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논문 예비 심사란 관객들을 초빙하는 좌담회와도 같다.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볼 수 있고,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다. 나는 포스트시네마에 관한 주제를 선택했는데, 그때 발표회에 와서 들었던 논평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글이 엉망진창입니다. 하지만 쓸 때는 정말 즐겁고 재밌었을 것 같네요.” 일종의 비평이기도 하므로 이 지적은 상처받을 만했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내가 글을 쓸 때 즐겁구나, 하는 점을 타인이 알아봐 주었기 때문이었다. 학술적으로는 그닥이지만 반대로 글을 쓰는 일 자체를 즐긴다는 점이 자신을 생각하는 일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쓰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글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논술적이지도 않구나. 그러니까 “그 누구보다 이성적인 체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감정이 ‘합리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글을 애써 치장해보는 것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웹을 돌아다니면서 타인의 비평문을 읽다 보면 결국 자신이 직관적으로 느낀 것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려는 일을 자주 보게 된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구분 없이 말이다. 개중에 혹자는 답을 정해두고 나머지 발견들을 끼워 맞추는 듯 보이기도 해서 필자의 소신이 드러나는 것도 많았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논리와 구성으로 완성되지 않을 글들이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해, 이렇게 한 사람의 흔적이나 취향이 특정되는 글이야말로 무언가 계속해서 읽고 싶어지는 글이다. 딥러닝으로 산출되는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혹시 모를 인간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기 마련이니까.
김해인 만화편집자의 에세이집 『펀치』를 읽었다. 책을 알게 된 건 씨네21에 올라온 그녀의 글 “나의 그날로 돌아가는 마법”을 읽고 난 후였다. <룩백>에 대해 쓴 이 글은 “역시 후지노 선생님이 만화의 천재에요.”라는 말로 끝난다. 만화를 보면 누구라도 그런 말을 후지노에게 해주고 싶을 것이다. <룩백>은 자신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때 용서의 대상은 다양하다. 어떤 일 앞에서 망설이다가 아예 망쳐버린 자신에 대한 용서, 어린 시절에 친구와 다투었는데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용서 등. 하지만 이미 지난 일들이라면 우리가 이를 ‘감히’ 용서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무언가를 바꾸거나 고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자는 마음가짐 하나면 족하다. 그래서 김해인의 마지막 문장은 후지노가 하는 말이기 전에 대체될 수 없는 자신에 관한 응원처럼 보인다.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현실이므로 이를 어김없이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가끔은 삶의 어느 순간에 나타나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연상하게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거에 묶지는 않는다. 그 점이 우리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생작품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시하거나, 가소롭게도 변한다. 젊어서 하던 덕질이 나이를 먹고 나면 낯뜨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예전만큼 뜨겁게 응원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이를 부정하기보다는 차라리 돌아보며 후회하는 쪽이 더 낫다.
인터넷에서는 <강철의 연금술사> 중 한 장면이 꽤 의미 있게 인용되는 듯하다. 킴블리는 머스탱에게 “네가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봐. 죽음에서 눈을 돌리지 마. 그리고 잊지 마. 그들도 너도 잊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한다. 보편적인 말이지만 자신이 마주한 일을 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이를 제대로 응시한다는 점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문장이다. 혹자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잊지 않는다면 행여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고도 말한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다 잊고서 새 출발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는 애써 잊으려 한다고 해서 잊어지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런 기억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이때 기억은 마들렌 효과 등으로 인해 현재에 불려 올 수도 있다. 이런 일에서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환대하려면,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웃는 얼굴로 서로 헤어지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내가 글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흔적이다. <펀치>는 그 흔적을 생각해보게 한다. 김해인은 한국과 일본의 만화편집부 차이로 편집자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한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에 대해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이 글의 주제에 맞게 하나만 추려보려 한다. 우리는 흔히 ‘함께’라는 무언가를 같이 나누는 일로 여기지만 사실은 서로에 흔적을 남기는 상호소통적인 행위다. 가령 연인들이 서로 헤어지면 서로의 삶에 있는 흔적들을 느끼게 된다. 그 흔적은 내가 주었던 것만큼이나 받았던 것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세상살이란 게 정말로 그렇다. 살아가는 만큼 죽어감을 생각하는 일은 우리가 앞장을 넘기며 뒷장의 복선들을 떠올리는 일과도 같다.
