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확인했다는 안도감만이 남을 뿐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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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과거로부터 시작해 모든 시간대를 잠식하려 드는 강력한 존재다. 과거에 위치하는 ‘영화’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자 현재를 위한 행동강령이다. 영화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갱신한 사례를, 혹은 갱신하려다 실패한 비극적 시도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나’는 바로 그런 영화를 읽고 인식하는 사후적 존재다.”


강덕구는 『한 움큼의 멜랑콜리 』에서 작가들에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로 김수환의 『책에 따라 살기』를 언급한다. 러시아 문학의 이원론적 모델이 삶과 죽음이며, 이 사이를 다루는 일이 잘 없었는데 이를 한국 문학(예술)계에 빗대어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p.162). 러시아에서 예술은 현실을 재건하는 역할을 맡았고 반대로 현실 또한 그런 예술에 귀속되었다. 우리가 예술과 인생 사이의 중간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강덕구는 정지돈의 소설이 ‘책’이라는 중간 매개를 통해 저자에 의한 ‘전지적 작가 시점’을 달성한다고 믿는다. 다른 한편 권구윤은 한국의 요즘이 “영웅과 위기, 두 가지 절차의 페제”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원론적 모델에서 벗어나자는 이 문장은 영웅과 위기를 함께 다루는 면에서 강덕구의 책을 바라본다. 영웅은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다. 반대로 위기의 순간은 영웅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영웅이 위기를 재건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위기 또한 그런 영웅에 귀속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사람의 생일 전날인 1월 20일은 도날드 트럼프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는 날로, 트럼프의 당선 사례는 그가 여러 종류의 위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떤 종류의 위기가 그를 현실로 이끈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강덕구는 어떤 것이 상대를 귀속하는 구조가 아니라, 다시 그에서 출발하는 일로서 바라보자고 말한다. “영화라는 구시대의 유물이 생의 끝에 다다르고 있다. (…) 영웅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20세기 말에 (…) 미래를 예지하는 시선을 빚졌다.”(p.149)


이에 호응하는 것은 “나는 글쓰기가 현실을 확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당도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강덕구의 주장이다(p.193). 그는 “언젠가는 이야기의 공간을 규정하는 전지적 시점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작가가 곧 이원론적 세계를 설명하는 ‘전지적 매체’가 되는 일에 반대의사를 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술 같은 예술 작품을 닮게 된 현실 속에 갇히는데, (…) 우리는 미술관을 영원히 헤매는 관객 또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 살 수 없다. ‘실제’ 우리에겐 돌아갈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p.158). 많은 경우 영화는 관객에게 현실로 돌아가기를 명령하면서 영화 속 세계는 결국 한 개인의 집이나 안식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는 영웅이나 위기, 둘 중 무엇으로도 기능할 수 없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처럼 그저 사라지는 것으로만 세상에 존립한다. 그러나 클린트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영웅이나 위기, 이원론적 모델에서 벗어나는 일이 작금의 우리에게 필요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이를테면 강덕구는 20세기 미국의 영화 작가들에 관해 서술하면서 샤론 테이트 사건을 다룬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언급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바랐던 ‘소망’을 성취하는 건 바로 ‘영화’라는 이 외설적인 사실을 타란티노의 영화는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역사를 배반하는 결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머릿속으로 스토리를 구상할 때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잘됐네, 그녀를 구했어, 끝났어.’ (…) 당신이 깨달아야 할 것은 그 말줄임표입니다. 그녀는 구제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p.143)


