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덞째 날에 오르는 여정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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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일과 질서를 찾는 일 사이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우선 질서가 우연성을 최소화하려는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영화 속 세상은 한 번의 기록을 거쳤다는 점에서 더는 우발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은 시간선의 특정 시점에 무조건 벌어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예측할 수 있는 범주에 있다. 어떤 사람은 영화의 이런 점에서 안정감을 찾기도 한다. 모든 게 예상 안에 있다면 무작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깜짝 놀라게 될 것을 미리 각오할 수 있다. 이 일화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가 예측 가능성에 대한 선호임을 추론케 하면서도,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도 부분적으로 예측의 기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오늘날 극장이 폐허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극장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한 현실에 대한 질서를 제공해서다. 모든 것이 정해진 순리대로 돌아가는 세계를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인다는 건, 그 자신의 바깥을 모두 우연으로 칠하고자 하는 일과도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의 일상에 있는 영화 같은 지점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무언가에 의해 발견되기를 원한다는 건 반대로 무언가에 의해 말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각오하기에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려고 각오한다. 오늘날 극장은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자기구속의 교리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속과는 거리를 두면서 자기를 안으로 감금하는 것은, 무작위성을 외부에서 내부로 받아들여 온갖 감각들에 예민하고 명민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만화 <진격의 거인> 중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 벽 안에 갇혀 살던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벽 안을 나서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다른 동료가 난생처음으로 본 바다를 보며 자신들이 갇혀있던 섬 안을 추억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 너머에 적이 있다.” 섬 안에서는 적이 사라졌지만 도리어 섬 밖에 적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섬은 작은 감옥이 된다. 동시에 어딘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감각이 무언가를 해야 함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쪽으로 옮겨간다. 이제 주인공이 느끼는 건 해방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만화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래를 부여받은 주인공이 그런 미래에 사로잡히는 일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구상한 세계가 타인의 세계에 오염되는 일을 묘사한다. 처음에 만화가 다루는 바깥의 의미는 내부의 적이 없는 세계 즉 가장자리에 이르기까지 팽창한 세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세계의 가장자리에 다다르고 나면 자신이 기억해낸 미래의 기억에 의해 그 세계는 파열을 겪는다. 그 기억 안에서는 도리어 바깥이 세계의 내부이고 자신들의 섬이 세계의 바깥이다. 그렇다면 이 기억을 물려받은 주인공에게 진정한 적은 과연 누구일까? 이를 설명하는 일에 내부와 바깥, 안과 밖을 구분하는 건 사실상 무의미한 일일 테다. 주인공의 몸은 미래와 과거과 만나는 곳이 되었고, 이 위상에서는 진보와 퇴보 모두 정확히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그게 설사 타의에 의한 것이어도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곳에서는 폐허에서의 무한한 해방과 탈주만이 선을 그릴 뿐이다.


거대한 벽이 되어버린 평양은 이름만을 계승한 채, 그 자신의 과거와는 완전히 동떨어져있다. 태평양 전쟁보다 더 많은 폭탄이 투하되었던 평양은 문자 그대로 평탄화됐다. 그 결과 평양은 계획도시로 재구획되었으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건 단지 평양이라는 지리적 공간뿐이다. 이제 이곳에는 어떠한 역사도 영광도 없다. 현대 ‘평양’은 남겨진 유산을 갖고서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에 가깝다. 평양은 사람들의 인식 안에 자리 잡아온 관습에 의존함으로써 그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평양은 외부에 있는 인식을 두고서 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 공간에 문자를 부여하는 쪽이 역사와 영광을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해볼 만한 논점이 있다. 외부에 있는 것을 닮으려 하는 것도 그에 대한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있는 지다. 가령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타인을 돕는 일에서 기쁨을 얻는 게 아니라, 선행을 하는 자기 모습을 사랑해서 선행을 베푼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으로 선행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한 공간을 점유하는 일에 실질적인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역사 안에서 특정 지명이 주는 상징성이 있기에 그 땅을 점유하고 싶은 것 뿐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공간은 지리가 아니라 언어와 관습 안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는가. 이 경우, 평양은 그게 ‘평양’ 아니라 문자열 X라 하더라도 별 상관없다. 이 X는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행동에 옮기기 데 필요한 기계 관절의 부속품에 가깝다. 한 운동을 다른 운동으로 잇는 기계장치, 그게 바로 폐허다.


