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미 시게히코는 「숏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에이드리언 마틴의 책 하나를 인용한다. <미장센과 필름 스타일>이라는 이름의 이 책에서 하스미는 1장의 제목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하면서, 가져야 할 특정한 의미가 없는 어휘에 대해서> 라는 지극히 도발적인 제목이다. 이른바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라는 뉘앙스의 이 제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규칙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하스미가 지적하듯 우리가 ‘규칙’과 ‘시스템’이라는 말을 어느 정도 혼용하여 사용 중이라면, 이는 우리가 그동안 금기시해왔던 게 사실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무언가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규칙과 시스템이라는 말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다. 전자가 우리가 지켜야 할 마땅한 선을 뜻한다면 후자는 시스템에 따라 되지 않을 뿐이라는 점, 즉 ‘가능성’의 여지를 둔다.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해볼 만한 것은 우리에게 ‘영화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다. 큰 화면에서 오랜 시간을 집중하여 보던 ‘특별한 시간’으로서의 매체인 이 영화가 오늘날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위의 지적을 빌려 생각하면 영화란 규칙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른바, 영화란 어떻게 촬영해야 하며 어느 절차와 처리를 거쳐야만 비로소 영화라 할 수 있다는 규칙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영화의 디지털 전환에 있었다. 영화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은 필름과는 다른 질료적 특성을 보였지만, 그 비용과 효율 측면에서 선호되었고 초창기의 보급을 막는 것도 ‘카메라’쪽이 아니라 그것을 편집하고 상영하는 쪽이었다. 요컨대 생산하는 쪽은 주로 영화를 그저 ‘찍으면 그만’일 뿐이라고 말했으며, 이는 곧 영화가 규칙이었음을 보여줬다.
영화란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전적으로 감독의 입김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영화가 감독의 규칙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상영하는 쪽의 문제란 전적으로 시스템을 따르는 것으로, 배급사나 극장주는 장비 교체의 가격이나 효율 등에 있어서 여러 ‘시스템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에게 디지털이 하나의 규칙이어서 얼마든지 선을 넘을 수 있었던 반면, 극장주에게 디지털은 전적으로 시스템을 따랐기에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금기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화’란 어느 측면에서의 가능성을 갖는 중이었다고 보아야 할까? 규칙(금기)는 위반이라는 말을 동반한다는 전자의 측면, 단지 시스템에 불과하므로 얼마든지 교체 가능하다고 말하는 후자의 측면. 하스미의 지적을 응용한다면 우리는 영화가 규칙이면서 시스템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뻔한 결론일 수도 있는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대입을 통해 갱신된다. “영화는 모든 규칙이지만 아무런 시스템이 아니기도 하다.” 영화란 일종의 기능과도 같아서 어떤 기능을 하는 동작들의 연쇄 혹은 연속과도 같다. 우리가 소위 ‘숏’이라 부르는 것에 몽타주와 시퀀스라는 체계를 이어나가듯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에 ‘숏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은 결국 그런 전체들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그리고 이는 규칙이라는 말이 사실 엄밀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무언가를 딱 잘라 규정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규칙은 어겨지기 위해 설정되었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시스템이 아니라는 말은 시스템이 결국 어떠한 위반을 가정하고서 설계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령 극장주의 입장에서 디지털은 영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의 문제이지 영화가 디지털에 기초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단지 영화를 어디서 어떻게 보는지의 문제가 분화될 뿐, 그 본질에 있어서 영화를 본다는 감각 자체가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니 [숏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어쩌면 숏의 기능적인 정의나 방법론에 관한 물음보다는 숏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이는 숏이 무언가를 찍거나 발포하는 Shot과 같은 발음이라는 점에서도 합당해보인다. 이 경우 숏이란 특정한 장면이 아니라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진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숏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은 “이 영화에서 어떤 것이 변화의 동인이 되었는가”를 묻는 것과도 같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영화를 규칙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으로 바라볼 것인가.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는 기능적인가 기계적인가. 우리는 오늘날 ‘영화적’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관한 질문을 재고해보아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영화적’이라는 말을 급격한 변화의 순간을 묘사하는 것에 사용한다면, 그 안에서 변하는 게 개인인지 아니면 세계인지에 따라서도 이론을 나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영화라는 말이 어떠한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체인소맨>이라는 만화를 두고서 ‘영화적’이라는 표현에 관한 논쟁이 성립한 건 무슨 이유일까.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체인소맨>은 영화들에 관한 오마주가 넘쳐나는 만화였고 자신의 영화 같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던 만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논란은 만화가 영상 매체로 번안될 때 시작되었다. 만화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선정된 MAPPA는 원작자의 의지에 따라 ‘영화적’에 관한 의지를 내보였으며, 이에 따라 작품도 최대한 ‘애니메이션 같지 않게’ 만드는 방향을 택했다. 하지만 감독이 그러한 영화 같음을 표방하면서, 연기자들과 제작팀에 최대한 단조로운 연출을 요청하고 원작에 있던 몇몇 연출을 수정하면서 논란은 시작되었다. 