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밖 소년소녀>(2022)
<지구 밖 소년소녀>는 이소 미츠오 감독이 2007년에 <전뇌 코일>을 만든 후 1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애니메이션이다. 이소가 위에 적힌 단 두 개의 작품만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점은 <지구 밖>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하지만, 그럴 걱정일랑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전뇌 코일>은 2007년에 VR 기기와 메타버스 세계를 다룬 작품이며, 2022년의 현실에 견주어 본다면 이는 충분히 선견지명이라 할만하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둘 사이의 15년 동안 감독이 어떤 일을 했는가, 혹은 15년이나 작품에 공을 들일만 한 가치가 있었는지 일 테다. 이에 대해 이소는 여러 차례 프로젝트를 갈아엎었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SF 장르에서 우수한 상상력을 펼쳤던 선배 만화가 곤 사토시를 떠올리게 하는 감이 있다. 곤 사토시 또한 생전 작품을 여럿 남기지 않았고,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수작이어서 팬들로 하여금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준 바 있다. 그 점에서 이소의 <지구 밖>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15년 만의 차기작이라는 말은 15년 동안 변해버린 세월을 마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전뇌코일>에서 보여준 게 미래사회의 기술을 선제적으로 가져오는 것이었기에, 미래가 불투명한 이 시대라면 모두가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 미래를 가정하며 설계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말이다.
<지구 밖>은 기술이 발달한 미래와 환경문제를 다룬다는 점, 그리고 우주를 무대 삼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던 몇몇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환경문제는 전면으로 드러나있지 않다. 오히려 작품이 내세우는 건 인공지능과 특이점,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달에서 태어난 아이가 지구에서 방문한 세 명의 동년배 꼬마를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적어도 1화부터 3화까진 일상적인 재난 장르의 규격을 따른다. <그래비티>와 같은 우주적 스케일의 재난이 우주정거장(혹은 호텔)에 닥쳐오고 나면 정거장에 방문한 이들의 삶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 아수라장에서 두 개로 나뉜 팀이 하나가 되고, 이렇게 힘을 합쳐 탈출 셔틀로 나아가는 게 전반부의 기본 서사다. 허나 이소는 이러한 재난 상황을 여타 우주 영화처럼 우주 안의 개인, 혹은 어둡고 컴컴한 무언가로 그려내지 않는다. 어쩌면 이소는 기술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전뇌코일>에서 기술이 다른 세계(메타버스)로 접속하는 도구에만 불과하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로 기능했듯이, <지구 밖>에서 피어 투 피어, 적외선 통신, 투웰브와 같은 여러 기술들은 주인공 사가미 토야(후지와라 나츠미)가 삶을 영유하는 세계를 이룬다. 달에서 태어나 우주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는 토야에게 삶의 무대는 우주 정거장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의 모성인 지구는 오히려 토야에게 있어 삶의 바깥, 즉 외부로 사유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나 외부라는 말이다. 외부는 안과 밖이 있음을 전제함과 동시에 그런 ‘안’에만 머물러야 함을 전제한다. 어떤 면에서 외부는 내부를 지칭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를 지칭하려면 ‘저곳’ 혹은 ‘그들’이라는 지칭어가 필요하듯, 토야에게 지구는 달사람으로의 자신을 지칭하는 데 필요한 개념어였다. 작품이 보여주는 첫 번째 플롯은 바로 이것이다. 처음에 달사람 토야는 자신에게 외부였던 지구에 무심했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토야는 과거에 인공지능 세븐이 예언했던 것처럼 지구 인구의 3할이 죽어야 비로소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사이코 같은 생각은 토야가 1화에서 정거장에 견학 온 아이들을 지구인으로 지칭하는 장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토야는 자신을 달사람으로 여김으로써 바깥 세계에서 찾아온 이들을 지구인으로 지칭한다. 즉 토야에게 지구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발명된 것이다. 우리가 지구에 살지만 지구인이라는 자각이 없는 것처럼, 달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달에 사는 것 이외의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위에서 말한 안과 밖의 논리, 자신의 안쪽에 상대방을 포함시킴으로써 외부를 제거하고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동질화의 과정이다. 결말인 6화에 가까워질수록 토야가 사람들을 지구인으로 지칭하는 장면이 점점 사라진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 작품의 기본 뼈대는 바깥을 없애는 것, 외부를 자신의 내부에 편입함으로써 자기 안에 외부가 있도록 하는 일이다. 지구인과 친해짐으로써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사유하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작품이 말하는 공존의 논리이다.