공학은 사물이나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도 결과만으로 이를 응용하고는 한다. 마찬가지로 선행은 이러한 행동을 하기까지의 원인보다 그에 따른 결과를 살펴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세금을 공제받을 목적으로 기부를 하면 그건 착한 일이 아니게 되는 걸까? 대개 기부행위에서 사람들이 얻는 것은 자신이 착한 일을 했다는 마음과 그에 따른 안정감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타인에 호혜적인 행동을 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소위 ‘도의적’이라는 말이 법적 의무와 사회적 실례 사이에 자리 잡으면서 실질 운동과 사고 운동 사이를 맺는다. 오늘날 폐허는 이와 같은 기술 흐름을 따라 사람들의 인식을 현대적으로 재배치하는 효과가 있다. 현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법한 것들을 문맥에 맞게 배치하는 것은, 오늘날의 폐허가 갖는 기능이다. 우선 폐허는 자신에 속해있지 않은 것을 바깥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바깥세계를 현존하는 세계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폐허는 겉마음과 속마음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상황에서 주체를 이질감 없이 재배치한다. 가령 오늘날 극장의 개념은 모두가 한 자리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상징성만이 남아, 특정한 구성이 아니라 관습을 가리키는 쪽에 더 가깝고 큰 틀에서 보면 영화를 말하기 위한 개념적 기계장치에 가깝다. 관객은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자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음을 인식하며, 여기서 ‘인식’은 그곳 세계 안에 소속되어 있음에 따른 현실인식이 아니다. 이른바 ‘극장’은 설 곳 없는 폐허에 보내는 우리의 도의적인 태도에 가깝다.


사람들이 각자 마주하는 영화는 다르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다르며 각자가 처한 현실도 다르다. 폐허는 두 현실이 한 자리에 있지만 상호 간에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안이나 밖, 둘 중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이때 폐허는 한 현실 안에 속해있지만 자신의 현실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타력으로만 유지된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쓰인 문자가 문자의 쓰임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듯, 폐허는 한 세계를 서술하는 문자가 될 지언정 그 안에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바꾸어 말해 폐허는 현실 안에 존재하는 실재로 기능하면서 우리 자신을 어느 미래로 나아가게끔 한다. 폐허는 안과 밖의 만남에서 의미작용을 끌어내면서 사람들이 그 의미에 관하도록 만남의 규칙을 설계하는 일에 주력한다. 그는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물을 것인지를 고민한다. 누군가에게 극장은 그저 과거와 같은 모습만을 하고 있을 뿐 예전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일 테다. 시네필은 극장이 주는 상징성 때문에 여전히 극장의 경험을 선호하기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바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바깥에서 의미를 연장했다. 그럼에도 살아갈 것을 명령하는 건 영화만이 지닌 풀려남과 깨어남의 감각 그 회귀와 탈주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관객은 극장이라는 가상의 폐허를 통해 안과 밖의 운동을 실리적으로 연결한다. 우리가 자신의 외부를 믿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극장은 우리가 그런 마음들을 전하고자 고안된 바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장은, 마음을 어떻게 하면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극장이 관념적인 형태로 변형됨에 따라 남은 것은 영화가 지닌 바깥의 기능이다. 관객으로서 한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개인은 극장을 하나의 폐허 삼아 해방된다. 영화를 보는 일에는 도피와 대피의 기능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것들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이전의 자신과 연결고리를 놓지 않아야만 한다는 전제를 지켜야만 한다. 이를테면 안과 밖을 뒤집었을 때는 기존에 내면에 있던 게 드넓은 외부가 되며, 반대로 외부는 자신의 내면을 구성하는 벽이 된다. 이 운동 축에서는 자신이 계속해서 존재해야만 하며 방위를 위해 감각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명백히 실존해야만 한다. 해방감을 느끼는 일은 우리가 내부를 파열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외부를 내면에 가두어두는 일이기도 하므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고민하면서 이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한번 폐허가 된 것은 자아가 어디로든 갈 수 있게 타력주행에 유리한 상태가 된다. 영화를 언어로 변환하려는 시도는 그 스펙터클이 한 세계를 해방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벽을 헤집어놓는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우리는 언어가 자신의 감정을 견인한다고 여기고는 하나, 그 언어에 의해 자신의 감정이 타력으로 주행할 뿐은 아닌지를 한번 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력주행이 과연 미래를 향한 진보로 일컬어질 수 있을까? 언어는 우리가 다시금 살아가는 현실로 돌아오기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외계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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