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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는 지브리의 문제인가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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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코로나 판데믹이 막 촉발됐을 무렵, 언론에서는 코로나가 끝나고 나면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는 ‘뉴노말’론이 횡행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끝날 이 사태에 관해 종결의 지점을 확보하는 것보다 그러한 종결 ‘이후’에 대해 논할 것을 언론은 주문했다. 이른바 이 사태는 그 종결이 확실시되었지만 정작 ‘끝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뉴노말은 하나의 문제제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기준 삼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작금의 현실에서 미래를 구상해보는 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므로.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현실을 종결의 지점으로 여기면서 그러한 종결을 토대로 현재의 변형인 미래를 선택했다. 그들은 미래가 결국 현재의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며 현재는 상시 미래가 될 잠재적 가능성을 지녔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현재를 바라보는 일은 미래를 바라보는 일에 그 동선을 겹쳤으며, 이제 ‘현실이 끝난다’라는 말은 ‘미래가 끝난다’라는 말에 등치되었으므로 ‘현실’은 끝나서는 안 되었다.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현재가 존속해야 한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현재의 후행에 있으므로 현재의 종언은 곧 이후의 삭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현재를 지속시킨다는 말은 비윤리적으로 들리는 게 사실이며 어떤 점에서는 차라리 안락사가 더 나은 선택이라 보는 시선도 있다. 고통받는 현재를 견뎠을 때 돌아오는 게 고통받는 미래일 뿐이라면, 즉 미래가 현재의 연장선에서 뉴노말로 재현된다면 미래는 현재와 같은 평면에 놓이고 만다. 그렇다면 그 평면에서 기약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삶을 중단하는 게 더 나은 처사가 아닐까? 이는 어린 시절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와 같은 존재라 믿는 것만큼이나 같은 입지다. 자신의 존재를 확언하는 일엔 좋을지 몰라도, 이런 사유는 어떠한 가능성을 자신의 다른 면에서 출발시킨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으로부터 감염될 우려가 있다. 이른바. 미래에서 현재든 현재에서 미래든 어느 한쪽으로의 재매개가 일어난다는 말은 ‘회복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한편, 반대로 볼 때 회복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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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절대적 지표를 기점으로 나뉘는 가능성은 회복에 관한 절대적 믿음일 수 있고 한편으로는 돌이킬 수 없이 빠져버린 절망일 수도 있다. 그래서 뉴노말이라는 평면은 지평선의 낭만을 가리키는 한편, 동시에 안락사의 윤리를 저격한다. 절대적인 회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모두를 집약한 이 평면에서 우리는 어떠한 종결을 목격하고, 그 종결을 뛰어넘는 순간 자기 존재가 현실을 뒤바꾸는 일을 본다. 이 종결의 지점은 잠재적 가능성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뿌리내리는 일에 사용될 뿐인 것이다. 종결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미를 매듭짓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분별한 확산이 이루어지는 구심점으로만 사용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구심점, ‘종결’을 확신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가령 언젠가 코로나가 끝날 것이라는 예언이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언젠간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일은 확고한 ‘구심점’을 만들어두긴 해도 종결의 불가능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을 불가능성의 확산으로 만들어버리므로. ‘가능’을 말하려면 의식은 산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죽음, 전쟁, 기아. 세상에는 없어지는 게 더 행복한 것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 문제들의 특징은 종결이 불가하다는 점에 있으며 이에 따라 대부분 사람에게 ‘문제’는 극복의 대상이라기보다 다른 문제의 구심점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진정으로 믿기보단 다른 힘들의 교차지점으로 삼으면서 세계를 미래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니까 ‘종결’은 종결이 불가하기에 되려 그 자신의 존재를 성립시킨다. 또한 이런 맥락으로 보면 우리가 겪는 어떤 문제들에서 종결이라는 표현은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보다 이야기를 출발시킨다는 점으로 파악되는 듯 보인다. 어떤 사건을 끝내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이 시작된 순간이 바로 종결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언뜻 보았을 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빅뱅 이후를 살아간다는 점에서도 ‘이미 끝나버린 폭발’의 무한한 연장에 있으며, 이 안에서 우리의 의식은 계속해서 팽창-산포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팽창 덕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희망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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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홍보하며 나눈 인터뷰에서 “재난 3부작을 만들어가는 주된 동인은 ‘상업영화’라는 자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처음에는 위로로 시작한 작품이 사람들이 고통받는 와중에 진정으로 닿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것일 뿐인 것으로 오인되는 과정은 확실히 괴로웠다”고 그는 발언한다. 그와 동시에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넘어 ‘위로’를 전할 방법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는 그는 <스즈메>를 뉴노말의 방식으로 구상한다: 이 영화의 골자는 재난을 특수한 사례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일상의 한 축으로 구성하는 일이며 이 구조에서 ‘종결’은 자연스레 배제된다. 단지 봉인만이 가능한 이 현상은 명실상부한 자연의 의인화이며 자연의 거대함 앞에 놓인 인간의 무기력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기력함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위태로움”이 아니라 종결 의식의 산포로써 기능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재난을 막거나 받아들인다기보단 그것이 재난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중이며 오직 스즈메만이 이를 알아차리고 행동할 뿐이다. 심지어 그조차도 봉인에 불과하고 말이다.


