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시즌2>(2024)
<오징어 게임>의 시즌2에서 언급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리크루터가 등장하는 1화와 내부 총격전이 벌어지는 7화다. 전자가 좋은 쪽으로 언급되었다면 후자는 주로 나쁜 쪽의 평을 들었는데,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다소 개연성 없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시즌2가 사실상 시즌3의 전반, 그러니까 근래 영화 등에서 흔히 보이는 ‘2부작’ 구성임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평가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 7화는 사람들이 시즌3의 1화를 보고 싶게 하는 후킹의 역할을 수행한다. 마치 드라마나 웹툰 등에서 마지막 장면에 절단신공을 하듯, 7화는 성기훈이 주최 측에 투항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때 시청자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친구를 희생시킨 결말에 주목하면서, 성기훈이 다시금 살아남은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성기훈이 현실에 풀려나 삶을 이어갔던 것처럼, 이 게임 안에서 “To be Continued…….’를 기대하게 하는 건 7화의 주된 역할이다. 아마도 이는 넷플릭스가 시즌제 구성을 통해 점유율을 확대하려는 전략이었을 테다. 이야기를 한 번에 풀면 시즌1에 비해 분량이 너무 많거나 해서 별수 없이 2개로 나누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즌2는 비교적 성공한 편에 속한다. 만약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욕했던 누군가가 있다면, 이야기를 따라가서 마주한 결말에서 ‘패배’한 건 욕을 먹은 작품이 아니라 그걸 끝까지 보고 있던 시청자이니 말이다.
1화의 한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조폭과 협력관계에 있던 성기훈은 연락이 두절되자 그들이 붙잡혔음을 직감한다. 이후 성기훈이 자신의 활동거점으로 돌아오자 리크루터가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는 <오징어 게임> 전체를 압축하면서 시청자에게 앞으로의 작품 동향을 제시한다. 리크루터가 성기훈의 천성을 두고서 스스로가 쓰레기임을 인정하라고 강요할 때, 성기훈은 자신이 쓰레기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본성이 시키는 말을 듣지 않는다. 성기훈은 리크루터에게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개”라는 말을 돌려주면서,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본성을 이겨내는 힘, 소신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서 어떻게 느낀다 한들, 자신을 배신하는 것 또한 선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자기를 속이는 거짓말’은 나쁜 의도로 착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끝내 선으로 남는다면 결과적으로는 선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한다. <오징어 게임> 시즌2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분명 미심쩍은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완주하게 하는 힘이 있다. 시즌2가 시즌1을 완전히 뒤엎는 구조이기 때문에 시즌1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시즌2도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봤다면, 그건 어떤 형태로든 재미를 발견했다는 소리가 된다. 운이 좋을 뿐인 쓰레기인 성기훈이 최후의 1인이 되었다면, 여기서 해볼 수 있는 말도 성기훈이 우승했다는 말뿐이다.
시즌2에서 생존이라는 말은 시즌1과는 다른 맥락으로 쓰인다. 이 작품에서 ‘생존’은 최종적인 판단이자, 가치이고 또한 결론이다. 생존은 참가자를 계속해서 뒤로 밀어내며 이는 어딘가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뒤로 쫓겨나는 형태, 즉 ‘퇴거’에 더 가깝다. 누군가에게는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이 정지된 공간이야말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 영영 시간을 멈추고 싶은 곳이었을 것이다. 시즌2는 참가자들로 하여금 “이곳에 남는다, 남지 않는다”를 두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지만, 이 구성에서 간과된 건 시즌1의 메시지다. 시즌1에서 진행되었던 투표는 이들이 밖에 나가도 아무런 변함 없는 현실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오징어 게임에서의 생존이 차라리 바깥 세계에서의 현실보다는 더 명운을 걸어볼 만한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런 점에서는 도리어 자신의 배경 없이 객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함으로써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이지만 이 사실이 현실에서는 쉽게 간과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게임에 참가하는 일은 자기를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 된다. 물론 오징어 게임이 차라리 현실보다 나으니까,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것도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픽션의 가장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자리란 또한 일어나는 일과 단지 지나가는 일 사이의 차이를 지우는 경향이 있는 상황들이다.”
오징어 게임은 삶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들이 한데 모여 진행된다. 이 점은 오징어 게임이 개최되는 초장에 진행요원 네모의 입을 빌려 공언된다. “여러분은 감당할 수 없는 빚에 내몰려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개인의 사연과 빚진 금액이 모두의 앞에 공표된다. 자신이 부담해야 할 돈이 많을수록 점점 더 바깥의 현실은 실리를 잃어가고, 그들에겐 단지 이 게임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악독함만이 남는다. 삶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들에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는 지워진다. 지금 벌어지는 일에는 현실감이 없고, 과거에 겪었던 일은 마치 오늘처럼 생생하다. 오징어 게임이 유년기에 즐겼던 게임을 컨셉으로 삼는 것은 그런 뜻에서의 가장자리일 테다. 이 과거가 우리의 오늘이 될 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사라진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자신의 입으로만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픽션은 경계를 다시 그리거나 자신의 말소를 등재한다.” 게임에 참가하는 이들에게서 픽션은 이들이 점유하는 무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다. 안과 밖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투표를 해봐야 어느 곳이 진정으로 더 나은 것일지에 논쟁이 설 수밖에 없다. 어디가 더 나은 곳인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두 곳이 구분되지 않아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참가자는 차라리 자신을 망각해버리기를 택한다.
