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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경계 새로 그리기 작업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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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이 신카이 마코토 개인의 결과물만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직설적으로 말해보자면 이 영화는 스타 시스템 안에서 탄생한 “흥행을 노린 작품”이며, 그 무대의 주역인 신카이에게 이는 타협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타협이 과연 틀리기만 한 것일까? 대중성을 가미하면서 자신의 색채를 뺐다는 말은 어느 정도 자신이기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가능케한 ‘나’의 타자화는 일종의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포스트휴먼의 정의에서 몸은 연장될 수 있기에 타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즉 신체와 영역을 겹쳐 보지 않으며, 이 경우 신체는 꼭 영역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가령 우리는 걸음을 내 때마다 발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는 작업을 반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의 범위가 발바닥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오히려 몸은 발을 놓았다가 회수하는 과정에서 그 지도를 새로 그린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신경계의 네트워크 연결과 맹인의 지팡이는 본연적으로 같은 역할을 한다. 맹인의 지팡이는 신체의 일종은 아니지만 몸의 영역을 일시적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는 신체의 경계를 그리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신카이의 본연의 성향을 ‘신체’에 둔다면, <스즈메>의 경향은 신체의 경계 새로 그리기에 해당한다고 보여진다. 이 영화는 도호쿠 대지진의 기억을 직시하는 것 말고도, 신카이가 좋아하는 옛 과거 혹은 그러한 과거 작가에 오마주를 바치기 때문이다. 재난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를 말해보고 싶다. 첫 번째로는 다이진의 모습을 <마녀배달부 키키>의 고양이 지지를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언급이다. 지브리 영화에 영향을 받은 <별을 쫓는 아이> 같은 사례를 떠올리면 이는 그리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본작에 전작의 삽입요소를 이스터에그 삼곤 하는 걸 떠올리면, 다이진도 신카이의 사적인 묘사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타의 친구인 토모야가 즐겨듣는 음악으로, 토모야가 듣는 음악들 [발렌타인 키스 – 코쿠쇼 사유리](1986), [싸우지 말아요 – 카와이 나오코](1982)이다. 풍요로운 버블 경제의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중고 스포츠카 안에서, 버블 경제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특히나 <키키>와 같은 오프닝 테마 [립스틱으로 쓴 메시지 – 마츠토야 유미](1975)를 공유하는 이 영화에서 ‘오래전’에 폐허가 되어버린 유원지가 묘사되는 것은 그 선택에 명백한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브리의 계보 안에서 버블경제를 묘사했던 건, 그 시기적 특성을 제외했을 때 <센과 치히로> 정도가 있다. 이 영화의 시작이 폐허가 된 유원지를 둘러보는 것이었다는 점을 떠올리자. <스즈메>는 “혹시 근처에 폐허가 있나요?”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영화이며, 뼈대만 남은 돔 안에서 스즈메는 어떠한 문을 발견한다. 또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대관람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스즈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마음에 흘러들어오는 지맥의 이야기들은 가족이나 연인들의 행복한 한때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이 마주할 파멸적인 미래와 대비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의 버블이 현실에서 이미 벌어져 버린 사건을 마주하는 한편,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런 사건의 이전에 자리하며 그것이 벌어지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핵심 동력이 되는 도호쿠의 지맥과 공명하는 바, 작중 희생자이기도 한 주인공 ‘스즈메’의 과거와 연결되면서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타임패러독스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소타의 말처럼 지맥은 과거와 현재, 모두를 이어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경험’을 한 시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므로 지진이 일어나 부모를 잃기 전의 삶은 영영 마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이는 스즈메가 뼈대만 남은 돔 안에 세워진 문을 경험하는 장면과도 깊이 어울린다. 스즈메는 문 안에 무언가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걸 알지만 정작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문턱을 밟는 순간 의식은 현세로 돌아와 버리고, 훗날 소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그곳이 저승이어서다. 하지만 이런 비화가 밝혀지기 전까지 관객은 스즈메가 문에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동심 때문으로 착각하게 되는데, 어린 시절에는 분명 가보았던 장소를 이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점 탓이다. 