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안녕, 에리>에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창작이란 보는 이, 듣는 이가 안고 있는 문제에 깊이 파고들어서 웃기거나 울리는 일이잖니. 그렇다면 만드는 이도 상처를 받아야 공평하지. 안 그러냐?” 이동진 평론가처럼 무언가를 다채롭게 바라보는 일을 평론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들은 후로 영화를 깊게 파고드는 글을 쓰는 일이 어려웠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조금 지났던 때니까 단순히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영화에서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것 같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영화를 구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면서도, 극장에 머무르기를 망설였던 건 영화의 안에 사는 일이 마치 기억을 사는 일처럼 느껴져서였던 것 같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평을 하려면 영화를 낱낱이 살펴보며 이에 발자취를 남겨야만 한다. 공모전 같은 곳에서 당선되는 게 그런 부류의 정석적인 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이미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마주 보기에 실패하고, 말하는 일에 실패하고, 글을 쓰는 일에 실패하는 것. 상처를 피하면 아무런 것도 태어나게 할 수 없다.
타츠키의 다른 작품 <룩백>에서도 진하게 느껴지는 뉘앙스는 재난 이후의 삶, 재난이 남긴 흔적들에 관한 트라우마적 자기 서술법이다. <안녕, 에리>가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게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면 <룩백>은 그런 도피가 사실은 인력에 의한 멀어짐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현실의 한 면을 부각하는 것은 그것들을 기리며 떠나보내기 위함이라고, 왜냐하면 영화야말로 눈에 비치는 세계의 지평을 따라 서서히 앞으로 전진해가는 ‘안녕’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영화는 아무런 것도 태어나게 할 수는 없지만 사라질 수는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많은 기억은 잊힐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타츠키가 말하는 창작의 방법론은 한 작품이 독자의 용서와 상처를 호명하고서 이를 공론화하는 일이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를 지난 일로 여기지 않으려면 그를 용서하지 않아야만 한다. 이 점에서 영화는 “용서받지 못한 자”이면서 동시에 한 세계를 등진 형태로만 존립한다. 많은 경우, 영화는 몇몇 순간으로만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이해를 앞서 있어서 부단히 잊으려는 시도 끝에서도 우리 곁에 잔존한 어느 애탄 감정들이다.
타츠키를 비롯해서 일본의 예술가들 중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다. 이것들을 꼭 재난 이후의 공동체나, 이후를 살아간다거나 하는 담론 아래로 모두 묶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처받은 이를 위로하는 작품은 작가의 상처를 통해 완성된다는 말은 비교적 많은 걸 생각해보게 한다. 만약 영화가 관객에게 위로를 전하는 내용을 찍는다면, 감독도 그만큼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영화를 보고 나서 위안을 받은 누군가가 상대방을 위로하는 내용의 작품을 만든다면, 여기서 상처는 다시금 전달되는 것일 테다. 이런 논의를 이어가다 보면 결국 상처의 내용이나 경우보다는 그것들을 어떻게 느꼈는가, 주위에서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지와 같은 주변 감정들에 대한 이야깃거리만이 남는다. 상처의 방식이나 내용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건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만나 위로하는 일이다. 그리고 영화는 작품을 통해 상처를 전달하면서 상처받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 무엇도 현실이 되고 싶지 않고, 허구일 수 없는 자신을 볼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영화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이 감정들에 연류됨으로써 한 시대에 동이 터 오르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시대의식이라 부른다.
영화는 상처받은 이들의 공동체다. 영화는 이미 다 지난 과거지만, 기록으로서 가치를 갖게 되는 건 그가 용서받지 못한 자여서다. 한 시대를 산다는 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 것과 용서해야 할 게 무엇인지를 서로 묻는 일과도 같다. 누구에게나 용서하고 싶은 자신의 일면이 있다. 반대로 타인과 멀어져 영영 용서받지 못한 채로 끝나버리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기 위해 ‘그때’를 유년기로, 성숙하지 못한 자신으로 만들면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계는 성숙하지 못한다. 영화와는 달리 한 세계를 채울만한 용기가 우리 자신에게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매번 같은 이야기로 돌아온다. 영화의 주변부를 서성이는 건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망설여서일 것이다. 그들은 마주하게 될 자신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폐허의 주변을 서성이는 일은, 더는 무언가를 새로 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창작의 한계를 드러내는 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자신에 주어진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신을 사로잡은 현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담론은 이를 징후나 증상과 같은 말로서 지칭하고는 하지만, 여기서는 그저 폭발이라고만 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