<오징어 게임>의 시즌2의 주된 변화로 지적되는 투표 시스템의 개편은 이분법이라는 명쾌함을 통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온갖 갈등을 생각하게 한다. 일단 파란 것과 빨간 것의 구분부터가 그렇고, 모 아니면 도를 선택하게 해서 대안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특히 시즌2의 1화, 리크루터와 성기훈의 게임에서 잘 드러난다. 성기훈은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서 러시안룰렛의 생존자가 된다. 성기훈이 주인공이어서 플롯 아머가 작동했으리라는 추론이 들어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시즌1에서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였던 그는 그 거짓말 같은 상황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새로 그렸고, 또한 자신의 지난날을 무대에 올렸다. 성기훈이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가 됨으로써 얻은 것은 오징어 게임이 진행되는 무대의 종결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그곳에서의 기억, 말소되지 않는 기억이다. 게임에 참가하기 전의 기훈이 사회에서 언제든지 사라져도 모를,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인 평범한 소시민이었다면 오징어 게임 이후의 기훈은 우승자로서 유일무이한 존재다. 이 거짓말 같은 게임, 픽션의 가장자리에서 그는 논픽션의 주인공이 된다. 기훈은 456억과 함께 ‘비참한’ 현실에 남겨진다. 인간관계와 교류가 끊긴 현실보다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게임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오징어 게임 안이 더 현실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를 통감하는 순간, 무엇보다 비현실적이었던 픽션이 그를 논픽션의 문제에 빠트렸다.
영화는 흔히 현실을 닮았다는 점에서 논픽션으로 분류되고는 한다. 픽션이 허구라면, 논픽션은 허구가 아닌 모든 것을 뜻하므로 단지 현실만이 논픽션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픽션의 문제에서는 자신이 허황되거나 거짓된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반대로 논픽션에서는 자신이 허황되거나 거짓된 존재이기를 ‘선택’할 수 없다. 생존도 마찬가지다. 둘 중 어느 곳이 더 진실된 나를 이루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선택이 아니라 남겨지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선택지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여기면서, 삶의 가장자리에 남은 것들이 자기를 이루는 것들이라 여기면서. 그 점에서 이 작품의 성기훈은 논픽션의 존재처럼 보인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성기훈에게는 살아남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기훈이 오징어 게임에서 보고 들었던 것은 그가 생존에 성공함으로써 도리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논픽션의 문제에 빠지게 된 기훈은 더는 예전처럼 하나의 현실을 살아갈 수 없게 되었고, 세상이 얼마나 차등적이고 또 분열되어 있는지를 알게 됐다. 빨간약을 먹은 기훈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존재하는 바로 그 현실을 외면한 채, 현실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이전처럼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돈만 많을 뿐, 그 처지란 건 예전과 별반 다름없는 셈이다.
성기훈에게는 게임 이외의 대안이 없었던 걸까? 성기훈에게는 게임을 멈추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즌1의 1화에서도 드러나듯, 경마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경쟁과 게임을 한 자리에 놓는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두 의미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달리 표현한다면 두 의미는 대립항이 아니다. 경쟁과 게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서로 함께하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경쟁하지 않는 것은 게임이 아니며, 그 경쟁이란 게 무엇인지는 미지수다. 꼭 사람이 죽는 것만이 경쟁은 아니니까 어쩌면 오징어 게임은 그렇게까지 잔혹한 무언가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받은 상금 모두를 복지재단을 설립하는 일에 사용할 수도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답은 이미 시즌2의 1화에서 리크루터가 자문자답했다. 공원의 노숙인에게 빵과 복권을 두고서 선택권을 준 그는 마지막에 가서 노숙인들을 모두 불러모으고는 남은 빵을 모두 발로 밟아 터트려버린다. 굳이 의미를 나누어본다면 확실한 행복과 만약의 큰 행복을 비교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프레임만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산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픽션과 논픽션은 허구와 허구가 아닌 모든 것으로 나뉜다는 점에서, 단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교한 허구란 그것을 통해서만 바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과도 같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일과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어떤 섬에서 가상의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다는 설정으로 이를 수행했다. 시즌2에서는 오징어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를 찾아 떠나는 도시어부팀의 플롯이 다른 한편으로 펼쳐진다. 오징어 게임을 안에서 진행하는 기훈이 프레임의 안에 있다면, 어부팀은 그것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쪽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창문 하나 등장하지 않는 이 장소에서는 1화의 무대만이 유일한 창문이다. “외부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자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특징을 띤다. 하지만 원래 창문은 위협이 아니라 약속을 나타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계급이 상승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이는 작중의 규칙들에 자신을 옭아매는 결과를 낳는다. 게임장에 가는 길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집처럼 꾸며져 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배경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은, 무엇보다 이들의 모습이 은폐와 탈은폐의 반복으로만 보이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나는 건 자기 감시다. 푸코의 말처럼 감시와 소통이 서로 상충하는 가치라면, 어떠한 가치의 뒤로 숨는 일은 애초에 엄격한 자기 감시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꼭 창문을 넘어야만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활인화가 무대에 오르는 인물, 자기를 속이는 인물상을 지시한다면 부동화는 픽션의 가장자리, 한 세계를 등져야만 한다는 ‘운명’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