즉, 이 영화의 문이란 것은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영화가 도호쿠 지진 말고도 버블경제의 맥락을 끌어온다는 점에 있다. 3.11이라는 숫자와 블랙아웃의 화면을 또렷이 보여주는 이 영화에 버블경제를 끌어오는 건 다소 무리일 수도 있으나, 스즈메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폐허가 뼈대만 남은 돔이라는 점은 이 추론에 근거를 더한다. 뼈대만 남은 돔과 그 안에 홀로 남은 문은 어쩌면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과 그 안의 계단을 은유하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1945년 이후의 전후체제와 1980년대의 버블 경제라는 두 개의 ‘돌아갈 수 없음’을 토대로 그 다음 세대가 포스트 3.11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확신은 서지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드라이브>는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줄곧 그 시절에 사로잡힌 사내를 다루며, 트라우마의 극복을 묘사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영화는 뜬금없이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으로 사내를 이끌며, 그곳에서 사내는 자신의 과거와 이별한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과 지나간 시대를 추모하는 일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영화는 그렇게 이어진다. 스즈메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이 영화는 <스즈메>의 직접화법보다 다소 돌려 말하는 편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두 영화는 현존의 감각을 공유한다. 아무리 달려도 결국 자동차라는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문을 열고 들어갔다면 다시 나오는 것도 같은 문이여야 한다는 것. <스즈메>는 그 이야기의 논리상 현재에서 과거로 간다거나 하는 식의 가능성을 긍정하지 않고, 단지 ‘과거의 그것’이 바로 현재의 자신이었다는 사실만을 알아차릴 뿐이다. 과거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고, <스즈메>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논리는 3.11이나 원폭 같은 사건을 추모하는 일만큼이나 버블경제라는 황금기를 성공적으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신체의 문제로 돌아와서 경계와 영역을 다뤄보자. 이전의 재난 영화들, <너의 이름>과 <날씨의 아이>에서 신체는 각각 교환되거나 하늘에 동화되는 방식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을 이루어냈다. <너의 이름>의 타키와 미츠하는 신체의 교환을 통해 두 세계로 자아를 확장하며, <날씨의 아이>의 히나는 하늘에 동화됨으로써 기성세대의 문제를 현세대의 자아에 끊임없이 이식하려 든다. 특히 후자의 경우 구름은 말 그대로의 클라우드처럼 보이기에 이런 해석은 어쩌면 자아의 단절 불가능성, 즉 전후체제의 연속성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말하자면 두 영화들에서 재난은 포스트휴머니즘의 방식으로, 우리가 구획하려는 어떤 문제는 그 자신의 기능을 통해 실질적인 영토를 넓혀나가는 것처럼 말해졌다. <너의 이름>의 재난이 미츠하와 타키 모두에게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혹은 <날씨의 아이>에서의 재난이 결국 ‘세계’의 것에 줄곧 이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날짜와 풍경을 가져온 <스즈메>에서 이런 식의 확장은 우리가 보았던 것들이 계속해서 확장되어가는 방식, 마치 백린탄처럼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의 확산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는 현실과 세계의 경계를 지우는 마술적인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저승은 현실의 지맥이고 모든 인간에겐 자기 자신의 문을 바라볼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히로시마의 계단이 남긴 그림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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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날씨의 아이>에서 신카이가 구름을 인터넷 시대의 은유처럼 사용했다고 느꼈던 건, 이들의 여정이 인터넷 세계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가령 두 사람이 일감을 구하는 곳은 트위터이고, 이야기가 진행되어 사업이 커지자 그들은 커뮤니티를 개설한다. 공교로운 것은 작품 내내 산발적인 소나기에 그쳤던 날씨가 어느 순간 거대한 폭우가 됨으로써 이들의 세계에 어떠한 재앙이 예고된다는 점이다. 작중 설명에 따르면 이는 운명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증폭’되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는 클라우드라는 거대한 인터넷 세계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이들이 인터넷 세계에 빠져들면서 현실 세계의 클라우드도 점점 커진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 영화는 재난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단 어떠한 세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장면은 마치 알고리즘의 범람처럼 느껴지며, 두 손을 맞잡아 대지에 자유낙하하는 두 남녀의 모습은 슈타이얼식의 수직 원근법을 자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헌데 그렇다면 <날씨>에서 닥쳐온 재난은 인터넷 시대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는 건 아닐까?