봉인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말은 확실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마치 거대한 죽음처럼 묘사되는 재앙은 말 그대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날씨의 아이>처럼 계속해서 후대로 전달되어오는 설화의 일부라는 점, 현실 세계에 현현한다는 점에서 그 유사점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이곳의 사람들은 그것을 ‘일기예보’처럼 받아들이진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에겐 기상청의 예측이 틀릴 수 있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와 달리 지진의 발생을 예견한다는 인식은 거의 없다. 지진은 발생과 동시에 관측될 뿐이며 그러한 관측 이전은 일종의 특이점처럼 기능할 뿐이다. 그래서 자칫 지진은 극복이 불가능한 재난으로 이해될 공산이 크지만, 이는 재난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가능을 말하기 위한 기초단계로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들뢰즈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가능이라는 표현은 가능으로 말해지지 않기 위해 그 자신을 세계의 표면에 드러내는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건에 관해 위로를 건네는 일은 확실히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야말로 ‘미래’를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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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가 국제 영화제에 초빙되어 포스트 지브리의 후계자가 되어가는 요즘, 사람들은 그의 영화 안에서도 모종의 ‘지브리적인 것’이 드러남을 발견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첫 번째로 그런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신카이는 지브리의 문제인가?” 이 물음은 신카이를 지브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혹은 지브리적인 것에 관한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는 제언이기도 하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제대로 된 후계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는 ‘지브리적인 것’에 관한 논의가 활발할 수밖에 없으므로, 왜냐하면 ‘후계’라는 건 선대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기에. 그런데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에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런 건 아니다. 적어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엔 세계를 통솔하는 거대질서가 없었으며 오직 하야오에게만 그런 것이 있었다. 타카하타 이사오를 거론해볼 수도 있겠지만 ‘일상’을 잘 표현했다는 점이 하나의 세계질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건 자연과 인간 구도를 내세우는 하야오뿐이며, 이 구도를 신카이에 적용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신카이를 두고서 하야오의 후신으로 삼는 일은 영화 곳곳에 드러나는 오마주 때문이기도 하다.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별을 쫓는 아이> 등에서 신카이는 ‘지브리적인 것’에 관한 지적을 받았다. 여기까진 적어도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요인을 이해하고 잘 활용하는 작가로 이해되었으며 그것은 여전히 ‘신카이의 것’으로 풀이됐다. 왜냐하면 이들 영화에는 신카이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고 만난다는 것, 이 윤회의 고리 안에서 신카이는 지브리의 영역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을 통해 재난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세계]는 점점 애매해졌다. 인간과 세계의 구도에서 인간의 세계를 묘사하던 일은 이제 세계의 인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뒤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카이는 전과 동일하게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런 세계를 낯선 나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낯설어진 나라는 정작 현실의 재현이며, 그 안의 캐릭터는 정말로 판타지스러운 게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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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세계는 현실의 우리를 따라 만들어진 세계이다. 즉, 이들 영화 속 세계는 우리들 현실과 실시간으로 동기화된다. 가령 신카이는 <스즈메의 문단속>의 배경을 2023년으로 설정해두면서, 영화가 개봉하고 난 직후의 시간대에 관객이 도착하도록 돕는다. <날씨의 아이>는 2019년에 개봉했지만 작중 배경은 2021년이며, 최종적으로 이는 결말부에 가서 영화 밖의 세계인 2021년으로 좁혀진다. 말하자면 신카이의 재난 영화들은 어떤 형태로든 현실 세계를 작품 안에 끌고 오려 하며, 이를 따라 ‘인간의 세계’가 성립한다. 그곳은 ‘현실’의 세계이기에 우리들의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며 그 위에서 신카이는 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카이의 작품에 남은 흔적기관으로서의 지브리는 이들 세계가 판타지의 오마주가 아닌, 현실에 침입한 실재의 흔적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른바, 신카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에 벌어지는 특수한 것들의 사례로 애니메이션을 들면서,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현실의 실재 즉 ‘흔적’을 묘사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스즈메>에서 다이진을 본다. 다이진은 비교적 실사풍인 이 작화에서 귀엽게 ‘모에화된’ 축에 속한다. 혹은 등장해오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너의 이름은>의 운석을 떠올릴 수 있다. 운석은 우주에서 온 이방인이다. 이들 모두는 애니매이션의 틀 안에서 그것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선보이려 하며 단언컨대 이는 현실과는 섞일 수 없는 부류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실재는 애니메이션 만들기의 방법론 안에서 ‘현실 가꿔나가기’와는 완전히 괴리되어 있으며 이를 따라 애니메이션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말 따위는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의 다른 방향은 우리가 [세계]를 판타지스러운 것으로 규정했을 때 그런 판타지는 늘 관찰자로서의 외부를 필요로 함을 사유하는 것에 있다. 