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솔닛은 『그림자의 강』에서 사진에 관해 이렇게 밝힌다. “사진은 어쩌면 그런 사회에서 가장 모순적인 발명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절을 통해 과거를 계속 유지하는 기술, 늘 앞으로 나아가지만 또한 늘 뒤를 돌아보는 기술이었다.” 이 생각은 적어도 작년 말과 최근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삶의 신념에 가깝기는 한데, 그래도 시점을 명확히 한 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에 후지모토 타츠키 원작의 <룩백>을 봤고 솔닛과 같은 생각을 했다. 뭔가 삶의 변화를 이뤄내야 할 시기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용이 유독 머리에 남았다. 우선 영화의 내용을 복기해보자. 후지노와 쿄모토 두 사람은 친구다. 콤비 만화가로 활동하던 두 사람은 성인이 될 무렵 의견차로 헤어진다. 이후 만화가가 된 후지노, 대학생이 된 쿄모토가 병치되는데 어느 순간 두 숏이 충돌한다. 화면이 꺼지고, 소리가 잠시 암전되면, 화면 위에 몽타주가 떠오른다. 마치 새까만 머릿속을 그래피티로 덮으려는 듯 뉴스 릴과 자막이 표출된다.
암전된 화면에 하얀색 글씨가 떠오르는 건 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다. 영화들은 무언가 내용을 강조하거나 반전을 넣을 때 그런 연출을 한다. 그렇지만 <룩백>에서 그 연출이 유독 마음에 닿았던 건 <스즈메의 문단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룩백>을 보기 몇 달 전, 우연히 극장에 걸린 재개봉 판본을 관람하면서 이전과 같은 장면에 발목이 잡힌 자신을 발견했다. 지진을 일으키는 재해 ‘미미즈’를 퇴치하는 과정에서 스즈메는 자신의 옛 집터를 방문한다. 폐허에 깔린 돌을 치워 바닥에 깔린 작은 양철상자를 열자 낡은 일기 하나가 나타난다. 스즈메가 일기를 들어 차분히 장수를 넘겨가면, 어느샌가 화면은 암전되어 하얀 글씨 하나가 전면에 노출된다. 어린 날의 스즈메가 지워버린 화면은 2011년 3월 11일이었던 것이다. 이 장면은 아마 관객이 현실에서 뛰어넘어올 만한 ‘문턱’이 되어준다고 생각되는데, 반대로 마음의 걸림돌인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좀 편하게 보고 싶은데 갑자기 현실을 운운하다니, 비겁하지 않은가.
미리 밝히자면 <룩백>과 <스즈메> 모두 작가가 동일본 대지진에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작품이다. 그러니 조심스럽지만, 두 작품을 서로 같은 카테고리에 넣어보고 싶다. 화면이 암전되고 뭔가 하얀 것이 화면에 떠오르는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암전은 마치 에이젠슈테인의 충돌 몽타주처럼 줄곧 이어져 왔던 이야기를 ‘단절’하고, ‘조각’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앞서 솔닛이 사진의 모순점을 지적한 점을 떠올리게 한다. 대개 단절이란 탈출로를 모색하는 일과도 같아서, 과거와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절을 통해 과거를 유지하는 일은 얼핏 들었을 때 모순처럼 보인다. 과거와 엮이고 싶지 않은 이가 선택한 게 도리어 그를 옭아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단절을 통해 과거를 유지한다”는 말은 과거에 관심을 끌수록 도리어 과거에 집착하게 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그런 과거에 두절되기를 택한다. 계속 들여다본다 한들 속상하기만 할 뿐이니까, 그러니 살아야 한다.
이따금 과거를 들여다보는 게 망설여지곤 한다. 일기라던가, 아니면 옛 사진이라던가 하는 게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말한다. “저는 무척 어렸어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와서 그렇게 말한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있는 그대로를 기억해야 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영화는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표출하기에 있는 그대로를 기억할 수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이 문장에서 앞뒤를 바꾸어 생각하고는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모든 영화는 한 순간으로 기억되기에 매순간 과거를 남긴다. ‘순간’은 우리가 그런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요구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남은 과거는 우리가 그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기 위해 요구되는 정박지가 되어준다. <룩백>과 <스즈메>에서는 암전이 이런 역할을 한다. 이들 장면은 여태까지 해왔던 이야기에 변화를 주지 않고서도 그동안의 이야기를 새로 쓴다. 암전은 반성하는 형식이다.