신카이의 재난 3부작이 포스트 3.11의 정동에 의존하는 만큼, <날씨>의 홍수는 범람하는 유체라는 점에서 대지진의 여파 중 쓰나미를 연상케 하며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쓰나미 실황의 생중계를 연상케 한다. 트위터를 통해 언론보다 빠르게 전파된 쓰나미의 광경은 인간의 대피속도보다 더 빠른 자연과 공영언론의 실황중계보다 더 빠른 현장중계라는 두 개의 맥락을 겹쳤다. 요컨대 이 영화의 ‘날씨’는 신카이의 말처럼 기후변화에서 미래 세대를 위해 현세대를 희생한다는 말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대립의 구도에서 미래와 현재의 연결고리는 ‘기후’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 세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잠시 논의를 멈춰 자연 대 인간 구도의 기원을 짚고 넘어가자. 이 구도는 신카이가 자기 세계의 기원으로 삼는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에서 흔히 발견된다. 대표적으로는 <원령공주>의 결말이 인간 문제의 해법을 자연에서 찾지 말라고 일갈하는 것으로 끝났던 일을 떠올려볼 수 있다. 혹은 <센과 치히로>에서 인간과 신의 세계가 뚜렷이 구분되던 일도 그런 범주에 포함된다. 이 모든 일에서 인간->자연/자연->인간의 구도는 성립하지 않으며 이들 모두는 “자연은 원죄의 대상도 속죄의 대상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기후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환경일 뿐이며 그것은 인간세계의 바깥이기에 후손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날씨>에서의 재난 또한 해결할 수 있는 부류의 문제는 아니다. 세카이 장르에서 [세계]가 주어진 삶이자 법칙이므로 인물이 바꿔나갈 수 없다는 걸 떠올리면, 이 문제를 이해하기란 쉽다. 포스트 3.11의 정동 안에서 재난은 흔히 현실 세계의 은유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나, 신카이는 <날씨>에서도 자신의 작품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에서 두 사람의 선택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신카이 영화에서 ‘재난’의 의미는 자연의 일일뿐 인간의 세계와는 뚜렷히 구분된다. 인간에게 자연은 그저 주어진 세계일 뿐이므로,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원리법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날씨>의 디지털 세계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환경 안에서 자라온 이들에게 네트는 탄생 이전의 세계이며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처럼 서로 간섭이 불가하다. 2000년대 초에서 2010년대 초까지 네트를 다루는 만화의 경향이 <썸머워즈>나 <디지몬>처럼 ‘세계를 구한다’의 관점이었다면, 신카이의 <날씨>는 세카이의 관점 안에서 디지털을 자연화한다.


그리고 디지털을 자연화한다는 말은 확실하게도 아즈마 히로키가 말했던 네트의 의미에 부합해보이는 게 사실이다. 히로키에 따르면 네트는 만인에 만인에 관한 투쟁 장소가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도로 인간은 계약을 맺어 사회에 자신의 권리를 일임한다. 여기서도 역시 자연은 정복과 지배의 의미에서의 극복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환경’의 용도로 서술되고 있으며, 이 맥락에서 ‘디지털’이란 것은 일종의 기후처럼 인간에게 시련을 마주하게끔 하는 변화무쌍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허나 신카이가 <날씨>에서 [세계]를 통해 말하려 했던 건 <원령공주> 이야기의 현대적인 재해석이 아니다. 신카이는 이 영화에서 총을 쏘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면서 무언가에 가로막힌 인상을 부여하고, 그러한 지상의 반대편에서 뻥뚫린 하늘과 폭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실에 항거할 수 없음을 묘사한다. 특히나 이는 총기의 발포가 쏜다(Shot)라는 찍는다(Shot)라는 말로도 대치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카이 개인으로서는 3.11의 정동 안에서 영화가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윤리적 실현을 포기하거나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만화(디지털)가 자연이라면 영화(필름)는 현실이기에, 두 세계는 상호간에 간섭되지 아니하며 또한 그렇기에 두 세계의 법칙은 하나로 합치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만큼은 <스즈메>를 두고서 신카이가 작가의 성질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일을 적절하게 반박할 수 있어 보인다. 보컬이 들어간 노래로 사람들 감동시키기, 사춘기 남녀의 러브라인을 어른들의 세계에 적용하기. 이런 연출은 모두 ‘애니메’의 법칙에 해당하는데 어쩌면 신카이는 3.11을 말하기 위한 포석으로 만화 성질의 약화를 택했을 수도 있다. 두 성질이 한 곳에 공존한다면 서로 충돌하리라는 건 쉬이 예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3.11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려면 그 과정에서 현실의 논리를 끌고 와야 하며, <날씨>가 하지 못했던 총기의 발포와 같은 충격 이미지를 가져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의 유동성이 비의 액체성으로 분화되어 대지에 강림하는 순간, 충격경험은 개인의 차원으로 분산되고 이는 현실의 측면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스즈메>는 <날씨>가 보여준 디지털 세계의 재귀성을 일본 사회 전체의 재귀성으로 바꿔나가면서 그러한 돔 형태 바깥에 무엇이 있을지를 같이 고민해보자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포스트 3.11로 칭해지는 3.11 이후의 사회라는 프레임에서 ‘이후’라는 표현은 현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현실의 인상만을 가리킬 뿐이라고. 