즉, 신카이의 재난 3부작에서 지브리의 역할은 그곳이 닫힌 세계, 단 하나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후퇴해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일이다-‘운석’과 ‘맑음소녀’의 공통점이 오래된 구전을 통해서 마치 이세계의 무언가를 지적하는 것처럼 묘사될 때,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점에서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후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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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재난 3부작에서 ‘지브리적인 것’은 이것을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의 측면에서 바라보게끔 유도하는 일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액체적 현실 안에서 현실의 메타몰핑을 시도하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는 영화가 있고 그 안에 정동은 애니메이션의 물성을 통해서만 다뤄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베르그손의 흔적을 따라 현실은 물질이고 기억은 액체적인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애니메이션의 물성이 기억을 잘 담을 수 있으리라고 보는 일은 합당하다. 그러나 ‘지브리적인 것’이라는 또 다른 흔적이 그런 기억에 섞여들지 않는 불순물로 떠오를 때, 그 점은 무수한 바깥을 내포하는 하나의 실점이 된다. 그래서 신카이의 재난 3부작에서 ‘지브리적인 것’은 일종의 폭탄 장치와도 같다. 우리가 지브리적인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은 이곳에 통용되지 않는 특정한 조류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 조류는 우리가 ‘불안’이라 부르는 것이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만, 마그마처럼 단층의 충돌이 없다면 별도의 화산활동을 이루지 않는다. 요컨대 지브리는 신카이에게 있어 현실의 단층, 동시대인 셈이다.


영화는 동시대를 말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행동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소위 ‘시대성’이라 말하는 것이 적절히 반영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영화 한편은 그 시대를 말하는 유일한 하나가 될 수가 없을뿐더러, 혹은 영화 자체가 한 시대의 예외적인 무언가가 될 수만도 없다는 점에서 영화는 동시대성을 갖는다. 즉 영화는 일부이자 전체로 존재하고 그 점에서 한점으로 귀결되는 듯싶으면서도 그 자신을 폭파의 지점으로 드러낸다. 말하자면 영화는 ‘불가능의 지점’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박살 내주었으면”하는 마음으로 관객을 기다리는 것이다. 요컨대 영화란 넘어설 수 없는 절망을 말하면서도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 단계로 이행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상업영화’의 무기력함은 헛된 희망을 말하기에 헛된 희망을 영화에 버려두면서 현실의 단계로 이행하는 게 될 수 있다. 상업영화는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기에 현실의 단계로 이행한다. 위로는 그 자신을 종결의 지점으로 삼지만, 정작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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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데이터를 조합해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정은 인공적으로 생성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날씨의 아이>가 인공적으로 기후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너의 이름은>이 운명을 인공적으로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인간이 이야기의 흐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식의 망상이 영화를 통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말인즉슨 영화가 아니라면 실현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며 그건 바로 현실에서는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현실을 어떠한 종결 삼는 일이다. 말하자면 ‘인공’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에 개입하는 일 만큼이나 자연 자체에 절대적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위’라는 인간 논리의 산물은 역으로 인간의 논리 안에서 파악되지 않는 것들에 관해 한 가지 단서를 전한다. 그건 바로 영화가 자연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인간의 논리 안에서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 마찬가지로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잘 팔리는 상품 만들기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규명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두는 것, 즉 트랜스코딩이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의 역할은 자연을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하는 일이다. 행여나, 자연 그 자체에 충실하려 하는 게 예술 영화라면 확실히 그것은 규명을 거치지 않는다고도 볼 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으며 이는 우리가 마주한 게 인위 이상의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자연은 어떤 경우에서도 종결의 지점에 해당하고, 이로 인해 극복의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다른 문제들을 사유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난은 그러한 통로가 파열됨으로써 벌어지는 일들에서 우리가 다시 자연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한 가지 단서조항을 동반한다. ‘종결’이라는 말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지층을 구분하는 시대적 개념으로 변형됨으로써 이는 어떠한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동반하지 않고서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인 흔적으로서 사유된다. 뉴노말이라는 말 그대로, 이것은 우리가 ‘시대’라는 말을 끊임없이 동시대로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재난을 늘 현재에서 사유하기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 재난은 과거와 미래 모두에서 빗겨나 신시대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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