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내용은 말 그대로 끝나지 않는 8월── 즉 끝나지 않는 여름방학의 이야기다.” 방영 당시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엔드리스 에이트는 무수히 반복되는 하나의 사건을 다룬다. 이제는 인터넷상의 작은 문서에만 불과한 사건이지만, 이 에피소드가 당시 화제가 되었던 건 반복을 주제 삼아 동일 상황을 여덟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다. “여름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하루히의 염원이 이뤄졌다는 상황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반복은 별다른 담론이나 의식 없이 원작을 옮기기만 했을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확히 같은 상황을 그리지만, 구도와 작화를 새로 그림으로써 얻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다각도의 스케치라고나 할까. 이런 비판은 이 에피소드가 재미와 시간 소비를 위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벌어졌다. 하나의 시공에 대한 다각도의 스케치는, 확실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작품들에서 유효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히>는 라노벨, 더 나아가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많은 기회를 소모해버렸고 낭비해버렸다. 시청자가 원하는 건 이야기였고, 멈춰버린 듯한 이 세계 안에서 시청자는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어쩌면 ‘오늘날’을 구성하는 현재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인가 하면 일상에 관한 문제다.
<하루히>에서의 논란은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은 것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이것이 장르적으로 일상물의 형태를 취하더라도 새로운 에피소드, 이벤트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청자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기 힘들다.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보는 일이 특이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영화나 드라마 한편을 반복해서 돌려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매번 볼 때마다 새롭다는 말이 정말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반복 관람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여겨야 하며, 그 이유는 이야기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런 반복 자체에 흥미가 있을 것으로 추론해야 한다. 이를테면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가 그렇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현실상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초점의 한계로 한번에 모든 디테일을 파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는 우리에게 같은 장면을 되새기라고 요구한다. 실제로 <하루히>의 해당 에피소드에는 매화 달라지는 디테일이 있었다. 이는 세계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음을, 무언가 변화함에 따라 반복 관람할 필요가 있음을 설득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변화가 세계 내에서는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오직 작품 밖에서 시공을 들여다보는 우리만이 그러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다. 이는 캐릭터가 작품 내를 살아갈 때 세계와 직접 부딪히는 표면이 신체라는 점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항상성이 되려 불변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신체를 구성하는 항상성은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균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세상이 나에게 가하는 힘만큼 내부에서 외부를 향하는 힘이 늘어난다. 즉 항상성이란 차이를 메우는 힘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반복은 변화가 아닌 순환으로 이해된다. ‘일상’에서 반복이란 차이를 낳는 힘이 아니라 시간을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처럼 순환은 차이를 메움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봉합의 양상을 띤다. 일상물로서의 <하루히>가 터트렸던 문제의식은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은 변화해야 한다는 자기발전의 의식과 갈등을 빚는다고 말이다. 이를테면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혹은 “이런 일상이 마지막 행복이 되어버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하루히>의 일화에서 하루히가 말하듯, 행복한 일상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확실히 ‘어른’이라는 말과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은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자리한 청소년 시기에 겪는 사춘기는 그러한 항상성의 변화에서 귀인한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대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혹은 20대 초반에 밀집해있는 것도 그러한 성장에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자라야 한다는 마음과 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상충, 이 애매한 구역이 ‘일상’이라는 표현이 살아가는 무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일상’이 그 자신의 밖에서 지칭된다는 점이다.
순환의 논리는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라 명령한다. 이때 밖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눈앞의 것을 마주할 용기다. 눈을 감은 채로 달리는 일은 자동차나 버스 같은 탈것에 의존하는 경우에만, 즉 자신의 의지가 아닐 때에만 가능하다. 눈앞의 것을 마주한다는 건 자기 스스로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달리 말해서 이는 방향을 온전히 의식하는 것 즉 방향감각의 직시를 뜻한다. 두 번째는 바깥 세계에 대한 불안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일이 곧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되는 일상에서는 몸이 밖으로 이탈할 일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구축해 놓은 궤도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여태까지 세워두었던 전략들을 모조리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예측 가능성의 미래에서 예측 불가능함의 현재로 빠져나오는 일은 출구 전략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하루히>가 건드린 건 사람들의 이러한 내적 불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언가 서서히 바뀌지만 정작 나 자신은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변화의 소용돌이의 나선에서 방파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까 <하루히>의 엔들리스 에이트 에피소드는 일상에서 방향을 상실해가는 과정의 일환을 보여주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시켜주었던 콘텐츠들에서 자신을 추방해가는 이야기의 일환, ‘어른이 되라’는 서사의 귀환에 다름없었다.
2.