따라서 두 세계를 마주하게 하려면 [세계]라는 말은 현실 세계라는 단어 위에 강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영화는 줄곧 일본 열도에 하나의 지맥이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3.11이 모두의 재난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두 세계의 합의점을 모색한 결과인 듯 보인다. 영화는 스즈메의 문단속 과정을 따라가며 재앙의 크기를 점점 키워나가다가 종국에는 그런 재앙의 수 배에 해당하는 초거대 재앙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그것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마을 단위의 재앙이 도와 현 단위의 재앙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영화는 이런 재앙이 열도라면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음을 전달하는데, 반대로 보면 이는 영화의 이야기가 줄곧 열도라는 세계 안에서 진행됨을 뜻하기도 한다. 이른바, 열도 전체에 하나의 지맥이 있다는 말은 이 사람들 모두가 같은 저승에 간다는 점에서 그들의 세계를 하나로 엮는다는 점을 떠올리자. 그렇다면 이 저승엔 열도 사람만 있을 것이며 이것은 외부를 배척한다기보다는 ‘이후’를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 관한 한 가지 설정에 가깝다. 영화는 열도라는 현실의 공간에 저승이라는 만화의 공간(=디지털)을 부여함으로써 현실 후퇴의 지점으로 디지털을 설계하고, 그러나 두 세계는 불가침조약을 이행할 뿐이기에 ‘그’ 문제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안에서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포스트라는 ‘바깥’에서 안쪽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포스트를 현재화하면서 영화 밖의 현실을 ‘바깥’으로 제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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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3.11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집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이 부재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너의 이름>에서 두 남녀가 더는 몸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날씨>에서 히나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자리를 박차는 모습 등이 그렇다. 허나 이는 특정 대상에만 머무르는 건 아닌 듯 보인다. 왜나하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은 3.11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점으로도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영화에서 부재를 발견하는 대목은 사건이 ‘포스트’로 넘어감을 보여주는 게 된다. 예를 들어 <너의 이름>의 포스트는 더는 몸이 바뀌지 않게 됨으로써 운석이 떨어진 이후의 이야기 전개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타키의 현실에서 과거인 것과 미츠하의 현실에서 미래인 이 사건이 ‘포스트’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그것은 ‘바깥’이 되어버리고야 만다. 이른바 이 바깥은 갈 수 없고, 올 수도 없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세계를 내부로 포지셔닝하며 이때 기다림은 항상 유예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따라잡을 수 없는 미래에 좌절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밀쳐내면서 현재를 현존과 등치시킨다.


요컨대 포스트에서 ‘바깥’의 문제란 인식의 범주이자 엔트로피의 한계에 귀인한다. 단지 미래나 과거와 같은 시간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점점 꺼져가는 인식의 범주 안에서 이 사고는 논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타키와 미츠하의 문제가 포스트를 극복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미래를 꺼져가는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몸이 바뀌는 일이 언젠가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포스트는 그 끝의 이후를 말하는 게 된다. 즉, 포스트란 그 ‘끝’이 부재한다는 것에 관한 문제다. 재난의 기억이 언제 사라질지에 관해서부터, 언제 사라졌는지에 관한 문제가 바로 이런 유예의 감각이다. 헌데 이런 ‘끝’의 이후를 바라본다는 것에 관해 생존의 문제를 논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까? 엔트로피의 한계를 두고서 기억은 점점 흐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그 재난의 기억이 소실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잊는 것으로 미래에 도착하는 일은 <너의 이름>의 말마따나 “네가 없는 미래 따윈 상상할 수 없어.”라는 애절함만을 자아낼 뿐이다.