감독의 의견은 ‘영화적’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최대한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라 볼 수 있는 대목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에서 어떠한 ‘영화적’인 것을 내보이는 방법이 더하기가 아닌 빼기로 이루어짐에 따라 작품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게 돼버렸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묘사한다고 한다면 그 안에서 현실성을 가져오는 것을 흔히 ‘영화적’이라고 착각하곤 하지만, 오히려 이는 ‘영화적’이란 말을 기능적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영화를 마이너스의 기능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감정을 자제하고 엄숙하게 가져가는 것이 현실의 일면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른바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바로 영화의 역할이라고 말하면서, 포착의 기능을 정지된 순간으로 이해하는 일이 바로 이러한 착각을 낳았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영화적이라는 말이 ‘순간’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그리 틀린 것만 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러한 ‘정지’에서 개인이든 세계든 둘 중 하나는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으로, 단순히 무언가를 덜어내는 것만이 영화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감독의 생각은 아마도 애니메이션이 갖는 과잉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을 테다. 만화는 그 원리에서 현실에 벗어나 있기에 되려 자신을 표현하려는 방법론으로 과잉을 택했다는 것이 만화에서는 하나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바로 이 정설이 그동안의 만화 제작 시스템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하나의 규칙으로 여겨지기를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규칙이 될 때는 무언가를 ‘어긴다’는 감각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지 시스템상의 문제일 뿐이라면 ‘만화’의 자리를 ‘영화’로 대체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 시스템 안에서 만화의 과잉은 일종의 잉여분에 불과하므로 시스템상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고, 이에 따라 시스템을 벗어나거나 파괴하지 않는 한 이러한 과잉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규칙의 문제라면 그러한 과잉은 선을 넘는 행위로서 가능성에 관한 한 가지 도전이 된다. 그리고 과잉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될 때 만화는 영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즉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는 한 가지 결론을 얻는다.
요컨대 우리는 “만화가 하나의 과정에 있다”는 일련의 결론을 얻어냄으로써 감독의 판단이 왜 팬들의 비판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 팬들은 만화를 만화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않고서 다른 매체와의 비교우위를 탐색하는 감독의 태도에 실망했던 것이다. 설사 이것이 영화에 관한 오마주를 가져오는 원작자의 태도에 관한 존중이라 하더라도 만화를 이해하는 것에 ‘영화적’이라는 표현을 가져와서는 안 됐다. 일단 영화적이라는 말 자체가 어떠한 과정으로 이해되므로 본질적으로 ‘영화다움’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만화에 정해놓은 규칙을 깨는 것에 영화를 가져오는 일은 작품을 사적인 이유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물론 감독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권한이 있다. 하지만 어느 작품이 그러하듯 작품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원작자와 팬 그리고 투자자와 같은 여러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이해관계가 마땅히 하나의 순간으로 풀이될 수 없음에도 영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많은 비난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영화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작품에는 곳곳에 영화 장면에 바치는 헌사가 있지만 오마주의 행위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순간’으로 남아야 할 뿐, 그게 개인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된다면 작품은 자신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기능적으로만 이해했다면 오히려 이 ‘영화적’이라는 말은 성립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기능적으로 바라볼 때 그 안의 세계는 언제든지 급격한 변화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영화에 바치는 몇몇 오마주된 장면들이 만화 안에서 하나의 개성으로 작용함을 주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화가 영화를 기계적으로 이해하면서 이들 시스템을 자신에게 온전히 적용하려 들 때 만화는 자신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에 그친다. 그리고 이때 만화는 “모든 것이 되길 꾀하지만 정작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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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맨>을 보며 당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의미와 재미가 서로 양립하는 경우야말로 특수한 것이므로 이런 인상이 특별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영화처럼 만들고 싶었다는 제작의도를 본 이상, 우리는 이를 영화에 견주어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두고서 ‘반드시’ 의미 하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편이므로, <체인소맨>의 의미없음은 그런 면에서 아리송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내용이 이해되지 않을 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그래서 말하려는 게 뭐야?”,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이는 기본적으로 영화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점에 연유하는 듯 보이는데, 시간을 그렇게 들였는데 아무런 내용도 없다면 이는 막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즉, 영화에서 의미없음의 문제는 의미를 ‘전한다’라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의 쇼케이스와 연결된다. 영화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걸 보는 내 시간이 아깝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다.