작은 측면에서 이 공존의 서사가 의미하는 바는 주체와 타자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이 작품의 핵심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 즉 인간이 인류로 확대되는 과정에 있다. 작은 것은 큰 것과 등치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같지 않습니다.”라고 답할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인류’를 위해 ‘인간’을 희생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들으면 그 의미는 확연히 달라진다. 인류의 안에 인간이 없다고 말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토야가 빠졌던 함정을 되풀이하고야 만다.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타자로 구분 짓는 순간 작은 것은 큰 것을 위해 희생되어버리며, 종국에 이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주체로서의 자신을 희생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세계에선 ‘나’라는 게 주변부로만 남을 뿐이다. <지구 밖>의 위기도 이런 이유로 찾아온다. 퍼스트 세븐이 죽고 난 후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위기는 세컨드 세븐이 도래함으로써 시작된다. 강인공지능인 세븐의 폭주 원인이 무한한 지능 탓이라고 생각한 UN은 인공지능의 사고력에 제약을 걸고 이를 법제화했다. 그러나 세븐이 남긴 미래 예지의 술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세계의 대안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른바 세븐의 추종자들인 ‘존 도’는 파국의 세상에도 바깥은 있으리라 말하면서, 그 바깥이란 인류의 3할을 인류의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깥’은 내부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개념에 불과하다. 오직 이것만이 ‘바깥’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깥을 먼저 주장함으로써 내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내부를 제거해버리는 역효과를 낸다. 즉, 대안이 없다는 말이 실제로 그런 대안을 만들어낼 주체를 제거해버리는 셈이다.
그 사이에 여러 서사적 얽힘이 있지만, 작중 인물들이 이런 위기를 헤쳐가는 방식은 공존의 논리이다. 또 다른 달사람인 코노하(와키 아즈미)가 세븐과의 접촉을 논의할 때 설명하듯, 세븐이 인류의 3할을 멸종시키려는 게 인류=인간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라면(대를 위해선 소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을 뜻함을 말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세븐이 최우선 순위로 두는 인류의 구원에 인간이 속해 있음을 전하고 ‘인간’을 외부에 있도록 두지 않는 것일 테다. 여기까지 생각을 진행하면 <지구 밖>은 SF 영화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기술이나 환경문제만은 아닌 듯 보인다. 작품의 메인 플롯은 어디까지나 지구 밖 소년소녀가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세븐에 의한 지구 멸망에 우선한다. 이는 지구 멸망보다 중대한 게 주체와 타자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지금의 우리에게 무척 뜻깊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타자를 지정하고 주체의 밀집을 위해 바깥을 혐오하는 일은 지금의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이지 않던가? 토야와 타이요(오노 켄쇼)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작은 축소판일 수도 있다. 물론 작품 내적으로 달사람과 지구인이라는 설정은 극적인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이 작품의 메인 플롯은 어디까지나 세븐의 진의를 밝혀내는 일이다. 허나 그럼에도 달사람과 지구인이 주고받는 우정과 연대, 그리고 몇 가지 대화들은 이 작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기에 손색이 없다.
