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2024)
영화는 날 것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날 것의 생각 그대로를 말해본다면, 만화 <진격의 거인>이 떠올랐음을 고백하고 싶다. <진격의 거인>은 다들 알다시피 척수액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폐쇄회로에 가까우며 이와 같은 대목은 체제를 바꿀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 즉 ‘바깥’의 근본적인 부재에서 출발한다. 엘렌은 벽 밖을 바라보며 자유로워지고 싶노라고 고백하지만, 작품의 후반으로 가면 결과적으로 그 자유는 부자유를 토대로 할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척수액을 통한 거인의 계승에서 엘렌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종말, 그 이상도 이하도 해내지 못한다. <서브스턴스>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다. 안시환 평론가는 씨네21에 쓴 글 “폭력으로 갚는 폭력”에서 이 영화에는 남성 중심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외부가 지워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 말인즉 영화의 초점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바꾸는 일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안시환의 말처럼 결과적으로는 ‘예정된 실패담’일 뿐인 이 영화를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의 문제의식에 찬성하는 쪽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 없이 단순히 무언가를 전시할 뿐인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영화를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로만 보는 쪽은 메시지를 영화의 타이업 상품으로 내놓는 쪽을 불편해한다. 어느 쪽으로든 냉대받는 이 구성은 여성 대 여성의 대립구도와 남성 위주의 상품 경제에서 여성이 갖는 위치 양쪽 모두에 다리를 걸치기에 양쪽 모두에게 불편한 결과를 낸다.
그러나 영화에 관해 가장 적절한 해석은, 이미 영화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점일 테다. 애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인데 구태여 무언가 해결책을 모색할 이유는 없다. 도리어 영화가 보여주는 내용은 일종의 사계처럼 정해진 순리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를 예측하는 일에 따라 비롯되는 비애감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 우선 영화는 오스카상을 받은 엘리자베스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한 것으로 시작한다. 바닥에 새겨진 별이 점점 낡아가는 모습은 스타의 가장 찬란하던 한때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후 그녀가 서브스턴스를 처음으로 이용할 때, 그녀는 건물로 들어가는 첫 입구가 반쯤만 열리는 일에 불쾌감을 표시한다. 반쯤 열린 셔터를 이용하려면 불편하게 허리를 절반쯤 꺾어야만 한다. 이 모습은 마치 그나마 있던 자존심마저 반쯤은 굽히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 서브스턴스의 부작용에 시간을 빼앗겨 신체 노화가 진행되어버린 그녀는 허리가 반으로 굽어서 아무런 행동 없이도 그냥 셔터를 넘어간다. 마치 셔터 자체가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사실 영화는 이전 장면에서 그녀에게 서브스턴스를 소개해준 남성이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약물을 제공하는 쪽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 동선 설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브스턴스를 이용하는 이들이 마주할 결말을 미리 예견했다. 결과적으로 서브스턴스는 작품 안에서 결말을 미리 제안하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타이업 상품, 맥거핀에 해당한다.
서브스턴스에서 약물을 주입하는 곳이 척수인 건 왜일까? 아마도 척수가 골수를 뽑아내기에 가장 좋은 곳이어서, 그리고 골수는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재료가 되어서일 테다. 한편으로는 척추가 인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서브스턴스를 이용하는 것은 작품을 끌어가는 뼈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배우가 극을 끌어가는 중심이라고 가정할 때 그런 배우에 영향을 끼치는 게 바로 서브스턴스다. 서브스턴스는 한 이야기가 늙어가는 모습과 한 배우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마치 사계가 순환하듯 배우의 삶도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 영화의 시작점은 엘리자베스가 커리어하이를 찍고 나서 앞으로의 남은 삶이 내리막길뿐이라는 걸 알아차릴 때다. 방송사의 중역인 하비가 자신을 티브이 쇼에서 하차시키려고 계획 중임을 알게 된 엘리는 자신에게 남은 삶이 내리막길뿐임을 깨닫는다.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엘리는 정신에 이어 물리적으로도 충격받는다. 그렇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뭐라도 해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엘리는 병원에서 얻은 낯선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서브스턴스를 획득한다. 여기서 서브스턴스를 홍보하는 문구는 “자신은 하나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그녀의 도드라진 흉추는 미디어의 자신과 거울 속의 자신을 하나로 이어주는 중심축이 된다. 서브스턴스의 역할은 그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분리해내는 것, 미디어와 현실 세계의 나를 서로 분리하는 것이다. 클리셰를 따라 정해진 결말을 마주하지 않도록, 결말에 향하는 길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디 호러쇼라는 장르도 생각해둘 만하다. 바디 호러쇼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몸과 마음 사이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몸이 바뀌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변형된 몸을 바르게 운용할 수 있고, 반대로 몸을 개조함으로써 한 사람의 정신도 개조하려는 시도가 있다. 특히 바디 호러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신체의 변형을 다룸으로써 그와 같은 고정관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바디호러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따른 파멸이 예견된다는 점에서 종말론의 축소판에 가깝다. 일반적으로라면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가 늙고 병드는 일밖에 상상하지 못하지만, 바디 호러는 이를 극복하려 하는 과정에서 신체의 우발적인 손상을 겪는 일을 다룬다. 여기서 결정된 건 자기 신체의 한계가 아니라 예정된 파멸이며 영화의 핵심은 그들이 대응해야 할 게 파멸임에도 도리어 자기 신체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서브스턴스>에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인들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이걸 단순히 현실을 그대로 옮겨왔기에 배경설명을 생략한 것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영화가 다루는 상황이 너무 초현실적이다. 초현실은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태동한 미술사조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초현실은 이미 처음부터 이 세계가 미쳐있었음을 반증하는 사례일 테다. 작품이 서브스턴스 약물의 기원이나 작동원리를 상세하게 풀고 넘어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신체를 대하는 방송가의 관습이나 제도 등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다.
