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곤 한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영화의 서브컬처화”라는 대목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은 뒤로 물러나서 이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선 영화의 서브컬처화의 논조는 다음과 같다. 영화는 이제 시간을 들여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있기를 요구하는 무거운 매체가 아니라, 간편하게 선택할 수 있고 또 즐기기에도 부담 없는 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분류는 학술적으로 고도화되기 힘든, 비교적 가벼운 제시라고 생각된다. 영화의 기본 전제가 90분에서 120분 사이의 영상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양적으로만 봐도 ‘영화’가 갖는 시간의 무게는 남다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과거보다 비교적 가볍다고 여겨지는 것은, 코로나 판데믹 이후 극장이 폐쇄됨에 따라 ‘극장’이 더는 영화로 가는 유일한 입구가 아니게 되어서다. 이전에도 IPTV와 같은 서비스에서 온라인 스트리밍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는 있었지만 여기에 최신 영화는 없었다. 반면 판데믹 시기에는 오프라인으로만 이루어졌던 영화제가 온라인으로 임시 이동해 개최되기도 했으며, A급 영화가 극장이 아닌 OTT에 단독으로 배급됨에 따라 “OTT도 영화와 만나는 주요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대중 사이에 퍼졌다. 이제 영화 산업에서 ‘인터넷’은 영화를 만나는 차선책이 아니게 되었다. 판데믹 이후 영화가 극장에 먼저 개봉되어야만 2차 시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지정했던 몇몇 법률은 일부 국가에서 천천히 효력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리어 극장이 영화에 관한 특수한 경험이 되어버렸고 극장에 간다는 건 자신이 보게 될 그 장면을 위해 오프라인의 현실들을 거쳐 가는 일이 되었다.
현실을 거친다는 건 일종의 「각오」를 뜻한다: 흔히 온라인에서 하루종일 죽치고 있으면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는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초년생 등에 악재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끝이 없고, 갈등이 일어나면 이름을 바꾸거나 계정을 탈퇴하는 식으로 도망쳐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를 보러 다니는 일은 극장이나 영화제 같은 장소로의 방문을 요하므로, 영화를 정당하게 마주한다는 자의식 같은 게 있다. 이때 시네필은 마주하게 될 영화가 그에 수반하는 만큼을 돌려줄 것을 기대한다. 자신이 이만한 예우를 갖추었다면 상대방 또한 마땅히 같은 대우를 해주야만 한다. 시네필은 항상 자신이 마주하게 될 현실을 「각오」해야만 했고, 설사 자신이 보게 된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화를 내거나 하는 식으로 이에 정당한 의견을 표했다. 반면 현실을 거치지 않은 영화관람은 그만큼 가벼운 만남이 되어버려서, 영화가 어떻든 간에 기대치도 한참 낮아진다. 별 기대도 없었으니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어차피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생각해도 된다고 여기면서 별점을 줘버린 채 의견을 뒤집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사회생활 공식이다. 학교라던가 회사라던가 어딘가에 다니게 되면 모두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어서 말을 걸기가 껄끄러운 관계는 분명 있다. 가끔은 연락처와 메신저 양쪽 모두에서 차단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말 성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얼굴을 마주하면서 “사직합니다.”하고 말해야 하는 게 사회생활인 것이다.
여기서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를 가정해볼 수 있다. 현실에서 「각오」할 게 많으니 온라인에서까지 머리아프게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점, 아니면 영화가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 이들이 영화를 마치 온라인의 일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을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꺼내는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무 곳에도 마음을 풀 수 없다면 사람이 골병이 들 것임은 자명하다. 다만 그게 사람인지 아니면 취미와 같은 활동일지가 다를 뿐이다. 반면 후자는 조금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문장이다. 한 편의 영화는 시작과 끝을 갖고서 완결성이 있고, 그 시간 동안에는 별다른 현실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영화가 왜 도피처로 기능했는지를 잘 설명한다. 사람들이 머리 아프거나 우울한 일을 맞닥트렸을 때 잠을 자 버리는 것과 매한가지로, 극장은 내일이 두렵거나 내 일이 되기를 원치 않은 경우에 주로 찾게 되는 곳이었다. 영화사에서 극장은, 육체 노동자가 쉬는 시간에 잠시 찾아와서. 팝콘을 먹거나 웃음을 터트리면서 시끌벅적하게 노는 곳이었다. 극장에 있을 때만큼은 자신을 가둔 바깥의 것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어서, 도리어 ‘극장’이야말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바깥’세계를 대신해 자유를 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에 대한 인식은 그 안과 밖이 서로 전도되어 있다. 영화처럼 살고 싶다는 사람은 영화가 아니라 일상을 돌아보려 한다. 반대로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일상이 아니라 영화에서 힌트를 얻으려 한다. 이들은 서로 자신이 갖지 못한 걸 상대방에게서 찾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시시한 세대론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영화=현실을 마주한다”라는 점에 괄호쳐야할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에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쪽으로 논변이 흐를 우려가 있어서다. 사실 영화란 그들이 보여주는 것을 자신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모종의 합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점에 합의하지 않으면, 영화를 이야기로서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하며 심지어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도 불가하다. 왜냐하면 영화를 영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본 게 영화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 고도의 소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경험이 혼자만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타인과 나누려 하지만, 이미 영화 자체가 하나의 소통이자 경험이다. 영화가 긍정적인 경험만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 사실은 보기 싫은 영화에 평점을 매기는 자신으로서도 아주 잘 체감한다. 정말로 싫은 사람이나 대상이라면 이를 헐뜯거나 나쁜 소리를 하지 않으며, 언급을 피하거나 아니면 말을 접어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영화를 계속 보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일은 매순간을 「각오」하는 일이다. 혹자는 영화를 보는 일이 현실의 반대편에서 이루어진다고도 하지만,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건 도리어 끝이 없는 쪽이 현실이어서다. 도망치면 그만인 곳이 끝이란 게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라면, ‘끝’이 있는 영화 쪽이야말로 비교적 현실에 더 가깝다. 그러니 영화를 보는 일은 현실도피가 아니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온라인의 시네필 커뮤니티는 다음과 같은 말로를 맞는다. 근처에 식당이 없으면 안 먹는 게 아니라, 우선은 배달 앱을 켜서 알아본다,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 자연스레 영화의 소비량도 늘어나게 된다. 그만큼 인생 영화를 찾기도 힘들어져서 영화를 보는 일이 점점 더 심드렁해지고야 마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과적으로는 영화가 자기 삶에서 평범한 무언가로 전락하거나 혹은 더 짧고 재밌는 도파민 덩어리의 무언가로 관심을 옮겨버리게 된다.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점검하면 이런 의견이 얼마나 얇은 태도인지를 알게 되기도 한다. 우선 벤야민을 떠올려보자. 벤야민이 영화를 마술환등에 병치하는 대목은 영화가 현실에 속하지만, 반대로 그런 현실에 포섭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영화는 성냥팔이 소녀의 작은 점등에 비견되어 신기루 같은 공상을 잠시 품어두는 매체로서 풀이된다. 이후 빛이 완전히 꺼지고 나면 소녀의 생명도 다해 더는 현실에 돌아오지 못한다. 이야기는 그대로 끝나버리고야 만다. 이 일을 생각하면 영화는 빛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성냥불을 끝까지 밝힐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 이따금 사람들은 영화가 현실보다 더한 걸 보여준다고 말하면서 영화의 한 장면을 현실에 수입하려 든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던 보험사 CEO 암살 사건을 두고서 대중은 <조커>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불행한 건 우리가 사건을 영화에 빗대기를 그만두고서 냉철하게 현실을 생각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자리를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