근래 역사계에서는 포스트-진실이라는 역사의 새로 쓰기 방식이 두각을 드러낸다. 포스트-진실은 무언가를 믿는 이들에 의해 믿어지는 사실, 즉 ‘허구역사학’을 뜻한다. 다른 한편 마리안느 허쉬의 포스트메모리는 한 기억이 집단 전체의 상상에 의해 참여와 연대의 벨트를 꾸린다고 말하며,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고통을 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를 논한다. 이 두 관점으로 솔닛의 말을 생각하면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가 몇 개 나온다. 단절을 통해 과거가 유지된다면, 여기서 과거를 돌아보는 쪽은 그런 과거와 ‘어떻게’ 연결될까.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대부분의 사건이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사건에 직접 연결된 쪽은 당사자와 유가족, 기업과 주변인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통감하며 연대의사를 표하는 건 인간이 상상하는 동물이어서다. 화면 속에서는 항상 무언가 펼쳐져지만, ‘암전’이 이루어지고 나면 우리는 다시 상상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뒤를 돌아봄으로써, 과거를 떨쳐냄으로써 우리가 이를 기억하고 또 연대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해두고 싶다. <룩백>을 보는 동안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며 펑펑 울었던 건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영화의 명대사는 “등 뒤를 봐.”라는 것, 영화 안에서는 후지노가 쿄모토에 등에 해준 사인에서 언급되지만 밖에서는 좀 다르다. 영화 밖에서 이 말은 한 개인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기억에 참여하게 한다. 분명 이 세계는 완전하게 창작된 허구에 불과하기에 누군가는 그저 영화로만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허구와 연결되는 방식이 진실이나 사실 그 자체일 필요는 없다. 도리어 단절은 한 개인의 시선이 닿는 자리를 선명하게 기록한다. 단절은 우리가 그걸 떨쳐내기 위해 상상을 동원한다는 걸 말해준다. 바꾸어 말한다면, 단절되기 전의 삶은 정말로 있었던 일이고 또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룩백>과 <스즈메>의 암전은 다분히 현실주의적이다. 후지노는 암전을 마주하고 나서 쿄모토와의 관계를 더는 바꿀 수 없게 됐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후지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쿄모토를, 그녀의 등 뒤를 쫓을 수만 있다. <스즈메>의 스즈메는 암전을 마주한 후로 자신이 도망쳤던 과거를 기억해낸다. 동시에 미미즈가 노린 것이 단순히 사람들의 죽음만이 아니라 미래를 가정하고 또 상상하는 능력임을 깨닫는다. 쉽게 말해 암전에 얽힌 것은 고정성이다. 통상적인 기억이 우리가 겪고 들은 것 중 인상 깊은 일을 보존하는 것이라면, 이들 영화에서 암전은 이미 알고 있는 일들에서 출발한다. 이미 자신이 겪었던바 있는 일임을 깨닫는 게 바로 암전이라면, 반대로 그걸 계속 겪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암전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는 이들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렇기에 지켜보는 자의 의무를 짊어진다. 그 점이 어쩌면 삶을 나서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어떤 때는 해야만 하는 일인 것도 같은데 반대로 왜 그랬는지를 후회하게 되는 나날이 있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사망 소식을 접하며 “차라리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후지노의 이 생각에서 출발해 작은 상상을 발휘한 뒤 출발점에 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원점으로 돌아온 건 아니다. 어렸을 때는 후지노가 쿄모토의 방 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비록 쿄모토는 이제 없지만, 쿄모토의 열린 방을 패닝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후지노와 쿄모토의 우정과 연대, 정말로 있었거나 아니면 함께하고 싶던 미래로 가득하다. 만약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진실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오히려 후지노가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 자체가, 몇몇 현실 앞에 눈을 질끈 감고 마는 우리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이곳의 나는 누구에도 바뀌지 않고 또 그렇기에 이 세계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