질문 하나. 그래서 영화는 샤론 테이트를 구했나? 우리는 샤론 테이트를 구할 수 없었다. 영화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허구로 보았다면 샤론은 영화를 통해서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이 이원론적 세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깨닫는 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간명한 사실 탓이다. 이런 뜻에서 “허구의 승리가 공고한 ‘현실’의 존재를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다”(ibid.)고 보는 강덕구의 말은 탈출구로서의 현실의 지위를 공공연히 한다.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걸 넘어 그 안에 있는 에너지를 증폭한다. 그렇게 증폭되는 허구는 현실을 물들이고 현실 전체를 허구화하는데, 이렇게 물든-허구화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p.141) 이는 현실의 탈출구로서 영화를 지정하는 일이나, 영화를 현실에 대한 예비책으로 고려하는 일이 결국에는 모두 헛수고에 불과할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금 강덕구의 말로 돌아가면, “나는 허구가 현실을 확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당도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가 인용하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창작자들은 이것이 ‘허구’라는 점, 그러니까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 작위성이 내재해 있음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스미는 영화에서 ‘수직 운동’등을 모사하려는 카메라 움직임을 시니시즘(냉소주의)라고 부른다.”(p.107) 요약하면, “영화는 자신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이를 진짜처럼 내보여야 하는 것에 환멸감을 느꼈다.” 바로 이 주장이 강덕구가 20세기 미국을 말하는 영화들에 적용되면서 실패와 패배의 담론을 이룬다.


강덕구는 제임스 그레이의 <리코리쉬 피자>를 언급하면서, 영화 속 인물 모두가 실패한 결말을 보여주는 일을 지적한다. 이 언급은 영화에 관한 비평은 아니지만, 적어도 실패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줬던 타란티노의 샤론 테이트 건과 비교해 보았을 때 유의미한 지점 하나를 남긴다. “근본적으로 내러티브란 시작점에서 수수께끼를 내고, 마지막에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게임이다. 따라서 이야기 속 공간은 문제가 주어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 일련의 과정에서 움튼다고 할 수 있다.”(p.171) 영화에서 말하는 실패는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실패와 동의어가 아니다. 그 실패는 우리가 내러티브의 일환으로 즐길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며, 도리어 영화가 산출하는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영화 안에 서 있을 수 있는, 존립가능한 내적 지위를 대변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진정한 실패는 관객이 이곳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 즉 ‘있을 곳이 없다’며 어딘가로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다. “제발트 소설이 구사하는 어지러운 시제는 우리가 내러티브 경제에서 확고히 약속받은 ‘끝’이라는 보상을 주지 않는다. 독자는 어리둥절한 채로 여행의 도착지가 실은 도착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우리가 안갯속에서 맴돌고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p.172) 영화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이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끝낼 수 없을 때다. 일단 시작되어버린 세계가 계속해서 끝을 향해 달려가야만 함을 줄곧 응시해야만 하는 경험은, 이야기를 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이야기에 의해 삼켜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강덕구의 이 문장을 들으며 떠올린 건 최근 리메이크 출시된 게임 <사일런트 힐 2>(2024)였다. 워낙 오래된 게임이니 이야기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지만, 그래도 일단은 적어둔다. 1) 남자는 죽은 아내에게서 자신을 만나러 와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2) 남자는 안개로 자욱한 사일런트 힐에 찾아가 길을 헤매다가 끝내 아내와 조우한다. 3) 사실 아내는 남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내가 암환자였고, 간병에 지쳐가는 상황에서 서로 히스테릭하게 변해가는 모습들이 핍진성이 있어서 유독 와 닿았던 이야기다.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말기 암 환자인 그녀 앞에서, 병증에 있는 환자가 히스테릭하게 변해가는 일과 억대의 병원비를 감당하는 일 모두가 겹치면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일런트 힐2>은 아마도 무엇이 끝인지를 잘 아는 상황에서, 그게 오기까지를 명확히 기억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남자는 말기 암 환자인 아내가 언젠가, 아니 곧 죽을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분노에 차서, 그녀를 스스로 목 졸라 죽였다는 사실이 자신이 약속받은 ‘끝’을 보답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현실에 있을 자리가 없고, 남은 건 사일런트 힐에 가서 자신의 내면세계-죄책감을 마주하는 일뿐이다. 아마 그에게 사일런트 힐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사일런트 힐은 그가 도망쳐온 곳일까, 아니면 그에게 편안함을 안겨다 줄 안식처였을까.


