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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7. 2024

<단다단>의 7화에 관한 단상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단다단>의 7화가 호평을 받는 가운데 이 일화에서 얻을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분절되어 제시되는 포맷은 이따금 다른 화와 분리해 바라볼 정도로 ‘이질적인’ 무언가를 자아낸다는 점일까? <단다단>의 작품 컨셉을 생각하면 이 추측은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외계인과 유령이 한바탕 지나가는 1화를 보내고 나면 만화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한바탕 생각해보게 된다. 유머는 과하고, 펜선이 강하며, 어쩌면 저급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합이 너무 들어가서 분위기에 어울리기가 쉽지 않으니 1화를 보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이 관점에서 7화는 꽤 멀리 있다. 가령 “<꼭두각시 서커스>는 언제 재밌어져요?”라는 밈을 떠올려보자. 드라마나 만화 같은 걸 보면 사람들은 고점과 저점이 있다고들 말한다. 모든 화가 동등하게 재미있을 수는 없다고들 하면서, ‘꾹 참고 보면 재밌어진다.’라거나 ‘약간의 빌드업-진입장벽’이 존재한다고도 말한다. 이 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작품을 다 보고 나서 “대체 언제 재밌어지느냐”라고 물으면 “재밌으니까 다 본 게 아니냐”라는 답이 돌아온다. 작품을 다 안 보고 나서 그렇게 물으면 “좀만 더 보면 재밌어진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며, 이와 같은 ‘현존’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좌우한다. 


누군가에겐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작품을 본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일 수 있다. 이 밈을 내부에서 향유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 문화적 맥락에 소속된다는 점이 그렇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보는 일은 만화 본편에 대한 재미보다 밈이 된 장면들에 대한 소비행위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이나 <흑백요리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회사나 학교에서 주변 사람과 담소를 나누려면 별수 없이 작품을 봐야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이븐하게’ 같은, 쇼츠로만 보았던 장면이 언제 나올지를 예상하는 것도 작품을 관람하는 일에 대한 한 가지 재미일 수 있다. 즉, 무언가를 말하고자 이곳에 있다는 점은 그와 같은 점에서 장소성과 긴밀히 연결된다. 여기서 <단다단>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7화는 앞서 진행되었던 이야기를 거쳐서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이제야 뭔가 좀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대목인지를 구분짓기가 모호하다. 다만 확실한 건 취향에 맞아 계속 만화를 보던 사람만 7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7화가 갖는 의미란 우리가 7화까지 작품을 보았다는 점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갖지 않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한 화에서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  7화는 여태까지 해왔던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지 않으며 독립적인 형태로 작품 안에 자리한다. 즉 7화의 한 장면은 클립으로 소비되기 쉬운 자리에 있다. 


7화는 이전까지 진행되어왔던 작품의 컨셉을 정반대로 뒤집은 결과와 그 틈새에서 자신의 장점을 찾는다. 7화의 연출은 신파로 흘러가면서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 착오를 유머로 승화하던 작품의 작법은 이제 둘 사이의 낙차를 멜로로 승화함으로써 비애극이 된다. 유머와 멜로는 한 끗 차이라고나 할까. 혹자는 악령이 등장하고, 이와 얽힌 인물의 사연에서 슬픔을 발견하는 일로 그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메인 플롯에 관해 ‘지루하다’거나 ‘반복된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사연을 듣는 일이 그들을 용서하는 일과 같지 않다는 걸 잘 안다면, 이 플롯은 확실히 불만족스럽고 어쩌면 혐오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단편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동영상에서 주목할 만한 면을 클립하는 것과도 같아서 일부를 전체로 확대해석하는 효과를 갖는다.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간에 이와 같은 작법에서는 독자가 이 세계가 이런 분위기로 만연해있다고 여기기 쉽다. 쇼츠로는 재밌는데 막상 직접 보면 재미없는 영화처럼, <단다단>의 7화는 작품을 설명하는 것에는 적당한 레퍼런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일화를 긍정하고 싶은 건 음악의 활용에 있다. 앞서 말한 대로 7화의 독립성이 작품의 현존을 강조한다면 이는 동시대 독자에게 같은 현실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의 동시대성을 확보할 공산이 크다. 