이야기를 다시 짚어보자. 수의 성공을 바라보는 엘리가 차츰 수를 다른 인격체로 대우하기 시작할 때 그녀는 창문 밖에 보이는 수의 얼굴 현판을 증오한다. 거대한 펜트하우스 형태를 한 이 집에서는 공교롭게도 수의 얼굴이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두 사람이 마치 얼굴을 맞대어 정면을 마주하는 듯한 이 장면에서 엘리가 하는 것은 거대한 통유리를 신문지를 감싸는 일이다. 여기서도 엘리는 거대한 창 내부에 갇혀 있으며 바깥에서 주어지는 시각정보에 수동적으로 대응할 뿐이다. 즉 그녀에겐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으며 어디까지나 주어진 것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유일한 게 서브스턴스라는 점은 유의깊다. 척수 주사는 한 개인을 이루는 뼈대를 변경하려는 근본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인체가 이 땅에 바로 서 있을 수 있게 하는 게 척추라는 점에서, 서브스턴스는 자신이 꾸려갈 수 있는 이야기 범주 내에서 이를 다루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줄기세포는 만능세포이지만 반대로 자신이 지닌 DNA 풀 이상의 것을 해내지 못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자기복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바깥’을 추구하는 일은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세계를 바꾸기보다 자신의 몸에 갇힌 사람들에 빗대면서, 이야기를 새로 쓸 용기가 없음을 비판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새로운 판본으로 갱신하는 일은 오래된 스파게티 코드를 유지 보수하는 일이 아니라, 그게 어렵더라도 엔진을 바꿔 코딩을 새로 하는 수준의 재창조여야만 했다.
<서브스턴스>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자신을 바꾸려는 시도조차 자신이 본래 품고 있던 가능성에 의존함으로써 한 세계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서브스턴스의 척수는 한 세계가 소멸을 향해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일에 불과하다. 자신의 어린 판본으로 의식을 옮기는 일은 어떤 면에서 과거로의 퇴행이기도 한 것이다. 과거를 다시 위대하게!라고나 할까. 공교롭게도 자신을 이루는 현재 뼈대에 약물을 주입해서, 시한부에 가까운 한계선을 예고하면서 이를 토대로 현재를 도드라지게 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한 면과 닮아있다. 이따금 과거의 향수 어린 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도리어 우리 세계가 얼마나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할 수 없는지를 상기시킨다. 새로운 것에 부적응하고, 아니면 실패를 겪으면서 약해진 마음이 우리를 과거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과거로 퇴행한 자신이 현재의 나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일은 몹시 비효율적인 일로 보이는데, 이는 과거를 답습하는 일의 연비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야기는 줄기세포가 폭주해 그녀가 한 쌍의 거대한 테라토마를 양생하는 일로 이어진다. 닫힌 세계에서는 유전자풀도 한정되므로 기형이 탄생할 확률 또한 높다. 과거의 영광에 투자하는 일이 현재에 그리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일은 서브스턴스의 바디호러가 차라리 내부를 비추기만 할 뿐인 점에 감사하게 한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보다는 차라리 예측 가능한 과거에 갇히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자신으로만 남을 수 있다면, 그 어떤 형태로든 자기로 남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