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리가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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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광호는 근래 영화계의 재개봉 관행을 소개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관객들이 오직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장소를 설계했던 관행은, 오직 한 영화를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영화를 재개봉한다는 건 그만큼 흥행이 검증된 ‘안전한’ 선택을 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그’ 영화에 타임테이블 중 하나를 내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재개봉관을 찾는다는 건 쉽게 ‘우리’를 발견하는 방법이다. 마케팅 문구도 대개 “당신이 아는 바로 그 영화”라는 식인데, 여기서는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가 생략된다(좀 전 문장에서도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사람마다 작품을 알게 된 경로라던가 하는 게 모두 다를 텐데, 이 모든 걸 ‘우리’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그게 그리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환경과 그런 취향의 ‘바깥’을 배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재개봉관을 찾는 건 근래의 상품 팝업스토어를 방문하는 것과도 같다. 여기에는 인플루언서, 스트리머, 유튜버, 전자기기, 애니메이션 캐릭터, 게임 굿즈처럼 많고 많은 덕질 상품들이 팝업되는데 이곳의 장점이라면 어딜 가도 이걸 좋아하는 사람만 있다는 점이다. 어디 박람회 같은 곳이라면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다녀야겠지만, 팝업스토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어딜 봐도 ‘동류’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고, 적당한 수준의 내적친밀감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우리’가 된다.


사적으로 주변 사람에게, 인터넷상의 사람에게 ‘우리’의 정도를 대강 가늠한 채 말을 건냈다가 쓴소리를 들었던 때가 많다. 살다 보면 선을 넘지 않는 일이 참 중요한데, 그걸 가늠하는 게 곧 사회성의 지표가 된다. 그게 피곤해서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 “왜 이리 가만히만 있느냐”고 타박을 받기도 일수라, 적당히 관계를 맺지 않은 채 평범하게 살아가는 편이 더 낫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쉽게 다가설 수 있을 온갖 매체들에 빠져들기 쉽다. 그게 특히나 평소 익숙하게 알아왔던 무언가라면 더욱 그렇다. 팝업스토어는 이런 뜻에서 방문자에 즐거운 경험을 제공한다.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취향이 부정당할 일이 없다. 어느 누구에게나 섣불리 말을 걸어도 ‘우리’를 벗어나서 곤란하게 될 확률이 적다. 즉, ‘우리’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기에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아마도 이런 점이 오늘날의 사회에 팽배한 인식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도 모를 피로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피로감 안에서는 은연중에 자신의 내적인 친밀감에 설득력을 부여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자신을 받아들여 줄 어느 집단을 찾아 헤매는 일은,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석해서 ‘우리’를 지칭하는 일로도 나아간다. 이곳이라면 상대방과 차이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굳이 상대방을 밀어내면서 ‘나’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를 갖는다는 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신하는 작업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건 가끔은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에 테두리를 씌워주는 작업이다. 외적인 자신에 대한 내적인 동조, 정말로 그뿐이다.