생각해보면 이 “어른이 되어라”라는 말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유달리 자주 목격된다. 이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은 전적으로 일본사의 영역에 있겠지만, 미디어를 소비하는 우리가 떠올려볼 몇몇 장면이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파고들자면 1995년에 나온 <에반게리온>이 있다. 안노 히데아키가 매체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듯,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만화와 이별하고 세상에 나오라는 것 즉 ‘어른이 되어라’는 점이었다. 이후 안노는 10여년 뒤에 다시 제작한 <신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통해 이 메시지를 구체화한다. 2021년에 공개된 마지막 편(다카포)에서, 안노는 “어른이 되라”고 명령하는 신도의 말에 정면으로 응수하는 신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결말에는 신지의 결혼(혹은 연애)이 자리한다. 신지는 아빠와의 화해를 통해 내적으로 어른이 되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함으로써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어른이 된다. 이는 필시 1995년과 2021년 사이에 안노에게 벌어진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겠고 그래서 에반게리온 프렌차이즈를 이기적으로 사용한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적어도 ‘어른이 된다’는 주제의식에 어울리는 결말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안노가 말하는 어른의 정의란 자신의 유년기로부터의 졸업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자라게 해주었던 환경’과의 이별이다. 육체의 성장으로 어른의 잣대를 들이밀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시기 상으로 에반게리온 구판과 유사한 맥락에서 고찰될 수 있는 게 하라 케이아치의 2001년 영화 <어른 제국의 역습>이라면, 신세기가 지난 2010년대 무렵의 작품들을 살펴보아야 마땅하다. ‘새천년’이라는 의식이 자욱한 가운데, 지난 세기는 모두 ‘현대’를 있게 해준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거는 자신을 자라게 해주었던 환경이 된다. 그리고 이를 뒤로해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작품은 말한다. 즉 2000년대를 전후로 한 작품에서 어른의 의미는 거진 육체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에바>에서 신지의 자위행위라던가 <어른 제국>에서 유년기로 돌아간 마을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2000년대에 어른의 의미는 새 시대에 기대라기보단 도래할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 다가올 수밖에 없는 시간에 질려 미쳐버리고야 마는 인물들, 이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게 바로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라”는 말은 사실 “철 좀 들어라”는 말과 비슷한 수준의 관용어가 아니던가? 큰 틀에서 과거와의 이별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성장이라는 말이 단순한 진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연속성 위에 진행된다는 점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어른이 되라는 말은 전과 후라는 경계가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변화를 뜻한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 변화의 과정은 들뢰즈식의 되기(becoming)로 풀이될 수 있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 곧, 생성이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자라온 몸을 버린다는 말과 같지 않다.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변화의 주체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을 수는 있다. 하루아침에 몸이 변할 리 없지만, 그런 몸을 어딘가로 움직이는 일은 하루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이 바로 일상에서 벗어나는 시간, 즉 새로 만들어진 시간이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내고자 한다면 몸을 움직여 특정한 사물이나 상황과 마주하는 ‘사건’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 점에서 어른이 되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2000년대의 전후는 기존의 관용어구와는 다소 다르다. 그 몸은 자신이 자라왔던 환경이었고 그들 세계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마치 몸의 죽음이 확정된 것 마냥 몸에서의 탈출을 서두른다. 유년기에 머무르면 그에 갇혀 죽어버리고야 마는 것일까? 서둘러 우화하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버리고야 마는 번데기처럼? 오히려 과거의 자신을 살해하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이는 일상이라는 말이 변함없는 시간의 반복이라는 점에서도 합당해 보인다. 원형으로 순환하는 일상적 시간을 벗어나는 방법은, 미래든 과거든 어느 한쪽을 뚫고 나오는 일이다. 일상이 너무 단조로운 나머지 살해의 감각을 일깨워보려는 게 아니라, 삶이 향하는 곳을 미래가 아닌 과거 방향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일 말이다. 이를 통해 일련의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서 <하루히>로 돌아가자.
일상은 항상성의 무대다. 일상은 안과 밖이 하나로 일치되는 경계이며 이는 곧 신체라는 표면, 세계 내에서 주체와 세상이 마주하는 경계이다. 따라서 일상물에서 신체는 고유명이 될 수밖에 없고 이를 위반한다면 과거와 미래 양쪽으로부터 주체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하루히>는 매화 다른 구도와 미묘한 변화를 끌어냄으로써 사람들에게 그러한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특히나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여름방학이 특별 이벤트로 취급되는 점을 고려해볼 때 더욱 신빙성을 얻는다. 흔히 여름방학은 작품 속에서 인물끼리 얽혀있던 관계가 진전되는 하나의 이벤트로 여겨지곤 하는데, 학기 중이 학생에게 일상에 해당한다면 여름방학은 그런 일상의 바깥으로 볼 수 있다. 고로 일상의 바깥에서 관계가 진전되는 건 인물 나름의 용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상의 바깥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은 마치 그러한 일상이 이야기될 수 없음에 대한 우회적 증명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때 해볼 수 있는 물음은 자연스레 그러한 일상에 관한 게 된다. “일상은 왜 이야기될 수 없는가?”라는 논제가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에게 일상은 이야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소속되어 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알고 나면 ‘엔들리스 에이트’에 대해 해볼 수 있는 말이 조금 더 많아진다. 어쩌면 엔들리스 에이트는 ‘오늘’을 구성하는 날들에서 벗어나 보려는 일련의 시도가 아니었을까?