강덕구가 영화에서 말하는 냉소주의란 정확히 이것과 같다. “불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앞으로 도래할 어떤 것이 가져올 효과에 대한 복합적 대응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p.208) 영화에서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영화가 도리어 불안이거나 불안으로 가득한 세계로 여겨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사일런트 힐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사실은 불안이 아니라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특정 사건 이후의 시간 (…) 그런 순간들은 우리가 임시로 변통한, 즉 유보한 시간 속에서 느끼는 저주이자 축복이다.”(p.235)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영화는 그 자신의 실패를 겪는 게 아니라, 사실은 관객이 어떤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계속해서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안과 밖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숨기려 든다면 이 과정에서 드는 암시는 서브리미널 효과이기도 하다. 서브리미널 효과는 프레임 사이에 아주 작은 한 컷을 숨겨두면 그 컷이 보는 이의 무의식에 남아 일종의 ‘암시’로 변형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만약 한 개인의 삶이 영화보다 훨씬 더 길고 영원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는 개인에게 무의식적인 ‘암시’를 전달하는 매체일 테다. 이는 특히 강덕구의 지적대로, 오늘날의 영화 담론이 ‘영화’가 산산조각 났음을 강조한다면 그렇게 산산조각 난 것들 사이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암시하는 포스트 시네마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p.240). 만약 영화가 환영이라면, 그건 자신을 이루는 것 중 무언가가 변했다는 걸 은연중에 말해주는 ‘고지’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이다.


다시금 하스미의 논의로 돌아가면 우리는 영화에서 프레임은 끊임없이 외부를 발산하는 공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외부들을 자연스럽게 속이는 건, 이 세계의 바깥이 불안으로 가득하니까 ‘끝’을 응시하지 말고 유보한 시간 속에 살라는 뜻이다. 만약 영화가 기득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면, 외부는 생각하지 말고 계속해서 내부만이 영속하는 듯 여기라고 관객을 통제하는 쪽에 가깝다. 이 주장에서 ‘바깥’이 없다는 말은 ‘대안’이 없다는 말로 탈바꿈한다. 영화 아니면 현실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가 현실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았던 러시아식 예술체계에만 머무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게 한다. 이를 <사일런트 힐2>의 내러티브에 빗댄다면, “영화의 프레임은 그들이 주거하는 집이다 (…) 윈슬로와 토머스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다.”(p.248) 문은 분명 안과 밖 모두로 통하는 장치임에도 문을 보면서 이를 별개의 세계로 여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문이 어딘가로 통한다고 여기면서 그게 마치 프레임의 ‘바깥’을 암시할 것처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따금 인터넷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현실의 사건을 마치 영화처럼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영화는 “현실의 원칙을 따르지 않아도 성립되는 ‘믿음’의 공간”(p.260)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 뉴스보도와 같은 작은 단서들이 실제로 제시되고 나면,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이 믿고 있던 이 비극은 거짓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건 프레임에 씌워진 화면 속 사건이 아니라 그냥 정말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정말로 그뿐입니다.”


영화가 자연발생했다는 말처럼 무섭게 들리는 이야기가 또 없다. 그건 마치 영화가 현실의 원칙과는 별반 상관없이 발생했다는 말처럼 들리니까. “기묘하고 변화무쌍한 세계가 초월자의 의도 없이 생겨났다는 단언이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공포로 밀어넣는다(pp.250-251). 만약 영화가 진짜처럼 보이는 허구라면, 사람들이 그런 사건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서로 연결된 꿈’을 자유롭게 오가는 독자의 모습은 여러 통로로 연결된 인터넷을 서핑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p.184) 따라서 “영화사의 지층을 돌파해야 하는 이 영화들은 영화 바깥을 소환해야 하고, 관객의 인지 능력을 무화해야 한다.”(p.252) 이 사건을 두고서 교훈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평소 마음속에 있던 것을 증폭하는 매개체로 사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부정적인 것이든 좋은 것이든 간에 이런 마음들은 말을 꺼낼 계기가 없으면 쉽게 공론화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마치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자신의 마음을 꺼내려면 다른 것을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강덕구는 “이곳에는 탈출구가 없고, 대안이 없으며, 단지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안도감만이 남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가 거짓말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넌 여기 머물지 않는 게 나아.”(p.284)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 (…) 영웅과 배신자는 자신들이 곧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황무지를 향해 걷는다.”(p.283) 다시 말해서 영화는 탈출구도 아니고, 대안도 아니며, 그냥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식으로만 포획되는 현실의 한 이미지 조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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