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창작하고 표현하는 일은 창작자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들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현실에서 겪어보지 못한 일은 꿈에 등장하지 않는다. 선천적 시각 장애인의 꿈은 이미지가 아닌 추상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일화는 눈에 보이는 만큼의 지평이 곧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 영역이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는 것처럼, 무언가를 표현하려면 그만한 입력 값이 있어야 한다. 결국 창작자가 뭔가를 잘 만들려면 최대한 많은 걸 보고 들으면서 배워야 한다. 어떤 점에서는 여행의 의미와도 비슷한 것 같다. 대개 어른들이 젊은 사람에게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을 다녀봐라.”는 점이니 말이다. 이는 젊었을 때가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쉬우므로 나이가 들기 전에 많은 것을 보고 들으라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젊어서 저축해놓았던 경험들을 갖고서만 생활하게 되니, 젊어서 이를 최대한 비축해놓을 필요가 있다. 헌데 그렇다면, 영화는 경험을 대체할 수 있을까? 방 안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세상을 경험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젊은 사람이 영화를 보며 세상을 보는 식견을 키우는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어디까지나 유사경험일 뿐이다. 영화를 보며 얻은 경험은 창작자가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에 있어 유사체만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즉 영화를 보는 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시네필이기를 지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사 경험이 입력된 자아는 결국 유사 세계에 살게 된다. 시네필이기를 자청할수록 세상과 동떨어진 무언가가 될 뿐이라면 차라리 시네필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더 낫다. 시네필을 힙스터로 분류하는 세간의 우스운 유머가 있기도 하다. 이 유머는 독서, 포스트락, 누벨바그를 ‘힙스터 3대장’으로 지칭하면서 이 카테고리 군에 속한 이를 ‘불통’이면서, ‘괴이’한 무언가로 본다. 이 분류는 크게 보았을 때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흐름을 읽지 못해,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한국에서 시네필 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인식은 과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들 한다. (특정) 영화를 보기 힘든 특수한 환경에서는 자기만이 아는, 해외의 모 연구서에 언급된 영화들을 알음알음 구해보는 게 하나의 권력적 지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필름들에는 광주에서 외신기자가 촬영한 필름이 포함되었고, 군부정권 동안에 이 필름을 보는 일은 대외적으로 지켜야 할 비밀이 됨으로써 시네필 집단은 은밀한 비밀결사로도 기능했다. 이 사례를 점검하면 영화가 정말로 유사 현실이기만 한 것인지를 다시금 재고해보게 된다. 브라운관에 있는 낡은 화면은 사람들이 차라리 ‘유사’였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은 무언가를 보여줬다. 화면 안에 있는 게 진짜 세계라면, 반대로 우리가 있는 이곳이 ‘유사’인 것은 아닌지도 자문하게 했다. 영화는 그들이 ‘무언가’를 깨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지루하게 들어왔던 시네필론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묻고 싶은 건 바로 ‘유사’에 관해서다. SF 장르의 작품군에서 유사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다가, 진상이 밝혀지고 나서 충격받는 플롯이 꽤 많다. <매트릭스>처럼 아예 다른 세상에 깨어나는 때도 있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 때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이 외부에서 생성되어 주입된 ‘유사’임에도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구 형태의 건축물 안에서 형성되는 기억이 외부 세계에서 만들어진 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구 형태의 감압실에 있는 꿈제작자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 감압실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그녀에게 세계는 스크린을 통해 대체된 무언가에 불과하다. 그녀는 항상 한 세계 안에 대리자로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 유사는 그녀가 유사 경험을 만드는 일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한 존재가 엿볼 수 있는 세계의 지평선을 따라 만들어진 이 기억들을 외부의 레플리칸트들이 주입받는다. 이에 따라, 이 영화에서 기억은 유사 세계에서 제작된 유사와도 같으며 이는 영화를 통해 세계를 엿보는 경험과도 같다. 유사를 지탱하는 것은 화면 밖의 프레임, 현실이다. 자신을 비교할 형식이 없다면 유사는 얼마든지 진짜가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꿈은 현실의 비교군으로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영화의 주연인 레플리칸트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주입된 유사 경험들이 그저 영화에만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이를 끌어안고 살기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종 능력 중 하나가 자신이 아닌 것에도 자신을 이입하는 일이라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하다. 반려동물에서부터, 돌멩이와 같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대상에 애착을 지니며 영화 또한 그렇다. 영화를 우리 현실이 품고 있는 무언가로 착각하는 것, 이들은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마치 자신의 현실처럼 여긴다. 이들에게 영화는 현실과의 동반자 관계이며,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없는 반려 관계다. 특히 유사만이 유일한 판본으로 이 세계에 남아있다면, 우리는 이를 원본으로 여길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한 감정을 재현하는 회로가 영화에서만 발견된다면, 그 감정을 보고 듣는 일은 전적으로 영화에 관한다. 하지만 그게 현실에는 없고 유사 체험에서만 발견된다고 해서 감정까지 유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화성성곽처럼 설계도를 통해 재건축된 경우가 있다. 화성성곽은 성곽의 설계와 그 건축과정이 기록으로 남아있기에 이를 현대에 그대로 따라 만든 게 문화재로 인정된 사례다. 여기서 문화재로서 원본은 화성성곽의 설계과정이 담긴 의궤이며, 화성성곽이 모종의 사건으로 유실된다 한들 그것은 기록으로서 재현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바꾸어 말해, 감정이 재현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영화다.
