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안녕”

by 수차미
SE-73c9c44b-d101-11ef-9fbf-cb77cf426555.jpg?type=w966

“에리 넌 흡혈귀인데, 왜 태양 아래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만화의 후반, 유우타가 에리에게 묻는 이 말은 아무쪼록 극장의 어둠을 생각하게 한다. 에리는 앉은 자리에서 영화를 9시간이나 볼 정도로 영화광이다. 그녀가 영화를 보는 곳은 어느 폐허의 컴컴한 어둠 속인데 이는 그녀가 흡혈귀라는 점에 대한 복선이 된다. 흡혈귀는 태양 아래에서 살 수 없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런데 유우타의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태양을 버틸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영화를 보는 건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은 200년마다 정신이 죽고 새로 태어난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한 세계를 진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에리의 의식이 감당할 수 있는 세계엔 한계가 있으며, 그렇기에 주기적으로 재부팅을 해주어야만 하는 상태다. 이 점에서 에리의 모습은 영화와 닮았다. 한 영화가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은 주어진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지닌 상영시간의 무게는 깊어서, 이를 감내하려면 여러 번 돌려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시네필은 흡혈귀와 같은 족속이라 할 수 있겠다. 에리가 유우타에게 영화를 찍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유우타에게 삶을 알려주겠다는 말과도 같아서 두 사람은 영화를 찍기 위해 일상을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두 사람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보고, 듣고, 체험한다. 여기서 세계는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기보다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 한 세계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건, 말 그대로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와도 같았다. 영화의 모든 면을 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관람하게 된다면, 에리에게 삶 또한 그랬을 것이다. 재밌거나 소중한 것만 간직하기에도 짧은 시간인데, 그 모든 걸 기억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대개 사람들은 무언가를 부단히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므로 에리의 말은 사람들의 반발을 산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고(<너의 이름은>), 잊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이에 대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답은 간명하다. 그런 것을 꼭 잊기보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잊힌다고 보는 쪽이다. 만화의 다음 장을 보려면 이전 장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어야 하듯 인생의 다음 장은 우리가 과거를 지나쳐야만 가능하다. 그것들을 꼭 ‘잊어야 한다’고 보는 건 아니지만, <에리>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여기서 만화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만화의 후반, 중년의 유우타는 가족을 잃어 살아갈 의지를 잃은 남성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택하기 전, 에리를 추억하고자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에 간다. 폐허가 된 현실을 정글처럼 지나고 나면 그곳에는 예전처럼 그녀가 있다.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던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의 유우타에게 묻는다. “나는 당신의 영화가 좋았다”고, 왜냐하면 그 안에서는 항상 자신이 진실하게 믿는 사실들이 있었으니까. 에리는 학창시절에 만든 유우타의 첫 영화가 폭발이라는 판타지로 끝났기에 무척 좋았다고 말한다. 에리는 현실에서는 어머니가 유우타를 학대했지만, 영화에서만큼은 아름답게만 남았기에 도리어 그와 같은 판타지가 결말로서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끝은 그녀 자신의 삶처럼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처럼, 대미를 장식하는 폭발은 기억으로서 영화 매체의 본질적인 한계를 고백한다.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잊거나, 잊힐 권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고. 바꾸어 말해 영화는 현실을 잊거나 혹은 잊게 할 수 없다고.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항상 어떠한 형태로의 폭발을 경험하고야 만다.


일본의 예술가 오카모토 타로는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전설적인 말을 남겼다. 다른 한편 유리 로트만은 『문화와 폭발』에서 문화의 가능성은 예측불가능성에 있다는 말을 남긴다. 두 말을 종합해서 ‘폭발’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폭발은 예측할 수 없음에 ‘예측’을 산출하는 역할을 한다. 무언가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이에 대비하게 하는 성격으로서의 예측이 아니라, 무언가를 마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를 산출해보려는 잉여적 산물 말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결국 이 말이 전하려는 건 간단하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지만 그것들이 모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여러 가정을 해보지만, 노력이 애석하게도 이것들은 모두 “그럼,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네요?”라는 말로 되돌아올 뿐이다. 타이슨의 표현을 인용한다면,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맞기 전까지는.” 영화를 많이 보면 대강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영화를 직접 살아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특정한 종류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관객은 영화의 한 순간이 어떨지를 대강이나마 예측하지만, 어떠한 순간을 마주하고 난 뒤에 따라오는 후폭풍까지는 예견하지 못한다. 신파 섞인 영화를 보며 울지 않을 거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솔직함이 감정을 이기기도 전에 그 안을 영화가 따라붙는다. 영화는 우리가 남긴 감정을 여분으로 만들면서 이를 저축하거나, 낭비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예술은 이와 같은 잉여를 두고서 작업하는 산물이며 이때의 재현은 외견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폭발은 후회의 다른 판본이다. 끝을 예감해서 모든 걸 폭파하는 게 아니라, 끝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저 모든 것을 폭파해버린다.