일부는 어떻게 전체로 확장되는가? 혹은 전체는 어떻게 일부를 축소해석하지 않고서 자신을 대변하는가? 음악은 이 둘 사이를 매끄럽게 이어주면서 미끄러짐이라는 ‘착오’를 감정의 도약을 위한 발판 삼는다. 알랭은 『예술강의 20』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는 대립, 마찰 울림이 있고 올바른 음정에 가까운 곳에서는 그것들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음정이란 음을 구성하는 진동수의 일치에 의해 음이 강화되는 음정입니다.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올바른 음정을 찾고 있으며, 여러 음 중 어느 한 곳에 머물 곳을 찾아 그곳으로 옮겨가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단다단>에서 악령들은 인간의 몸을 탐하는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자신에게 적합한 신체로 향하는 이 여정은 몸에 대한 탐욕이기보다 자신과 비슷한 사연으로 향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가령 작품의 주역 중 하나인 터보할매-지박령이 소녀들을 위로하며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은 작품을 진행하면서 등장하는 악령들에 사연이 부여되는 일에 대한 사전예고이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동등한 관계에 있다는 작품의 컨셉을 상기시킨다. 주인공의 할머니는 작품의 도입부에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죽은 자의 악함이 산 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다시금 ‘망자의 사연’이 ‘산 자의 비극’과 연결되는 일을 설명한다. 


<단다단>이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변하며 획득한 건 그와 같은 연결이다. <베놈>을 보면 최초 숙주였던 스파이더맨을 줄곧 그리워하는 심비오트가 등장하는데, 그는 여러 숙주를 거치더라도 끝내 스파이디로 돌아오려 한다. <단다단>에서 악령들의 행적이 이와 같다. 악령들이 특정한 캐릭터와 연결되어 일어나는 사건은 이들 간의 조우가 플롯이 아닌 운명처럼 보이게 한다. 악령들은 올바른 삶을 향해 복귀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이와 같은 일은 그들의 살아생전 과오를 회복하려는 일에 대한 의지를 표방한다. 이는 악령이 본래부터 악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성악설과 성선설 중에 후자에 무게를 둔다. 세상에 듣기 싫은 음악이란 없으며, 이는 음악이 필시 조화를 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라는 것. 노래가 결국 화합을 찾아가는 일이듯이 시간을 들일수록 우리는 한 존재의 선함을 믿게 된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바른길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이 노래는 행해지지 않았을 테다. 중요한 건 그게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의 연결, 무엇이 올바른 결론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쁜 유령”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결국 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하나라는 점에서다. 음악은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 뿐, 이곳에 하나의 답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산자와 죽은 자는 모두 한 세계를 살아가며, 그렇기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작품은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단다단>은 한 매체와 한 독자가 서로를 말할 때 ‘메타’라는 색안경을 끼는 일을 언급한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만 자기 삶의 경험을 끄집어낼 수 있는 걸까? 한 작품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한 세계에 속한 자신을 인지하게 한다. 작품이 없으면 자신도 돌아볼 수 없다고 보기보다는 어떤 삶은 작품 안에서만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화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유령만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가는 삶들, 또는 거울에 비친 표면이다. 무언가를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면, 결국 이 세계는 현장이 하나더라도 현실이 둘로 나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가 특이성이나 의외성으로만 이해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두 세계가 서로를 마주하는 일은 결국 하나였던 것에 대한 두 개의 말하기 방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세상에 답이 꼭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와 연결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만큼은 항상 결론을 내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느 작품에 대해 말하면서 특정한 필터를 끼는 때가 많다. <단다단>은 지구와 별의 거리, 연주시차를 생각하게 한다. 무릇 멀리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항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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