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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정치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쇠약해진 현실

<오징어 게임> 시즌 2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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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의 시즌2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라는 대사다. 다회차 플레이어라는 직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이미 게임을 해봤기에 공략법을 알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의 전개에 구심점이 되어준다. 관객은 시즌1의 게임과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 상황에 현재의 인물 구성이 놓일 때는 어떤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게 될지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은 시즌1과는 다른 게임 구성을 보여주면서 이와 같은 기대를 배반하며, 게임의 규칙은 바뀐다. 구슬치기가 팽이치기, 비석치기, 공기놀이 같은 팀전으로 바뀐다. 줄다리기가 짝을 지어 방에 들어가는 의자놀이로 바뀐다. 이렇게 바뀐 게임은 모두 아이들이 하는 놀이여서 겉으로는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성인들의 세계인 ‘게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형성한다. 가령 시즌2의 1화에는 놀이공원의 퍼레이드를 보고 감동 받는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인형탈에 반해 연기자의 대기실에 들어오는데, 한 연기자가 욕설을 하며 등장하는 과정에서 동심이 깨져버려서 아이는 대차게 울음을 터트린다. 이 묘사는 동심으로 표현되는 인형 퍼레이드가 사실은 성인들의 직급체계, 근무체계를 따르는 직업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에서 놀이와 게임의 관계가 정확히 이것과 같다. 놀이는 자신을 은밀히 숨긴 게임이 한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벤야민은 놀이를 두고서 어린아이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세계라 보았다. 이때 놀이는 자신의 신체-세계를 움직이는 규칙으로서 이에 대응하는 반응을 이루어낸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당기고 싶을 때는 태엽 자동차를 집어서 뒤로 후진했다가 놓는 동작을 한다던가하는 식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의 진의를 숨기는 반대항로서 존재한다. 특히 벤야민은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놀이공간으로 파악하면서 이곳의 사물이나 대상은 놀이로서의 진의를 숨기고 있으며, 이 점에서 놀이하는 것은 곧 미메시스를 밝히는 행위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놀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위를 밝히는 일이며 이는 어른에게 있어 언어의 역할과도 같다. 언어는 자신이 지향하는 것, 닮고 싶어하는 가치를 보여주며 이를 따라 언어는 존재가 나아가는 방향이 된다. 마찬가지로 놀이는 놀이하는 이의 배경을 흔적으로써 드러내 보이며, 이를 따라 자기를 해방하는 유희하는 존재가 탄생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그와 같은 유희가 역사 안에서 슬픔을 감추거나 극복할 요령으로 발달해왔음을 지적하면서 비애극을 말한다. 이를 따르자면 유희는 슬픔을 기리며 애도하는 한 가지 방식이며, 이것이 예술 작품을 통해 표현됨으로써 슬픔은 있는 그대로 세계에 내보아지게 된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성기훈은 두 차례 오징어 게임에 참가했는데, 이 중 같은 게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유일했다. 성기훈을 골릴 목적으로 주최 측에서 배려해줬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사적인 생각을 풀어보고 싶다. 오징어 게임에 다시 참가한 성기훈은 사람들 앞에 서서 무궁화 게임의 규칙에 관해 말한다. 모두가 함께 살아나가자고 말하는 성기훈은 어떻게 해야 게임에서 죽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한다. 성기훈은 사람들 앞에 서서 “움직이지 마세요.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의 뒤에 숨으세요. 입을 가리세요.”라고 말한다. 성기훈의 이 말은 사람들을 최대한 생존 상태로 결승점에 골인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탈출 서사와 구명 의식을 둘 다 갖는다. 즉 이 게임에서 성기훈의 입장은 한 재난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과 그를 구해야 하는 것을 모두 갖는다. 이는 성기훈이 오징어 게임이라는 트라우마적 사태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과 함께, 당장에 처한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 합의점을 찾는다. 이제 게임의 참가자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조명되고, 동시에 생존을 향한 발걸음이 신체의 작은 떨림으로 변환된다. 신체를 통제하지 못한 채 신경감응을 일으킨 혁명의 신체는 총알 세례를 받아 죽어버린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징어 게임>은 한 사회가, 한 신체가 지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하는 쪽에 가깝다.