이는 포스트 3.11의 문제가 결국 3.11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아니라, 그러한 기억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논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기억의 안과 밖이라는 물리적 구분점을 두지 않음으로써 기억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말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의 몸을 공유하면서, 그러니까 그런 육화된 몸을 통해 경계를 넘나들며 깨달은 사실은 기억/운명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것들은 세계의 구성원리이며 이미 변화된 사실관계를 배경 삼아 등장해왔다. 즉, 포스트 3.11의 세계는 이미 그 이전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삶의 터전이므로 어떠한 ‘바깥’의 위치에서 사유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까지가 신카이가 <너의 이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였다. 세계에는 어떤 원점이 있으며, 그 원점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원점 이전에 관계가 있는 것들끼리는 그 연결을 회복함으로써 다시금 회복을 꾀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붉은 실의 인연으로 엮인 타키와 미츠하에게 재앙은 오히려 자신이 존립하는 세계선의 기준이 됨으로써 회복의 절차를 밟게 해주었다.


그리고 <날씨>에서 이것은 특정 인물 간의 연결이 아니라 개인과 세계 사이의 연결로 확장되면서 3.11의 기억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날씨>는 재난의 기억이 선대로부터 내려왔고 그렇기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이 재난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세계 사이의 계약이며 그 3.11은 하나의 기억으로써,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이제 이 ‘곧바로’ 제시될 수 없는 현실은 우리가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의 깨달음과 연계된다. 이것이 포스트라는 바깥이기에 곧바로 제시될 수 없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으니 말을 대강 얼버무리게 된다. 가령 <날씨>에서 전승의 주인은 그러한 설화는 원래 그런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세계의 배경 삼으며 ‘우리가 살아온 것보다 더 이전’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를 따르자면 세계는 적어도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는 더 이전부터 존속했으므로 ‘바깥’이란 우리가 보는 바로 그 표면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영화는 시작되기 이전을 보여줄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그 기억은 어떠한 세계의 출발점처럼 여겨진다.


만약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는 게 가능하다면, 바꾸어 말해 이는 영화는 그 드러냄의 유일한 표면이기도 하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바깥은 그것을 토대로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달리 표현하면 특정 구역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사람들을 한 자리에 위치 짓는 효과가 있다. 이른바 3.11을 기억으로 사유하는 일은 우리를 이야기의 관객으로 만든다. 영화가 기억을 스펙터클의 형태로 보여주려 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은 그러한 관객되기를 통해 스펙터클이 되기를 요구한다. 문제는 통합이 아닌 재난의 장소가 된 이 모임에서 우리는 어떠한 몰살의 신호를 본다는 점이다. 호다카는 히나가 하늘 신의 부름을 받는 과정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으며 마찬가지로 재난에서 사람들의 입장은 그저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렇기에 3.11은 생존자를 관객의 위치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어떠한 사건과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포스트란 지금 당장에 있는 이곳이 자신이 정말 있어야 하는 곳은 아니라고 말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비현실성은 무언가를 바라만 보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엔트로피를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 자신의 몸은 제쳐두더라도 이야기만큼은 여전히 그 시절 그 자리에 둠으로써 기억과의 의도적인 접촉을 피하고자 한다. 즉 포스트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이세계화하면서 정말로 있는 장소인 현실은 마음속 한구석에 내버려두면서 늘 함께한다고 말하는 공존의 논리에 의존한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바깥’이라는 말은 세계 내에서 관찰자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지 여기 아닌 다른 이곳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스즈메>의 경계 그리기 작업은 아마도 그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듯 보인다. 어떤 기억을 논하는 일에서 공존을 택하는 일은 한편으로 지팡이와 같은 부수적인 매체를 자기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과도 같다. 지팡이를 신체의 ‘바깥’으로 말하는 건 이치에 합당하지만 한편으로 지팡이를 통해 바깥과 접촉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신체의 연장으로 말해야함이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3.11의 기억을 말하는 일에서 사건은 특정한 순간이나 장소로 기억되기보단 어떠한 감각들의 연장선에서 논해져야 한다. 