적어도 그 점에서 영화는 드라마나 만화와는 다른 특성을 보이는데, 드라마나 만화가 장편으로 진행되는 일이 잦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나 만화는 이야기를 독자가 따라가야 하므로 적어도 여기서 시간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만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를 통해 증명해내야만 한다. 반면 영화는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선보여야 하므로 단편에 가깝다. 여기서는 시간이 이야기를 견인하며, 따라서 복잡한 담론 따위 없이도 영화는 잘만 굴러간다. 요컨대 그냥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마술쇼의 특성과도 닮았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보는 게 진짠지 가짠지는 별 상관없이 그럴듯하게 보여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쾌감을 제공한다. 영화는 자신이 선보이는 세계가 3D라는 사실을 그럴듯한 2D로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환영을 제공한다. 이른바 영화의 매력은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과정에 있으며, 이는 드라마나 만화가 주는 서사적 쾌감과는 다르다.
즉, <체인소맨>이 자기 목표로 영화를 지정할 때 이 애니메는 되려 의미 따윈 상관없어진다. <체인소맨>은 뭔가를 말한다기보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논하는 일에 열중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는 <트랜스포머>처럼 이야기 위에 존립하는 시간을 충동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현실을 초과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체인소맨>에서 영화란 어떠한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체인소맨>의 액션은 그 자신을 보여주는 형식이 아니라 시간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이야기된다. 이 액션은 보여지는 것만으로 제 역할을 다 하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그럴듯하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체인소맨>은 온갖 수사를 가져다 쓰며 자신을 영화로 표방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것은 영화처럼 보였을 거라는 뜻이다. <체인소맨>은 의미없이 시간을 전시하는 작품이고, 그렇기에 이야기는 오히려 환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체인소맨>이 만화와는 달리 애니메로 판본을 달리했을 때 가장 와닿는 지점은 덴지가 체인소맨이 되는 순간이다. 체인소의 악마와 합일한 덴지에게 찾아온 변화는 포치타의 꼬리가 몸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덴지는 체인소의 시동줄처럼 생긴 이 꼬리를 잡아당기면서 체인소맨이 된다. 그리고 체인소맨이 되면 덴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신체를 복구하며, 그렇기에 이는 애니메가 서사를 끌어가는 일에서 이야기의 책임을 경감하는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덴지는 무슨 일을 해도 뻔하게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지막 순간에야 기적처럼 도착하는 영웅의 면모도 아니고, 혹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다 끝난다는 만능도구도 아니다. 덴지가 꼬리를 잡아당겨 체인소를 꺼낼 때 시간은 ‘당연하게’ 흘러간다는 법칙을 이야기 안에 내재시킨다. 이렇게 시간은 이야기를 견인하며, <체인소맨>의 이야기는 그럴듯함의 면모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환상이 된다. 이른바 <체인소맨>은 교훈이든 뭐든 전하려는 게 아니라 이것이 무엇보다 창작물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답다.
다른 한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쿵’ 소리에 반응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그동안 시각적인 것으로 제시되던 슬로우 시네마의 반응이 청각의 형태로 전이되었다는 점이다.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 위라세타쿤의 <징후와 세기> 등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물체, 혹은 영화를 이탈하는 현장을 떠올려본다면 이를 이해하기란 쉽다. 이들 세 영화는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확실한 건 영화와 현실 사이의 속도 차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뒤로하며 현실을 올려보낸다는 점에서 슬로우 시네마의 분과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영화는 현실적인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보이면서도 그 자신이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특수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왜 이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게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장치를 삽입해두었을까? 진정한 현실은 바깥에 있다고 말하면서 현실과 영화의 지연만큼 관객이 파급적으로 전진하길 바랬을까?