물론, 게임 하나에 대한 진술만으로 시리즈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을 기억하고 싶은 건 아이가 어른의 진의를 밝힌다는 점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질서를 갖추어 차분히 행동하는 게 혼자서 자구책을 찾는 것보다 더 나은 생존률을 보이지만, 어떤 경우 질서가 혼란스럽고 난자된 상황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면서 신체의 떨림을 전진의 행보로 옮기는 일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오징어 게임의 첫 관문에 해당하는 무궁화 게임에서 참가자는 게임의 잔혹함을 알게 된다. 이 첫 조우는 몹시 두려워서 몸을 덜덜 떠는 사람도 있고, 혼비백산해서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이겨내고 나면 남들이야 죽든 말든 별 상관없는 사람이 속속들이 생겨난다. 어떤 형태든 간에 오징어 게임은 각자의 사연으로 참가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일시적으로 ‘해소’했고, 또 신체를 ‘통제’했다. 그러나 통제가 곧 회복을 뜻하는 건 아니다. 상처 입은 자들의 공동체는 상처를 토대로 연결되기 때문에 실질상에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상처를 안고 있어야 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오징어 게임>은 데스게임이라는 장르이기 전에, 프론트맨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패배한 패잔병 무리의 ‘게임’이며, 동시에 그런 재난에서 벗어나려 하는 ‘어른’을 보여준다.


후쿠시마 료타는 『나선형 상상력』에서 동시대 일본문학의 경향을 언급하면서, 문학이 현실 정치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쇠약해진 현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201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영화에서 재난은 서투른 봉합과 시침의 파열을 보여주고는 했다. 그런데 이 재난은 현실 사회의 몇몇 사건이나 문제를 레퍼런스로 가져옴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소구력을 얻는 부류로 설정되는 때가 잦았다. 이런 주제 설정은 현실 사회의 문제와 이를 둘러싼 의제 설정에 많은 면을 기대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시의성이 있지만 결국 영화가 내적으로 완결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영화는 세상이 뒤집혀 모든 게 파괴되었지만, 한 아파트는 그런 재난에서 홀로 살아남아 생존자의 공동체가 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끝까지 선함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가 자기만의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현실의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그 자체다. <기생충>이 믿음의 벨트를 엮은 것처럼, 사람들은 공동에 빠지지 않으려면 공동이 되어 위기를 모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공동의 중앙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어서 뜻을 달리하는 이들을 몰아세우는 구덩이가 되기도 한다. 처형장이라고나 할까. 이런 관점에서 중앙은 영향력 있지만 그만큼 위험이 큰 장소이다. 오징어 게임이 이루어지는 장소들이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이지만 끝내 텅 빈 공터로 변해버리듯이, 이곳에는 위기가 없다.


다시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돌아와서, 모자라지만 똑똑한 청년인 이병헌이 사람들 앞에 나서 마이크를 들자 화가 난 주민들이 그를 공격한다. 처음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를 나중에 가서 미워하게 되는 일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4년조차도 너무 길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터널> 같은 영화에서도 보면 어딘가의 앞에 나와 현장을 시찰하거나 티브이에 나와 연설하는 ‘높으신 분’은 항상 악역으로 등장하고는 한다. 어느 나라나 다 정치인을 싫어하니까 딱히 특별하지는 않지만, 이런 정치인의 빠른 실각은 믿음이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 테다. 이 말의 연장선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 시기에 아예 부동산이 연쇄적인 지진으로 폭파되어버렸기에 그 시각적 이미지에서 주는 쾌감이 분명 있다. 부동산 가격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누구나 해봤겠지만, 정작 그게 자기 차례에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지도 않았기에 부동산 문제는 하나의 재난이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자신들이 더는 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것은 외부에서 차분히 위협이 다가오면서, 외부의 적이 끝내 공성전을 통해 아파트 입구에 우뚝 선 전망대를 무너트릴 때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에서 이것이 놀이가 아니라 게임임을 알게 되는 것도 한 참여자가 몸에 달라붙은 벌로 인해 몸을 움츠릴 때 발행되는 전환사채 때문이다.


우리는 몸에 있는 부채의식을 떨쳐낼 수 있을까. <오징어 게임>은 한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 생존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기보다, 타인의 희생과 죽음 덕에 자신이 생존할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기보다 타인에 대한 미안함을 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타인을 희생하거나 죽여버리면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걸 누구나 알게 되기도 한다. 이 경우 미안함은 그저 감정에만 불과할 뿐 신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될 수 없으며 단지 내러티브를 진행하기 위한 ‘현실’이 될 뿐이다. 문학은 현실에 기대고 있다고, 그 이야기는 전적으로 현실적인 감정들에 의존한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오징어 게임에서는 누구나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또 누구 하나 이례적이거나 비정상적이라고 말할 법한 사람이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고, 이것들을 위해 자신의 현실을 희생하는 것은 막연하게 비판하기만 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오히려 <오징어 게임>에서 생각나는 것들은 아이와 어른의 역할 등에 관한 단설이다. 만약 어른이 책임을 지는 존재라면, 어른은 아이를 지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이는 어른이 자신의 삶을 기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이 보여주는 다양한 놀이는 우리가 자기를 구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이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만은 기만의 움츠러든 판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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