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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이라는 속성의 발현에 관한 평행우주적 설정

<프로메어>(2019)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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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어>를 구성하는 것은 [트리거]의 전부이자 일부이다.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트리거를 아는 이들에겐 의미하는 바는 크다. 영화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러 전신으로 구성되었으며, 개중에는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캐릭터적 일치가 자리하기도 한다. 가령 주인공 갈로 티모스의 외모와 성격은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카미나를 많이 닮았고, 세세한 면에서 다르다 한들 영화는 전작의 캐릭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서로 다른 우주에서 태어났다 한들 같은 포즈와 태도로 열혈!을 외친다면 자연스레 이들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영화는 난잡해진다. 작품 하나를 다른 작품의 인상에 크게 의존한다면 이런 구성은 정작 작품 하나의 본질을 무용하게 해버린다. 혹자는 이러한 인상이 제작사 고유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일련의 의지로 보아야 한다고도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점이 어떠한 경향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무엇을 잘 만드는 제작사의 어떤 경향을 서술하는 일은 일찍이 트뢰포가 말하듯 “작품에 대한 강한 고정관념”인 상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리거의 작품을 두고서 열혈이라는 경향을 나열하면서, <프로메어> 또한 그러한 경향 안에 있으며 이는 <프로메어>의 여러 장면을 구성하는 ‘인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열혈’이라는 주제로 제작사의 내적 경향이 설명되는 순간 <프로메어>는 제작사가 지향하는 우주로 향해가는 와중의 하나로 이해된다. 그와 동시에 <프로메어>는 트리거라는 세계 안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경우가 된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프로메어>는 하나의 경우의 수가 나뉘는 여러 갈림길에 놓여있다. 헌데 문제는 이러한 이해에서 <프로메어>는 별개의 작품으로만 이해된다는 점에 있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찾는 과정에서 별개로 이해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분명 자기만의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일 테다. 그리고 이 선택은 세계에 떨어져나와 별도의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오히려 자신이 세계에 의존해야만 하는 경우라면 역설적인 효과를 낸다. 평행우주란 것은 자신의 모체가 되는 세계와의 연결이 끊겨있어야만 비로소 평행선을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다면, 평행선은 마름모꼴로 좁혀지고야 말 테다. 그리고 좁혀진 세계는 종국에 서로 충돌하면서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합쳐지고야 말 테다. 요컨대 이 문제는 <프로메어>가 트리거의 자장 밖에서 사유될 수 있는지에 관한 사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프로메어>가 트리거를 의식하는 이상 이 세계의 멸망은 필연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세계관에 관한 설명을 시작점의 1분으로 끝내면서 인물의 개인사를 구축해가는 이 영화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이용하기만 할 뿐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이때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제작사가 잘하는 것, 열혈이라는 주제로 꺼낼 수 있는 화려한 액션이다. 트리거는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불을 사용하는 인물과 그런 불을 끄는 소방대라는 투 탑 주인공을 내세웠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음에 불을 지르는 소방관과 세계에 불을 지르는 테러범이라는 두 가지 조합이 겉과 속을 상충시킴으로써 열혈이라는 주제를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을 실현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평행이 마름모가 되지 않으려면 둘 사이는 계속 서로를 외면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입장에 놓였으면서도 종국에는 서로와 함께 하며 사이를 좁혀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른바 훌륭한 버디물의 탄생, 다만 이것이 ‘열혈’이라는 속성의 발현에 관한 평행우주적 설정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에서 공통점을 찾을 요령으로 선택되는 평행우주적 세계관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오히려 서로를 결속시킨다는 점에서 ‘자기복제의 모순’을 좋은 방향으로 응용하곤 한다. 그리고 이때 ‘자기복제’라는 표현에서 ‘자기’로 구성될만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인상들로 구성된다고 말했던 제작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프로메어>는 제작사의 전작을 어설프게 되풀이 한 방직사라기보다 어떠한 인상들의 결속을 꾀하는 극장판의 성격이 될 공산이 크다. 프렌차이즈에 소속된 여러 작품의 주인공을 한 자리에 소환하는 올스타전처럼, 트리거 세계에 소속된 여러 인상들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우주는 성립할 수 있다.


이들은 (이번에도) 우주에 간다. 우주에 가기 위해 도시 전체를 우주선으로 만들며 그 우주선을 부상하게 하는 서사로 지구멸망이라는 키워드를 꺼내 든다. 한결같은 모습에서 정감마저 느껴지지만 우주에 가는 행위가 어쩌면 지구에 종속된 이야기를 ‘우주’로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의 우주는 자기 복제를 위해 마련된 트리거의 무대가 아니라 그런 인상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서도 줄곧 사다리꼴로 좁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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