엔트로피에 따라 모든 과거와 미래에서 있을 수 있는 건 분명 물질계에서 한계를 갖지만, 인간의 의식은 경험하는 신체를 중심으로 일생 전체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가 하나의 의식이자 기억이라면, 3.11이라는 사건은 사회 전체에 ‘포스트’라는 이후로 연장된 삶을 펼쳐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러한 바깥과 소통하는 다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세계는 사건 이후 변해버린 공기, ‘돌아갈 수 없는’ 향수를 자아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를 계기로 주어진 세계를 어떻게 달리 감각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장소가 된다. 이 점에서 <스즈메>는 작가이기를 포기한 결과라기보다 발단, 전개, 결론의 과정을 보여주는 3부작의 마지막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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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문제를 말하기 위해 신카이의 재난 3부작을 돌아보고 싶다. 첫 번째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너의 이름>의 세계가 처음으로 ‘다른 곳’으로 인식되는 순간은 이들이 신체의 바뀜을 인지하고 난 후였다. 즉 신체의 뒤바뀜을 먼저 알아차린 후에, 인물의 주변을 탐색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다. 이는 소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말하는 세카이계의 규율에 따라 세계의 배경이 왜곡되면서 현실에 자연스레 침투하는 일을 가리킨다. [손을 그리는 손을 그리는 그림]처럼 내부와 외부는 마땅히 구분되지 않는 셈이다. 반면 <날씨>에서의 세계 인식은 호다카가 히나를 만나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변화한다. 자연의 일부였던 날씨가 조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날씨는 그 배경에서 전면으로 등장해온다. 즉, 날씨는 인간의 역사 안에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호다카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배경조차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끔 한다. 말하자면 <날씨>에서 등장해오는 건 외부이며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의미한다. 호다카는 이 예언에서 자신의 지난 삶, 영화 초반에 배를 타고 상경해올 때 뒤로 보이는 배경이 현재와 ‘단절’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부모의 폭력에서 도피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배경과 이별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


쉽게 말해 호다카는 자신의 진짜 가족을 찾으러 왔지만, 사실 이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문제가 아니었다. 호다카가 여행에서 깨우친 건 가족이 단지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 가족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배경에 잠재되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가족이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인 세계의 확장이기도 하며 또한 가족을 ‘착하게’ 바라보지 않으면서 그 외견을 달리 묘사하는 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날씨>는 포스트 3.11의 정동이 “무언가를 되찾으려 한다”라는 상실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문제는 그 대상을 착하게 묘사하지 않고서도 논해질 수 있다는 점, 포스트 3.11에서 ‘사건’은 미화될 이유가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3.11을 세계의 배경으로 이해함으로써 이를 현 세계의 전면에 드러낼 수 있다. 배경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며 바로 이것이 있어야 무대 위에 인물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논리는 호다카가 히나를 구하는 것에 사용되었으며 호다카의 선택이 세계를 저버리는 게 아닌 이유는 그러한 선택은 ‘무대’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 ‘인물’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히나와 세계를 바꾸는 행위는 전혀 이기적인 게 아니었다. 자연은 원래 그런 것일 뿐 호다카가 특정 선택을 한다고 해서 기후의 흐름을 바꿀 수 있지는 않았다. 이는 <너의 이름>에서도 밝혀졌듯 자연은 어떠한 운명 안에 있으며 이에 따라 간척되거나 개간될 수 없는 부류라는 것이다. 배경과 이별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연과의 공존을 뜻하며 절대로 세계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포스트 3.11의 문제는 ‘포스트’라는 말을 통해 ‘이전’의 세계와 이별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를 배경 삼으면서 3.11을 전면에 드러낸다. 요컨대 3.11은 극복되는 게 아니라 활인화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경계 다시 세우기를 요구한다. 분명 포스트 3.11을 논하면서 포스트 휴머니즘을 말하는 건 이상한 조합일지 모르지만, 우리를 여전히 세계에 남게 하는 게 바로 몸이라는 점에서 이 의견은 수용되어야 한다. 몸의 경계를 바로잡는다는 건 3.11의 정동 안에 있는 인물이 그러한 3.11이 배경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인지하면서, 그와 동시에 3.11을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단지 우리를 현존하게 할 뿐임을 주의하는 일이다.


