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의 1편과 3편은 두 사내가 처음 만난 음악 가게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이 구조에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대사를 곱씹게 된다. 유건명(유덕화)과 진영인(양조위)가 서로의 조직에 잠입한 스파이로 분하는 이 영화는 진영인을 살리고 유건명을 지옥에 빠트리기를 선택한다. 진영인은 사후에 복권되어 경찰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진영인이 자신을 끝까지 지켜냈던 것과는 달리 유건명은 자신이 꿈꾸었던 모습에 다가서지 못한다. 그는 진영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닮고 싶어하지만, 정작 자신의 출신지를 잊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스파이를 색출하려 들며 그 과정에서 현실에서 배반된 자기 모습에 괴리를 겪고 만다. 이른 자아분열이 가벼운 신경증으로, 다시금 정신질환으로 확장되고 나면 유건명은 더는 현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작품의 제목인 <무간도>는 좋은 사람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없는 상태를 두고서 지옥을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빗댄다. 이 관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생각해보자. 만약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게 두 사람의 관계라면, 영화가 말하는 무간지옥이란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가 보여주려는 게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이거나, 혹은 만약을 가정하며 행복을 바라는 것이라면 이는 대체현실이라 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영화는 ‘좋은 꿈’이 되지 못하는데 이는 영화와 현실 간에 항상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의 현실에 잠입하며 활동하지만, 끝내 좋은 꿈은 되지 못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무간에 빠지게 된다. 현실의 낮은 곳에 무간이 있고, 말하자면 영화는 관객의 시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지옥을 탐하는 것과도 같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 잭의 여정이 단테의 『신곡』을 따라가는 여정이듯, 어떤 꿈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전에 꿈의 맥락으로 이해된다. 영화는 좋은 꿈도 나쁜 꿈도 될 수 있지만, 어쨌거나 꿈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데 그건 바로 ‘분리’이다. 어쨌거나 영화는 우리가 어느 대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한 사건을 공유가능한 형태로 만든다.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도, 자신을 미워하는 감정도 모두 ‘나’와는 다른 감정임을 깨우칠 때 비로소 마음이 건강해진다. 그러니까 영화도 결국 자기에서 비롯됐지만 영화에만 불과할 뿐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에서 무언가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동기부여의 속성이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베테랑2>가 다루는 주제와 배경은 오늘날 대중사회와 영화의 관계를 재론하게끔 한다. 우선 <베테랑2>가 다루는 건 큰 틀에서 사적제재인데, 이와 같은 주제의식이 소재로 사용된 사례를 떠올려보자. 데스노트> 같은 작품도 그렇지만 <베테랑2>는 한국 사회의 법에 관해 말하고 있다. 1편의 서사를 유전무죄로 집약할 수만 있다면 비슷한 논리로 2편은 비질란테라고 볼 수 있다. 서도철(황정민)과 주변 동료가 혼잣말로 말하듯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실제로 공론장에 올라올 때 이 이야기는 논의가능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사적제재는 찾아보면 꽤 흔하지만, 이것이 사적제재를 정당화하는 형태의 캐릭터로 서사에 드러날 때 ‘현실’은 그 기능을 잃는다. 사적제재를 신화화하는 이 관점은 자체로 하나의 동기이지만 반대로 현실과의 분리를 거치면서 본래의 뼈대나 관습, 구조 등을 잃고야 만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적제재는 어떠한 현실 문제의 해결이나 대리만족을 꾀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제재를 사유화하는 하나의 장르 형식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사적제재가 처음으로 등장해왔을 때는 법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가 자구책을 찾는다, 정도의 플롯이었다. 사적제재는 공적인 제재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 사이에 이를 보완할 요령으로 찾은 합의점이었고, 말하자면 공공이 미비한 곳에 자리해 찾은 자기방어수단에 가까웠다. [마음의 보완]이 사적제재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2000년을 전후로 등장한 일본의 대중매체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영화에서는 <유레카> 등이 제작되는 등, 사람들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타의에 의해 자아를 잃고야 마는 냉전시대 작품의 문법과도 유사해 보이지만, 이 경우는 자체적으로 퇴화하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 공적인 영역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적인 영역도 사라지고야 만다는 건데, 보통의 생각과는 달리 개인보다 사회가 우선한다는 점에 그 특이성이 있다. 국가가 없다면 자신의 정체성도 없다고나 할까. 2020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반도>나 <사냥의 시간>처럼 한국이라는 국가가 전복된 상황을 가정하는 사례를 떠올려보자. 2020년대 이후 한국의 영상 매체에서 등장해온 사적제재가 하나의 장르형식이라면, 그 기원은 국가를 상실했던 위 사례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적제재는 공적인 영역이 허물어짐에 따라 ‘자기’를 지켜내려는 시도와 그에 따른 결과물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지고 ‘반도’라는 이름만 남은 허허벌판은 ‘제재’의 의미가 사라지고 형식만이 남은 것과도 같다.