유우타가 자신의 어머니를 아름답게 묘사했던 첫 작품은 폭발로 끝난다. 유우타의 작품이 상영되었던 대강당에서 친구들은 좋지 않은 표정을 한다. 유우타의 담임이 그를 조용히 불러내어 “왜 부모님을 그렇게 욕보이게 했는지”를 묻는다. 이에 유우타는 “무엇이 현실이었는지를 잘 몰라서 그랬다”고 답한다. 유우타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만큼은 유우타를 학대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던 순간들”로서 유우타의 어머니를 기억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화는 이 대목에서 오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아버지 스스로도 기억을 감내할 수 없어 이를 재부팅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우타의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영화과 비춘 현실의 한 면에 불과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유우타의 영화를 보면서 꽤 충격받았을 것이다. 이 폭발은 아버지가 기억하던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여분으로 남겼을 테다. 이제, 폭발은 현실의 비련함을 밀어내고서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는 미래로 데려간다. 그 방법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예측가능한 부류의 슬픔을 뒤로하는 일이다. 그래서 에리를 만난 유우타는 자살할 마음을 접고서, 어머니를 영화에 가두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어머니를 영화에 남기려면, 도리어 폭발해야 하는 쪽은 현실이다. 그러나 폭발의 순간을 감당하려면 재부팅 이후에서도 여전히 자신이기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에리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하면서 유우타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이 장면을 놓고 보면 영화가 폭발로 마무리되는 것은 반대로 폭발을 오롯이 감내하는 것처럼 보인다. 삶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네비게이션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게 바로 영화다.


에리가 유우타에 표한 감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영화를 끊어낼 용기가 없는 자신에 관한다. 이를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폭발’을 이에 견주어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티브이 드라마 <야인시대>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인터넷 밈에서는 이야기를 나름 진지하게 꾸려나가다가, 마지막에 ‘폭발’을 삽입하는 일이 인기를 끌고는 했다. 해당 밈에서의 관행이 되어버린 이 폭발은 작품이 다루는 게 무엇이든 간에 항상 마지막을 ‘폭발’로 끝내야 한다는 점에서 ‘끝’을 알리는 지시표가 되었다. 악보와 마찬가지로, 이 밈의 타임라인을 작성할 때는 항상 ‘폭발’이 끝을 알리는 지시표가 됐다. 어영부영 흥미 위주로 영상을 편집하다가 무책임하게 마무리해버리는 이 폭발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버리면 그곳엔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는다. 영화가 그 모든 걸 안고 가버리면 그걸 감내해야 하는 쪽에도, 그걸 기억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안아 들 수 없는 관객 모두에 이득이다. 그러나 한 영화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받아드는 건 그 누구의 현실도 되고 싶지 않아서다. 여전히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몫이며, 무언가를 보고 듣는 일은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무게다. 유우타가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친구들에게 얻은 비판은 유우타에게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현실적이지 않으니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리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현실이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별 이상할 게 없다. 이때 에리는 유우타에게 영화가 ‘느낌 있다’고 말하면서 내면의 재능을 북돋아 준다. 이 응원이 삶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유우타는 자신의 영화를 삶으로 돌려놓기 위해, 세상의 아름다운 일면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들에도 솔직하기 위해 그런 영화를 찍고자 한다. 흡혈귀인 에리는 잠시라면 현실에 안주할 수 있지만 사실은 어떤 것으로부터 쉴새없이 도망칠 뿐이었고, 그래서 돌아갈 곳을 폭파하는 일이 필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우타는 끝내 에리를 잊지 못해 자신이 에리와 찍은 수천 시간 분량의 영화를 편집하고, 또 편집한다. 마치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이 에리에 느꼈던 정확한 바로 그 순간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영화가 남긴 것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그런 폭발이 남긴 여분의 감정이었으므로 유우타는 에리의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다. 이내 화면이 꺼지고, 시간이 흘러 삶은 다음 장으로 건너뛴다. 유우타는 자신의 가족이 모두 죽었으며 이제 세상에 남은 건 자기 혼자뿐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마치 모든 순간이 영화였던 것처럼, 암전 이후에 세계는 다시금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았다. 다시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유우타는 자신의 예전 과거를 따라 기억을 더듬고, 폐허의 한복판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그 폐허의 중심에 젊은 날의 에리가 있다. 그 시절과 같은 모습을 한 에리는 유우타에게 “다녀왔어?”라고 물으면서 영화를 다시 보자고 권한다. 영화를 볼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건 덤이다. 하지만 유우타는 자신에게는 이제 말해야 할 것이 있으며,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삶이 이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과거의 유우타에게 영화가 침묵을 대신한다면, 작금의 유우타에게 영화는 무언가를 보고 듣는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줄곧 바라보아지고, 응원받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런 자신이다. 유우타는 에리에게 자신있는 '싫다’로 답하고, 에리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안녕”이라는 말을 건넨다. 이후 만화는 자신이 길게 돌아왔던 길을 따라가 다시금 폭발한다. 폭발을 마주하는 일은 에리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겠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들에 돌아갈 수 없기에 도리어 그들을 실종자로서 정당하게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알아보기 쉬운 천장: 고죠 사토루라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