<스즈메>를 재난 3부작의 완결로 보는 것은 그러한 흐름에서 몸의 경계를 점점 전면에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서다. 분명 <스즈메>에서 약해진 세계는 작가 본인의 타협 결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는 점진적으로 포스트 3.11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문제에서 스즈메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너의 이름>과 <날씨>가 기본적으로 집을 떠나온 상태에서 이야기한다면 <스즈메>는 그렇지 않다. 스즈메에겐 돌아갈 가족과 장소가 명확하며 이는 낯선 장소로 몸이 바뀌거나 가족과 의절한 요령으로 상경한 <날씨>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토모리를 구하거나 도쿄를 구하거나 하는 추상적인 목표는 <스즈메>에서 어느 장소, 어느 도시를 구한다는 일로 명확히 제시된다. 전작들에서 보였던 [세계]는 이제 자신이 소속된 어느 장소라기보다 자신이 구해야 할 대상에 가깝게 묘사된다. 이전까지 세계는 그 감각적 측면에서 신체의 일부였지만, 이제 세계는 ‘개인’이라는 보편자가 올라서는 무대가 된다. 이른바, 이 세계가 보편적인 게 아니라 그런 세계 안에서 보편적인 무언가가 등장해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유년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서로 다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사이에 많은 성장을 이뤄냈고 또 완벽히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개인의 과거는 살아가는 [세계]가 되어 자신이 소속된 배경으로 밀려난다. 허나 그런 과거와 현재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건 바로 우리의 현존하는 몸이며 경험하는 신체이다. 바로 이 보편자를 무대에 올리는 게 우리의 역할이며 경험하는 신체를 배경에서 분리해내는 것이 바로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이 맥락에서 등장해오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문제는 감각의 구성에서 주체가 되는 건 신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체는 선험적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신체는 유기체를 통해 유물론적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인식할 수 있는 만큼의 범주가 자아라 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서로 단절하면서 이를 근거로 ‘나’에게서 타인을 분리해낸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나에게서 타인을 분리해내는 과정이 일종의 추진처럼 여겨질 때다. 앞으로 나아갈 요령으로 과거를 저버리는 일은 과거를 마치 짐 덩어리처럼 여기는 것 같다. 바꾸어 말해 과거를 짐 덩어리로 여기는 일은 “미래로 나아가려면 희생은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때 희생은 자신에 관한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타인에 관한 희생으로 변모하고야 만다.


확실히, 이 영화에서 스즈메가 이제 막 재앙이 시작되려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재앙에 대응한다기보다 이 세계가 하나의 보편으로 이루어진 것을 해치는 개념들을 찾아 틀어막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지맥의 연결을 현세와 저승 간의 것에 대입하면서 포스트와 3.11 사이의 간극을 봉합한다. 즉, 타인=세계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경험하는 신체인 ‘나’를 무대에 올리는 일은 정당한가? 신카이가 재난 3부작에서 묻는 것은 포스트 3.11의 세계에서 배경과 신체의 분리가 가능한지, 혹은 그것이 윤리적인지와 같은 사고이다. 예를 들어 포스트 3.11에서 포스트라는 말이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을 뜻한다면, 3.11이라는 말은 그러한 사건을 통해 재구성된 개인을 뜻한다. 이 포스트라는 배경, 하지만 ‘포스트’라는 말은 그러한 사건을 알고 있지 않다면 사용할 수 없는 말이므로 포스트 3.11은 3.11이라는 보편자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보편자를 무대에 올리는 일은 3.11의 정동 안에서 촉발되는 사건이며 이는 곧 3.11이라는 말이 포스트에서 개인의 구심점, 혹은 호명이 된다는 점을 뜻한다. 그러한 점에서 자신의 신체를 확립하는 <너의 이름>, 자기 장소를 확립하는 <날씨>에 이어 <스즈메>가 완성된 신체에서 뚜렷한 장소를 찾아가는 여정을 선보이는 것은 확고한 성장의 증표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서 공포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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