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우>(2025)
<플로우>의 흥미로운 점은 물이 차오르는 일에서 시작해 물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부유’가 주된 플롯이기 때문에 이를 자연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부유를 보여줄 요령으로 들이닥친 홍수가 마치 게임 무대처럼 보인다는 걸 염두하고 싶다. 이를테면 <폴가이즈>나 <마리오64>, <대난투스매쉬브라더스> 같은 게임에서는 허공에 있는 발판이 시간텀을 두고 사라지거나, 아니면 용암 등이 올라옴으로써 게임 내적으로 시간제한을 건다. 이는 게이머가 캐릭터를 직접 통제하는 일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어서 언뜻 보면 게임과는 별반 상관없어 보인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런 것도 다 레벨 디자인으로서 게임 안에 녹아 들어있다. 비슷하게 <플로우>에서도 홍수는 영화 내적인 요소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있다. 동물들의 모습에서 당위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게 바로 이 배경이다. 영화는 홍수가 난 상황에서 배에 올라탄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들이 언제까지 물 위를 떠돌 것인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냥 부유하는 일 그 자체고 바꾸어 말하면 딱히 홍수 같은 게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테다. 도리어 홍수는 기후변화 등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 이미 기후변화를 맞이한 상황에서 더는 그게 이례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는 현실에 더 의존하는 것 같다. 영화 <Her>가 불과 십 년 만에 현실에서 그럴듯하게 실현된 것처럼, 기후 변화와 홍수는 우리 현실에 속해있기에 배경 쪽으로 밀려난다.
뻔한 이야기를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흔히 영화를 볼 땐 영화 외적인 요인을 가져오고는 하는데 이는 영화 안에서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이런 설정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관객은 현실을 기준 삼아 영화를 관람한다. 즉 영화에서 배경은 무언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현실을 초과할 요령으로서만 존재한다. 연극무대에서 배경의 역할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배경에 아무런 구조물도 세워두지 않으면 무대는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할 뿐이다. 이처럼 영화에서 배경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감싸 안는 쪽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플로우>에서 홍수가 집어삼킨 현실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AI라고 생각한다. 세간에는 매체의 발전을 따라 세대를 나누는 게 있는데 이를 따른다면 신문, 라디오, 티브이, 인터넷, 스마트폰, AI의 순서가 아닐까 한다. 뭔가 거창하게 말하려는 게 아니라 알고리즘이 갖는 ‘은폐’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스마트폰이 언제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실현했다면 이는 ‘접속’의 지점을 다양화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AI는 사람들이 정보에 접속하는 일에서 경로설정과 운전 모두를 대리함으로써 조금은 더 ‘즉각’에 다가선다. AI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정보 검색에 할애했던 시간을 아껴, 그 시간에 상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스스로 운전해본 적 없는 사람이 늘 익숙하게 출퇴근하던 길을 도보로 걷기 어려워하듯 AI에 익숙해진 세계는 홀로 서는 법을 잊고 말았다.
이와 유사하게 <플로우>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할 개체들이 서로 만나고, 이어지는 일을 무척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여기엔 이들이 서로에 다가서는 과정이 생략되어있다. 단순히 동물농장처럼 동물을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미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정보검색 사회의 장점은 최대한 정보 색인을 살림으로써 데이터 소외가 줄어들게 하는 것에 있다. 아무리 좋은 데이터라도 접근할 수 없으면 그냥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듯,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게 바로 연결 사회의 기능이다. 여기서 머리 아픈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상대방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은 ‘예측’해서 미리 행동하기에 편리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기도 한다. 선입견은 우리가 문제를 더 명확히하기 위해 무대에 배경을 세워두는 일에 해당한다. 상대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게 있음에도 표면에 노출되는 것만 갖고서 사실을 예단한다. 그리고 <플로우>는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일에서 관계를 출발시킨다. 영화는 고양이 한 마리가 집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풀숲에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지만,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동물들이 물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갑작스레 물이 들이닥쳐 동물들이 살아남을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고양이는 계속해서 고지대로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가 고양이를 만나고 또 이어진다. 평소라면 서로 만날 일이 없고 또 얘기할 일이 없었을 관계가 이런 부유에서 서로 연결된다.
고양이의 집으로 추정되는 이 장소는 분명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렇기에 첫 번째로는 왜 사람들이 다 사라졌는지를 떠올리면서,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어디든 집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를 잘 알지만 반대로 그 집 자체가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사적인 관점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플롯상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결말에 이르면 다시 돌아갈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정하자면 다시 ‘나’(라고 믿는 무언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사실 <플로우>가 동물을 의인화해서 얻은 이점엔 그것도 있다. 몇 년 전 개봉한 <당나귀 EO>에서는 당나귀의 시점이 잠시 기계의 관점으로 대체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이후에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인간의 시점이 잠시 기계의 관점으로 대체되는 장면이 있다. 이들 영화는 우리가 인간에 속해있기에 얻는 한계를 벗어나려고 시도했고 이는 카메라와 세계 간의 연결성, 즉 ‘배경’지식을 삭제했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 영화는 휴머니즘이기보다 포스트 휴머니즘이기를 선택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기보다는 경로를 우회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플로우>는 부유의 영화다.
어떤 영화는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는데 차라리 지금 이대로가 훨씬 낫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전 세계에 싫증이 나 있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은 자신의 행적에 ‘어제’를 ‘이전’으로, ‘어제’를 싫증내며 배척해야 할 무언가로 만든다. 이렇게 세계를 미워하는 일이 삶의 원동력이 되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세계를 좋아하는 일이 될 것만 같지만 세상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성냥팔이 소녀에 허락된 잠깐의 온기가 결국 아무런 일도 아니게 되어버렸던 일을 떠올리자. 영화는 눈앞의 따스함에 감사하기보다 조금의 온기가 더 따듯하게 다가오는 기후변화를 더 강조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세상이 망해버린 이유를 생략한 채로 등장하지만 그만큼이나 멸망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플로우>의 정서가 정확히 그렇다. 영화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이 다수 등장한다. 이들은 뭔가 목적을 갖고서 길을 떠난 게 아니라 그냥 물이 있는 반대방향으로만 달렸을 뿐이다. <플로우>는 단순히 연대와 공존을 말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곳에 접속해도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배를 타고 어디에서 내리든 간에 결국 하나의 물에 도달한다. 대양이 하나로 연결되어서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연결되는 일은 고립된 무언가에 착륙하는 게 아니라 커다란 마음 하나에 접속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우리가 상대방에 마음을 전한다고 보는 것이 과연 목적지향인지, 아니면 자신의 반대편으로 달린 것뿐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