적당히 치고 빠지면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은, 적당한 표지의 소설이나 만화 한 편을 고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사람은 말도 하고 감정도 느끼지만, 매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말만큼 따듯한 게 없다. 그래서 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온갖 매체에서 클리셰로 사용된다. 이런 매체들에서 대개 인물은 “자신을 받아들여 준 사람이나 집단의 위기”를 겪곤 하며, 이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나 집단을 잃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인물이 마음을 놓고 동화되는 곳을 ‘지금-여기’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작중 상황에 대입된다. 관객은 이 이야기 속 세상에 자신이 처음 도착한 이곳에 정을 붙일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여기’는 그 점에서 관객의 이야기 속 고향이 되어주며, 작품에 깊게 이입해서 공감할 만한 요인이 된다. 이런 작품을 보고 나면 소위 말하는 감정적 휴우증을 겪을 확률이 높은데, 어찌 되었든 간에 집을 잃은 기분만큼은 남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신이 있을 곳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왜 ‘우리’라는 단어에 쉽게 자신을 의탁하고 싶어지는지를 잘 설명한다. 이따금 사람들은 자신을 이루는 것들이 모두 허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은 그저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만 단편적으로 인식될 뿐이고, 그런 인간관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게 바로 자신이라고 말이다. 이런 경우, 모든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곳에 ‘나’란 게 무엇이라고 정의할 만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럴 때가 바로 ‘우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때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일은 정확히 이에 부합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게임이 항상 나 자신을 의식하게 한다면, 영화는 항상 한 세계를 의식하게 한다. 게임이 어떤 일이든 간에 플레이어인인 자신과 연결된다면, 영화는 정확히 그 반대다. 영화와 게임의 차이를 생각할 때마다 매번 고민하게 되는 대목이 그렇다. 영화는 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기에 손쉽게 ‘우리’의 범주에 편입될 수 있다. 서로 같은 세계를 산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로서 내적친밀감을 표하고는 한다. 내가 아는 그걸 상대방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우리’로서 대화를 건네고는 한다. 영화에서 부재한 건 ‘나’로서 존재하는 경험이지만 반대로 영화에서 밀려나 있기에 현실의 나가 더 굳건한 존재일 수 있다. 반면 게임은 한 개인의 입장에 따라 체험하는 경험이 다르므로, 게임에서의 ‘우리’는 손쉽게 일반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게임에서의 우리는 그 화면 안쪽에 서서 이를 움직이고, 조작하며 숨 쉬는 한 매체로서의 일개 개인이 된다. 영화가 무언가 같은 일을 목격하고 이를 다르게 서술하는 쪽이라면, 게임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같은 경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외적으로 동일한 외견을 하도록 도와줄 뿐 자신이 뭘 보고 들었는지는 온전히 자기만의 경험과 책임으로만 남겨진다. 그래서인지 도리어 영화보다는 게임 쪽이 ‘나’를 지칭하고 또 소개하기에 알맞은 매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그냥 틀어두기만 해도 알아서 잘 흘러가지만, 게임은 자신이 모든 걸 도맡아서 집행해주어야만 비로소 진행된다는 점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사이버펑크 2077>이라는 게임에는 그런 설정이 있다.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정신적인 타락을 막는다는 간단한 설정. 인간교류가 끊긴 이들이 점점 타락하는 묘사는 어느 매체에도 많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것이 플레이어의 눈과 손으로 직접 체감되기 때문에 유달리 와 닿는다. 가령 이 게임은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여러 기계장치를 인물의 몸에 달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달면 인간성이 사라져버려 ‘사이버사이코’가 된다는 설정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방지하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는가, 즉 ‘소통’이다. 이는 특히 작중에서 인물의 성장재화나 퀘스트 등에 흔히 등장하는 잡몹인 사이버사이코가 한때는 인간의 무리 안에 각자의 사연을 갖고 살아갔던 존재임을 추론케 한다. 동시에 주인공 시점에서는 길고 긴 고통의 사연으로 얼룩져있지만,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주인공 또한 그런저런 무리 중의 한 명에 불과하겠다고 추론케 한다. 결국 게임을 다 하고 나면 플레이어는 한 사회 안에서 자기도 그런저런 개인 중 하나로만 남게 될 뿐이라는 걸 몸소 체감하고야 만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게임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나쁜가? 우스꽝스럽지만 서로 인연 맺은 사람과의 관계와 연결에서 한 인간의 고립과 통증을 경감하는 일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1편에서 감독이 크리스 프랫이 파워스톤을 손에 쥔 장면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과 정확히 같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경험은, 그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이다. ‘우리’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한다. 서로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사연들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들.


재개봉한 영화를 굳이 시간을 내어 보러 가는 일은 극장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왜?”라는 물음을 피해 가기 어렵다. 이미 봤던 건데, 결말을 다 아는데 또 한다고? 비즈니스로 보면 사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처럼 “난 이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그런 놈이 여기에 왜 또 와?”라는 대화를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 우리는 길고 긴 고통의 사연으로 얼룩진 채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저 그런 관객 무리 중의 하나로서 인파에 섞여들지도 모른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경험이 하나로 일반화될 수 없음에도, 관객은 편의상 ‘대중’이라는 문화 용어로 서술되고는 하는데 이런 일이 가끔은 한 의견을 확대해석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한 의견을 대변한다고 말하면 이런 일에 동조하지 않는 반대편이 꼭 나온다. 그저 그런 관객무리로서, ‘우리’로서 뭉틍그려 표현되고만 싶지 않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앞에 나선다. 대개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면서 팬심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는 그저 마을에 불을 질러 또 다른 마을로 이동하고만 싶을 뿐인 화전민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런 와중에 순수하게 영화를 즐기고 싶던 누군가는 자신도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마치 <오징어게임>의 시즌2에서 공유가 보여줬던 빵과 복권의 양자택일처럼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순수하게 이 게임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게 성기훈이든, 오일남이든, 오영일이든 간에 이들이 재개봉한 영화를 다시 보러 왔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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