대표적인 것은 “AI의 지능을 제한해야 인류가 안전하다”는 UN2의 소속 타이요의 주장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토야의 행보이다. 토야가 데리고 다니는 인공지능 다키는 세븐으로 촉발된 AI의 지능 제약에 구애받지 않으며, 이는 타이요와 토야 사이의 갈등 원인이 된다. 타이요가 지능의 제한을 파국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반면, 토야는 오히려 지능을 더 높여야만 파국의 이후를 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지구 밖>은 기술결정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기술결정론에 따르면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미래는 곧 인간의 손을 벗어난 운명을 뜻하므로, 세계의 미래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한 가지 사례로 고정된다. 이는 인류의 기술 문명이 0과1이라는 이진법 체계 위에 구축되었으므로, 예측할 수 있는 것(1)의 반대편에는 예측할 수 없는 것(0)이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즉 기술결정론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된 논리는 기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통제하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맥락에서 이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개척론인 18세기의 생철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미 결정되어버린 운명에서도 계속해서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니체의 영원회귀는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또한 니체가 추종했던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삶에 대한 욕망을 곧 생명체의 근원으로 삼으면서 삶에 투항할 것을 명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가 기술로 등치될 때, 기술의 발전은 곧 삶의 윤택함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그렇다면 인간은 기술 문명을 받아들이며 이에 투항함으로써 그에 따른 부작용까지 모두 선택에 대한 결과로 여겨야만 할까?
<지구 밖>의 표면적인 플롯이 인간과 기술 사이의 갈등이라면, 심층 플롯은 운명과 의지에 대한 실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내내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던 나사 휴스턴(이세 마리야)은 “모든 것은 세븐 포엠(세븐의 예지록)에 기록되어있다”고 말하며 예언을 실행하려 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실행은 과거에서 미래로 자동적으로 흘러가므로 실행(Activate)이라기보단 관찰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사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은 운명의 관찰자일 뿐이지 실행하는 이가 아니었음을 망각한 일이다. 그녀가 속한 조직 존 도의 논리처럼 기술의 발전이 필연이고 그들이 한 예지 또한 사실이 되어야 한다면, 운명(기술)은 우리의 삶 위에 미쳐 날뛰는 게 되어버린다. 어쩌면 존 도가 믿고 싶어했던 것은 그러한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운명이 미쳐 날뛰기에 그 위에 올라타는 일은 몹시 어렵다고, 그러므로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는 건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현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이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면, 우리의 현실은 VR이라던가 메타버스처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야만 비로소 관계와 우정, 그리고 연대를 내보일 수 있는 게 된다. 그래서 존 도는 세븐, 고삐가 풀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AI를 두고서 신으로 칭했다. 종교는 세계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인간 존재가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되어준다. 즉 인간은 세계를 주도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어냈으며 그 ‘외부’ 세계는 ‘내부’를 위해 발명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존 도의 논리는 표면적으로 지극히 유고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중임을 느꼈을 때, 그러한 불안이 중심으로 뭉치지 못하고 주변에서 줄곧 머무르기만 할 때, 하나의 만들어진 대상은 세계 전반을 지지해줄 견고한 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주체와 세계 사이의 알 수 없는 면을 접착해버린다는 점에서 우리 세계를 표면적으로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 실재계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찜찜함을 남긴다. 마치 가스 불을 끄고 나왔는지 헷갈릴 때 드는 초조함처럼,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릴 때 겉으로 보이는 신이라는 형상은 자신의 운명을 의탁할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토야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만약 지능이 사고의 그릇, 그 넓이를 뜻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그 세계의 지평을 더욱 확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알기에 사람이 타락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자신의 힘으로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와 접촉하는 면이 넓어질수록 세계와 맺는 관계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많은 세계에 아이를 내놓는 것이다. 아이가 다칠까 두려워 집 안에서만 키운다면 제대로 된 가치나 사고를 자라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세계는 모종의 충돌로부터 시작되기도 했다. 원자들의 충돌, 정자와 난자 간의 충돌, 각막과 빛 사이의 충돌. 그런 점에서 <지구 밖>에서 닥쳐오는 두 번의 충돌은 변혁의 신호탄처럼 보인다. 마르크스가 말하길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하였다. “처음엔 비극으로, 그다음엔 희극으로.” 퍼스트 세븐과 세컨드 세븐 사이에는 그러한 간극이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