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 한 세계를 믿는 일과 같다면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1>

by 수차미
dededede-original-soundtrack-jacket.jpg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은 도쿄 상공에 나타난 외계인 모함과 함께 시작한다. 모함이 등장한 8월 31일과 사건 이후의 32일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어떠한 형태의 ‘이후’가 고려됨은 누구라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예를 들어 작가 아사노 이니오는 “비일상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약간의 불안이 있지만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아가는 일”을 언급하며 이를 연재가 시작된 2014년과 인터뷰가 진행된 2021년의 상황에 빗댄다. 3.11 대지진이 어느덧 3년 정도 지나 재난이 있었다는 ‘감각’이 희미해질 무렵, 뉴노말이라는 이름으로 판데믹 상황이 더는 비일상처럼 느껴지지 않던 2021년 말의 이야기다. 이처럼 메타포가 명확하므로 작품이 진행되는 무대는 작중 이야기가 뜬금없고 황망하더라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이미 일어나버린 현실이기에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말은 한 현실을 대비하거나 방어하기보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이전의 세상처럼, 어떠한 이후로서 자신을 제시하는 쪽에 더 가깝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 영화는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 <산책하는 침략자>처럼 일본영화의 시대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제시된 무언가에 얽혀서만 살아가는 일은, 아예 세계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면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계를 바꾸기보다 자기를 바꾸는 쪽을 택하며, 이는 자기를 세계의 외연까지 확장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들은 줄곧 일어나는 사건들을 정의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정의가 되는 쪽을 택한다.


이 점에서 영화의 도입부에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하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자위대 기지의 창문이 깨지고 한 군인이 “지진인가?”라고 묻는다. 다음 장면에서는 작은 쓰나미가 관측됐다는 언론보도가 들려오는 가운데, 창문 밖을 보는 군인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보인다. 이후 장면이 넘어가 3년 후라는 타이틀이 화면에 팝업되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이 펼쳐진다. 단지 도쿄 상공에 있는 거대 비행체만이 다를 뿐이다. 도쿄 도는 비행체를 필두로 한 A광선 농도를 측정하는 게 일상이 됐다. 등장인물들은 도쿄에 사는 것이 언제든지 죽거나 다칠 수 있고, 심지어는 도쿄 전체가 폐허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바깥’ 사람들이 도쿄에 거주하는 이들을 ‘바보’ 취급한다고 말한다. 쓰나미, 도쿄, 농도 측정이라는 세 개 키워드에서 3.11과 도쿄전력 사태에 관한 직유를 발견할 수 있는 이 설정은 현실을 돌려 말하지 않지만, 외계인이 등장할 때 그 순서가 도치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쓰나미의 영향으로 멜트다운이 발생했지만, 외계인의 등장과 함께 쓰나미를 묘사하는 이 대목은 멜트다운 이후 쓰나미가 발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준다. 영화와 현실이 마주한 결과가 같다면, 출발점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런 결과를 마주하는 일은 똑같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건 어떠한 사건 이후에만 가능한 사고이기 때문에 반대로 그런 사건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이후’를 감각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떠한 순간으로서 우리 현실에 ‘예견’될 수 있을까?


2024년에 영화계에 벌어진 사건 중 하나가 <태풍클럽>의 정식개봉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태풍클럽>이 정확히 어떤 영화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극장에서 보기 힘든 영화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태풍은 예외적인 사건을 품는 예외적인 순간으로서 조명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태풍의 중심부가 고요하다는 걸 생각할 때, <태풍클럽>은 도리어 영화를 보는 순간으로서 관객의 고요함을 지시하는 듯 보이는 점이 있다.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태풍이 있다면, 그 중앙에 있는 건 나선형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후쿠시마 료타는 『나선형 상상력』에서 헤이세이 시기 문학 작품군을 언급하면서 이 시기의 사소설이 “상대방을 자기의 범주에 넣는 게 아니라, 세계를 자기로 채울 뿐인 존재”의 부상을 그린다고 말한다. <태풍클럽>이 1985년 작품이니 시기적으로 이 둘을 엮는 것은 무리겠지만, 자문해보고 싶은 건 그런 상상력이 파도칠 때 이를 막아낼 만한 방파제를 스스로 준비해두었는지, 혹은 그런 순간을 파급할 만한 매체가 우리에게 있었는지와 같은 문제다. 예를 들어 세계를 자기로 채울 뿐이라면, 이런 가정에서 ‘우리’라는 말은 그저 ‘나’의 확장 판본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사고를 하면 어느 쪽이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들, 실상은 ‘나’의 생각에 상대방도 동의할 것으로 자연스레 ‘전제’하고 이를 토대로 생각을 ‘전개’하게 된다. 정의란 그런 문제다. <데데디디>는 자신이 상처 입은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는 일은 결국 그런 상처가 회복될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이 경우 상처는 모든 행동의 준거점이 된다.


영화는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있기에 전자만 봐서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전자에만 한정하면 <데데디디>의 두 주인공이 겪은 과거와 실제 현실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없다. <도라에몽>의 안티테제로 제시된 외계인과의 만남이 현재 시점에서는 모두 말소돼 있다. 온땅의 오빠가 왜 대학을 나오고서 방구석에 틀어박힌 니트가 되었는지, 영화가 그냥 흘려보낸 3년 동안 허공에 등장한 외계 모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냥 지진이나 해일처럼 이미 벌어진 일로서 제시되기만 하는데, 앞서 작가의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듯이 이런 건 결국 비일상이 일상화된 상황을 어떠한 바깥으로서 관측하는 것은 그 내부에서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건 사람들 사이의 열림에서 연결을 얻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닫기 때문에 서로를 지칭하는 가능성을 창출한다. <데데디디>의 도쿄는 이 점에서 한 세계가 모든 외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닫힌 과거, 사라져야 할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린 미래이면서 모두가 마주해야 할 전방인 것.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때의 전개에 대항하는 힘, ‘나선형 상상력’과 그에 따른 나선형 방파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어쩌면 ‘나’의 확장 판본에 불과한 게 아닐까. 바꾸어 말하자면, 모두가 함께 웃고 울기보다는 그저 단 하나의 ‘나’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일이 이 [세계]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이하는 건 어떤 까닭일까.



<데데디디>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어른이 될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미래가 불안하다거나 장래희망을 정하는 문제이기 전에 한 사람의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어떻게든 이 세계에 완결성을 가져와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교 진학을 앞둔 시기, 중학교 3학년의 과거와 고등학교 3학년의 현재를 교차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올려다보는 하늘의 크기만큼이나 그 아래에 내보여지는 자기 존재를 무척 작게 만든다. 이때 한 세계를 멸망에 몰아넣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작은 마음, 단지 그뿐이다. <데데디디>의 아이들은 도쿄라는 국소적인 장소에서 한 세계를 뒤엎을 만한 혼돈을 겪고 있지만, 태풍이 오는 시기 폭풍의 눈에 자리한 이 세계는 아이들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어른의 모습을 잘 묘사한다. 자기애로 충만한 게 뭐가 잘못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 한 [세계]를 믿는 일과 같다면 이 세계에 바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애로 충만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미 한번 단정 내린 결과물을 수정하러 들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고 말하거나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 중 어떤 건 분명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그런 게 존재했다고 믿으면서도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자문하지 않는 건 그에 대한 결과로서 제시된 자신이 그만큼 확고히 뿌리내린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능성을 자신의 현재가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과거에서 찾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보다 도리어 무언가를 바꾸기 더 어려운 현실을 반대로 이용해보려는 시도인 것 같기도 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다단>의 7화에 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