어쩌면 이들 영화는 처음부터 자신이 영화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영화라는 게 매체라기보다 하나의 스타일에 가깝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카툰렌더링과 같은 기법과 마찬가지로 영화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스타일이며, 그렇다면 <메모리아>는 그런 스타일의 침투를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영화사의 중대한 소리를 믹싱해 만들었다는 이 충격음은 그 자체로 영화사를 요약하는 것이면서도 그런 영화사의 침입, 혹은 무언가 시작된다는 의미에서의 시동음처럼 보인다. 마치 <체인소맨>의 덴지가 꼬리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액션의 서두를 열듯이, <메모리아>의 충격음은 영화 안에 어떠한 환상이 침입해오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이들 영화에서 스타일의 침투가 모종의 영화 드러내기 효과로 이해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인소맨>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체인소맨>은 체인소가 되는 순간을 통해 자신이 영화임을 드러내며, 이 점에서 체인소는 그 의미없음의 대목을 의미를 죽이는 일을 통해 묘사하는 것은 아닐까?
체인소의 악마가 다른 악마를 죽이면 그가 더는 환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의미의 살해자로 볼 수 있다. 악마를 두고서 어떠한 개념에 관한 반작용으로 설정한 이 만화에서는 악마의 존재가 곧 의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미를 죽이는 세계가 딱히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마치 영화 자체가 어떠한 현실의 반작용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라는 건 우리가 현실을 두려워해서 만들어낸 공포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보면 <메모리아> 같은 부류의 영화에서 실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현실의 침투라기보단 자신을 현실의 그림자로 만드는 부류에 속한다. 이들 침투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이 불순물 자체가 이들 세계의 그럴듯함을 깨트린다는 점에서 마술쇼를 끝낸다고 말이다. 결국 아피찻퐁이 <메모리아>의 핵심 병증으로 설정한 ‘폭발성 머리 증후군’은 이곳이 바로 영화임을-세계의 의미없음을 묘사한다 볼 수 있다. 영화의 세계라는 건 애초에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바깥을 끌어들인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체인소맨>의 의미없음으로 돌아가보자. 분명 <체인소맨>의 의미없음은 세계의 특정성을 지우면서 이곳을 현실과의 고리를 끊는 것에 사용된 건 아니다. 만화가 대체역사를 그리긴 하지만, 이건 그저 만화 세계로의 진입장벽을 허문 것일 뿐, 만화에서 현실의 어떤 면을 그리는 게 아니다. <체인소맨>의 개연성은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을 통해 작동하며, 이는 이들 세계가 줄곧 무의미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애니메의 관점에서 <체인소맨>은 현실의 서사를 끌어옴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끌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이야기를 견인한다면 TV애니메이션은 하나로 돌아가려는 성질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체인소맨>이 자신을 영화로 소개할 때, 이곳에 현실과의 지연이 존재할 특정 가능성을 제기한다. 작품을 위해 현실을 끌어오는 일이 완전한 환상 속에 자신이 살아있길 바라는 일이라면, 완전한 백지에서 자신이 그림자로 출몰하는 방식이란 그러한 무의미의 간극이 마술쇼의 환상 속에 봉합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체인소맨>의 의미없는 세계는 오늘날 영화가 갖는 성질을 묘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영화는 그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스타일로만 사용할 뿐, 본질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모호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는 역전되었다고 말이다. 영화가 더는 시간의 무게를 자신의 무기로 삼지 못하듯이 슬로우 시네마 또한 카메라의 본질이 기록에 있음을 말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들 영화는 단절에 대한 불안을 드러낸다. 기억의 단절, 죽으면 다 끝이라고 말하지만 다시 살아나게 된다면 기억은 끊겼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지 않는다. 그냥 그 사이에 있던 일은 말끔히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요컨대 필름 시대의 영화가 물리적으로 손상되어 상영이 중지될 위험을 내포했던 것처럼,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자기 세계의 완고함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면서 의식의 지속성에 흠집을 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들 ‘영화’는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꼬리를 잡아당기면서 그런 즉시 영화가 되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잔혹하게 잘린 기억이라도 감쪽같이, 환상 속에 숨어드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을 수 있는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