물을 답습한 무언가로만 보이며 그런 의미에서 학교폭력은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설정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편리한 도구로만 쓰일 뿐이다. 더 나아가 폭력에 대한 묘사는 <모범택시>처럼 아예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자신을 구제하거나, <D.P>처럼 법의 테두리 밖으로 이탈하면서 처분의 가능성 ‘이전’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이때 이들 작품은 마치 가능세계를 부정하고서 세계의 가능성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가능세계가 이미 배경상에 존재하면서 우리에게 어떠한 결론을 ‘예측’하게 한다면, 세계의 가능성은 세계 자체를 믿는다는 점에서 그와 함께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폭력적 세계가 아이의 것인 이유는 어떻든 간에 결국 세계의 확장을 다뤄서다. 단순히 ‘미래’라고 한다면 어떠한 인과와 과정의 맺힘으로써 사유되지만 미래가 아닌 세계를 말하는 한에서 인물은 그곳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미래의 바깥으로 내쳐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미래에서 내쳐진 바 있다는 사실을 토대로 그러한 미래가 있음을 역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한 가지 공식이다. 이는 결국 벤야민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부류의 살해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살해는 잔해를 만든다”고 말하는 일은 어떠한 개념은 신비와 특수를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분해되어 조각날 때 비로소 본래의 ‘이전’을 내보인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최애의 아이>는 아이의 살해에서 쌍둥이에게 재능을 각각 분할하고, 이를 토대로 계속해서 미래를 묘사하려 한다. 이때 중요한 건 이곳이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세계라는 점이고 이에 따라 미래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살해는 풀려나는 일들의 가장 최전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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