현실과 영화의 관계는 정확히 이것과 같다. 영화가 현실을 따라 설계된 유사 경험일 뿐이라 한들 그게 유사 경험을 부정해야 할 근거는 될 수 없다. 경험이 재현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유사다. 현실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다 희망찬 무언가를 더 많이 보고 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실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어서만이 아니라, 그런 것들과 서로 관계하며 유사가 우리와는 서로 다른 객체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나 해러웨이의 말을 빌린다면, “길들인 이론과 철학을 영화 분석 도구로 만드는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시네필의 투사와는 반대로, 영화는 인간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영화는 투사 대상도, 의도를 구현한 물체도, 다른 무언가의 텔로스도 아니다. 영화는 영화다. 즉, 인간과 의무적이고 구성적이며 역사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를 맺는 종이다.” 오히려 영화는 현실과 유사 관계에 있어 현실이 될 수 없는 무언가인 게 아니라, 현실에 침범되지 않는 고유의 영역이 있고, 이를 인정하며 협업할 때 비로소 건실한 관계가 된다고 말해두고 싶다. 영화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항상 현실에 관한다. 이 단순한 명제는 현실과 영화가 서로 다른 종에 속해있음에도 결국에 동일한 환경에 있다면 비슷한 형태로 수렴진화하게 될 것임을 추론케 한다. 영화를 보는 일은 유사 경험을 진짜처럼 여기고 살아가며 자기를 속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한 세계에 속해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여행은 자신과 아무런 연결도 없는 공간을 방문하기에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선물한다고들 한다. 모든 연결이 끊긴 자리에서 그 자신이 내면으로 연결되는 일은 여태껏 살아왔던 삶이 유사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이는 낯선 장소에 놓인 자신이 하나의 객체로서 발견되는 일이다. 자신이 보고 들으며 감각하는 것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여행의 역할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들으며 ‘무언가’를 느끼는 건 관객의 현실에 따라 결정된다. 관객이 영화에서 느낀 건 현실에서도 분명 존재하는 경험이다.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건 꿈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게 현실에도 동일하게 존재했던 경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영화가 말하려는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한 개인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경험이다. 영화가 꿈에 가깝다면, 그 꿈은 현실의 흔적으로 재구성된 목격담이다. 유사 경험인 영화는 설사 그게 자신의 세계에서 비롯된 게 아니더라도 그 경험 안에서 자기 세계의 ‘무언가’를 일깨운다. 영화는 한 세계가 네모난 모양이라고 말하기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고 말한다. 물론 화면 밖의 프레임이 네모난 모양이라고 해서, 꼭 자신을 그 네모 모양으로 맞춰야만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곳을 갈 수 없는 세계로 지칭하는 것만큼이나, 그들 또한 우리 세계를 ‘넘어올 수 없는 곳’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미래 없는 발명품으로 규정했던 일을 따르면 영화는 결국 결말이 정해져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먼저 마주할 뿐인, 과거의 한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가 유사라면, 그 과거의 한때를 떠올리는 일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애착을 보낸다는 점에서 영화가 한 현실에 있을 수 있는 반례로 여기는 것일 테다. 이 일은 “자신이 아닌 것”이라는 점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자신을 대리해 대신 의견을 표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는 불리한 입장을 더 원활하게 수행하는 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혹자는 이 일을 두고서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는 것마저 영화에 맡겨버렸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전화를 하거나 대면해서 의사를 표현하는 일을 꺼린 채, 문자를 남기거나 잠적하는 식으로 감정을 회피한다. SNS나 커뮤니티 등에서 화면 너머에 있을 상대방에 감정을 투사하지 않는다. 영화가 현실을 닮은 무언가일 수 있다는 가정이 아니라, 영화가 현실의 옛 한때를 보여준다고 여긴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 이들 의견에 무언가 옳다고 할만한 정답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서만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보는 일이 영화가 곧 자기 세계의 전부가 된다는 말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만나고 헤어지기, 다가서며 멀어지기. 영화는 우리와 같은 종이 아니라서 도리어 인간이라는 한 종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기에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현실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