나아가는 것과 퇴보하는 것. 전진과 후진. 작용과 반작용. 리오타르는 반영화를 말하며 영화가 감춰놓은 행복의 순간들에서 반영화를 대입하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가 보기 위해 쓸데없이 성냥을 켤때는 아이는 단지 움직임을 좋아하는 것이다. 차례차례 바뀌는 색채를, 켤 때 정점에 오르는 빛을, 작은 성냥개비의 소멸을, 쉬익 하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차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만화를 볼 때면 왠지 모르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을 보고 들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 일에 비하면 영화나 만화, 게임 등을 하는 건 사치스러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리오타르의 말처럼 무언가에 반하는 일이 무언가에 반(反)하는 일이라면, 기본적으로 ‘나’는 자신이 은연중에 외면하고 싶은 것을 힐끔힐끔 쳐다보게 되는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 남들에 보여주기 부끄러운 은밀한 취향들에 관해서, 윤리적이거나 사회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의 취향으로 속이면서 은밀하게 향유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의 비생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래도 용납할 수 없는 건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법적으로만 문제가 없다면 괜찮지 않을까. 퍼리라던가 BL이나 GL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무엇보다 이런 매체들을 다룰 때 중요한 건 눈을 가리지 않고서 이들을 바르게 마주하는 일이다. 무분별한 수용이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이에 맞설 때, 자아를 갖고 상대와 겨룰 때 비로소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특촬물 <가면라이더> 시리즈 중, 2000년에서 2018년 사이에 새로 출범한 시리즈를 ‘헤이세이 라이더’라고 한다. 연호로서 헤이세이가 1989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이를 ‘밀레니엄 라이더’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지만, 우선은 넘어가도록 하자. 이이다 이치시는 『웹소설의 충격』에서 헤이세이 라이더 시리즈의 인물상을 “악에 준하는 힘을 얻고서 적을 물리치며, 이 과정에서 악에 완전히 잠식될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선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이는 웹소설이 유행하는 2010년대 이후, 레이와에 근접할 무렵의 캐릭터성을 포괄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점이 있다. “선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 우선 레이와의 시작에서 헤이세이를 규정할 때는 헤이세이 말기를 주로 다루게 된다는 점을 전제하자. 2016년에서 2020년 사이 연재되었던 <귀멸의 칼날>이 메가히트작이 된 이후, 2020년에 개봉한 <무한열차편>은 TVA의 극장판으로서는 보기드물게 흥행했다. 흥행의 이유를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역시 답은 간단하다. 상현 혈귀인 아카자가 “혈귀가 되라”고 염주 렌고쿠에 권유할 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싫다”고 답한다. 이 사실은 작중에서 종종 등장하는 “살아남거나, 더 강해지려고 혈귀가 되는” 인물들을 ‘추하게’ 묘사하는 점과 맞물린다. 아카자와 렌고쿠가 싸우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문답은 인간이기를 선택한 렌고쿠의 모습을 혈귀에 대비해 ‘숭고’하게 보이게끔 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부응하는 것은, 렌고쿠의 캐릭터성을 잘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의 염원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본성이 어떤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남는가’이다. 날 때부터 악한 이가 선을 배우고, 본성을 배반해서 끝내 선을 ‘연기’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가 선을 행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가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끝으로 가는 지다.” 어떤 일이든 간에 자기를 관철해서 이를 끝까지 밀고 가는 일은 중요하다. 그게 업무를 할 때이든, 아니면 다른 이에게 용서를 구할 때이든 간에 이를 받아들이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좋았던 일이든, 나빴던 일이든 이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병든 몸을 안고서 백살까지 살아가야 함을 자각하는 서른 살 무렵에 알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항상 균일한 ‘나’로서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다치거나 아프고, 슬프거나 기쁘기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다른 나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2020년대 이후의 매체들에서 ‘선함을 잃지 않는 인간상’이 대두하게 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세간에는 선한 마음으로 기부를 했는데 기부를 맡은 단체가 돈을 마음대로 유용해서 물의를 빚는 경우가 있다. 혹은 좋은 마음으로 장기기증을 했더니 찬밥 대우를 하면서 기증자에 대한 예우를 전혀 해주지 않으면서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두고서는 인터넷 용어로서 ‘인류애’가 사라진다는 말이 사용되는 가운데, 그럼에도 우리가 누군가를 믿기를 포기해버린다면 영화에 대응하는 반영화가 등장할 구석은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선함을 포기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술회전>의 이타도리 류지나 <귀멸의 칼날>의 탄지로처럼, 아니면 <헬싱>이 말하는 것처럼 끝내 인간으로 남아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