앞서 우리는 사적제재가 하나의 ‘형식’이면서 장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공적인 처벌이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를 따라 사적으로라도 이를 보완하고 싶어한다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아니 정석에 가까운 해설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 유행의 배경에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2020년대는 사적제재를 영웅상으로 그리는 <비질란테>, 초자연적인 현상이 인간의 죄를 심판한다고 보는 <지옥> 같은 만화 작품이 등장했다. 이에 덧붙여서 <신과 함께>나 <내일>처럼 현세에서 심판할 수 없는 영역을 내세에서 심판한다고 말하는 웹툰이나, 지옥의 판사가 현실에 빙의해 범죄자를 초현실적으로 심판한다는 <지옥에서 온 판사> 같은 드라마가 등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매체에서 메타포로 활용되는 지옥이라는 단어다. <반도>나 <사냥의 시간>은 국가 무너지고 나서 지옥이 되어버린 현실을 다루며, 저승 세계를 다루는 작품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혹은 <비질란테>나 <지옥에서 온 판사>처럼 아예 현실의 삶이 지옥이 되어버린 피해자들에 대한, 공적 영역 바깥에서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지옥이라는 말은 한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대중의 합의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장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기는커녕 밖으로 누설되고야 마는 이런 상황을 두고서 우리는 [마음의 보완]이라 일컬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지 않는 상황에서 채택된 것은 자기애를 강화하며 벽을 두르는 식의 전개였다. 이 과정에서 마음은 사회 재건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을 위한 가치가 되었고, 사적제재는 공공이 하나의 제재로 기능하는 것에 저항했다.
이 관점은 2010년로도 이어져서 영화와 서브컬처계에 ‘엔트로피 상실증’이라는 이름으로까지도 등장하게 된다. 엔트로피 상실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은 표현이지만, 본래대로 상실되어야 할 것이 모종의 유출을 겪는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경로로의 존재 이탈과 해체’ 정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예를 들어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같은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활용도가 줄거나 해서 사어가 되어야 할 단어나 개념들이 인위적으로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만약 공적인 제재가 정상적인 엔트로피의 상실을 보여준다면, 사적제재란 무언가 엔트로피가 붕 뜨거나 갑작스레 사라져버리는 등, 납득불가능한 사실을 설명하고 보완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 무언가 비정상적인 흐름을 하고 있어서 그 사이에서 ‘자기’를 지켜내려는 시도가 바로 사적제재의 형태로 각종 매체에 드러나고 있다. 이는 기존에 공적인 제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사적 제재를 통해 만족감을 얻는다는 견해와는 달리, 감정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감정을 잃기 싫어서라는 쪽으로 접근한다는 점에 차별점이 있다. 특히 사회적인 사건이나 이슈를 서사의 레퍼런스로 삼는 작품들에서 감정은 비정상적인 형태로 누설되었던 현실 세계의 엔트로피를 사적으로 복구하는 듯 보이나, ‘공공’이 실패하고 ‘자기’가 대두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암울함만을 남길 뿐이다. 즉, 우리들의 세계가 이미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뜰 수도 없으니 다룰 수 있는 영역을 축소해버리자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어’의 상실은 아마도 그런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점점 더 유아기로 퇴행하고 있다.
이따금 영화는 현실에서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을 ‘대리’한다고 여겨지며, 이 경우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적절히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된다. 사람들은 “뭐, 꿈이라도 꿀 수 있지.”라고 하면서 잠깐의 일탈이나 공상이 허락되는 장소로 영화를 찾는다. 언젠가 이 형식들이 정말로 오리지널로써 활약했던 때가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공적인 합의가 무너짐에 따라 이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공동체가 붕괴하고 합의점을 찾지 못할 때, 문제를 끌어안는 일은 공공이 아니라 개인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법이 범죄자의 처벌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사적제재는 지긋이 고개를 든다. 언어화된 규칙의 대표격인 ‘법률’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합의가 결렬됐다고 보며, 이는 한 사회가 사건을 다루는 일은 공동체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그렇기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잃어버려야만 비로소 공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개인]은 항상 언어의 바깥에 설 수밖에 없다.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너무 달라서 오히려 이를 합치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말이다. 인위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견을 일치시키는 일은 [화합]이라는 명목하에 [질서]를 추구하지만, 이렇게 도출된 결과물이 꼭 선하지만은 않다. 영화가 제공했던 일시적인 공공의 기능이 무너지고 나면, 문제를 인식할 때는 이미 내려야 할 정거장을 한참 지나버린 상황이다. 감정이 수치화되기란 어렵고, 죄는 갚아지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신사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