3.
오늘, 그러니까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같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 즉 도돌이표다. 같은 사건이 반복될 때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에 자신의 위치를 대입하게 된다. 두 번째는 위치좌표의 갱신 불가능성이다. 비슷한 풍경이 반복될 때 우리는 그에 반향되어 나오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전자가 주체 지향적이라면, 후자는 장소 지향적이다. 바꾸어 말해 전자가 신체라면 후자는 공간의 문제를 다룬다. 사건의 반복이 변하지 않는 신체의 문제 즉, 유년과 연결되는 반면 풍경의 반복은 방향상실의 문제 즉 미아를 낳는다. 그래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로 연결되기도 한다. 유년기의 문제는 성장에 대한 고민을, 방향상실의 감각은 집 없음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의 차이점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이라는 말에 의존하는 일이 현재주의로의 귀환은 아닌지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일상을 영유하고 싶다는 말이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말로 치환되는 일에 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거에 있던 일은 말끔히 잊자.”는 식의 현재주의를 살펴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더는 미래가 없다.”라는 식의 현재주의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오늘’을 구성하는 날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현재주의의 일환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주의는 무엇보다 오늘에 의존하는 사상이다. 현재주의는 무엇보다 현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재밖에 남지 않았다는 비관을 그 뒤에 숨기고 있다. 과거는 흘러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스틱스 강의 맹세는 주체로 하여금 현재에 머무를 것을 명령하며, 실제로 현재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여기게 한다. 그래서 현재주의는 이따금 파국을 명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의 나날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것이 순환론에 접어드는 순간 우리는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과거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순환의 논리는 자신이 외부에서 지칭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즉 외부로부터의 소명 요구, 불러들이는 과정에 있을 때 비로소 주체는 자신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루히가 회피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복귀의 순간, 다시금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위치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방학’은 다시금 일상으로 복귀할 것을 전제하므로 이런 예외적 사태에 불안 따위는 없어 보이지만, 방학, 혹은 휴식이라 할 수 있는 이 기간에는 복귀날짜가 확실히 적혀있다. 바로 이 점에서 과거는 미래보다는 더 나은 차선책이 된다.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확고한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후퇴하는 일 말이다.
‘일상 안에서 비일상을 꿈꾼다’는 <하루히>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려보자.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하루히의 일상이 잘 굴러가도록 보조한다. 만약 하루히의 일상이 깨어진다면 세계는 멸망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하루히 본인이 자신의 삶이 ‘일상적’이라고 느끼게 하는 일이다. 작품 밖에 있는 독자들은 이것이 명백한 비일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이를 이야기로 느낄 수 있다. 반면 하루히에게 이건 별다를 특이점이 없는 일상이기에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삶은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삶, 즉 세계 전체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버린 삶을 의미한다. 우리가 비일상을 원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비일상, 그러니까 사건을 마주하는 일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세계의 시간으로 고찰되는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들어가는 시간이 바로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히의 ‘엔들리스’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공산이 크다. 자신의 미래를 과거의 자리에 대입하면, 자신이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환상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삶이 바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이게 바로 평범한 일상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하루히의 ‘엔들리스’가 세계 전체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상을 반복하는 일은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날 여지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린다.
만약 일상이 그저 살아갈 뿐인 시간을 뜻한다면, 이런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살아가지 않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원한 현재만이 계속되면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회피하는 일은 마찰계수가 없는 시간, 자기 스스로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이는 삶의 의미를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진다. 의식을 되찾아 자신이 원하는 곳을 바라볼 때, 새 삶의 지도가 쓰이며 새로운 길이 하나의 선택지로 등장하게 된다. 즉 항상성을 벗어날 때, 일시적으로 무너진 균형이 면역계의 교란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것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간이 일종의 ‘죽은 시간(Dead Time)’으로 불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루히의 일상이 과연 누구를 상대로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우리가 비일상을 마주하는 게 ‘사건’이라는 말로 풀이된다면, 비일상은 결코 죽은 시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작품이 설명하길, 비일상을 원하는 하루히는 사실 그 속내에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 리 없어.”라고 다짐하기에 이런 사건들이 세계의 재앙으로 다가오진 않는다고 한다. 이른바 ‘죽은 시간으로서의 사건’이 바로 하루히가 마주한 엔들리스의 정체이다. 헌데 과거와 미래가 모두 사건에 불과하다면 우리들의 삶이 과연 현재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을 구성하는 건 바로 이러한 소외라고 <하루히>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