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풍 이미지에 대한 단상

by 수차미

씨네21에 올라온 이주영 박사의 글을 읽었다. “지브리풍 챗GPT이미지 생성 열풍과 생각의 무능”을 다루는 이 글은 크게 “생각의 무능함이 견인하는 폭력성”으로 요약된다. 지브리 이미지가 사람들에 사유에의 매혹과 참여를 부인한다는 이 주장을 보며 떠올린 건 김병규 평론가가 씨네21에 썼던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 대해 썼던 글이다. 이 글에서 김병규는 “그들의 입은 시선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들의 눈은 낯선 시선을 마주하는 데 익숙할 것이다”라는 하룬 파로키의 말을 인용하며 “영화가 구성한 몽타주의 논리를 갱신하려 드는 해체적 몸짓”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은 핵심 구절로 이어진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진정한 동시대성은 시대착오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고. 즉 “파로키가 구성한 이미지의 동선은 감금된 조건을 넘어선다”: 영화가 어떻게 감금의 조건을 이겨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한 개인이 겪는 순간들에 참작될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코로나 판데믹 시기를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영화를 보는 행위가 어느 순간 무언가에 사로잡히기 위함으로 바뀌었음을 말해두려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세계가 유동하는 무언가가 됐다면 부유의 체계에서는 자신이 자유낙하하지 않도록 몸을 묶어둘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사유하는 신체를 고정해 둘만한 게 바로 의미에의 감금이다. 중력이 없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인공중력에 사로잡히고자 어떠한 흐름과 대세에 편승하게 된다. 시네필이 영화문화에 편승하는 건 자신에 소속감을 부여하며 더 나아가서는 ‘지금-여기’를 상기시킨다. 즉 영화문화는 마치 우주시대의 스페이스 콜로니와도 같아서 먼 세계에 자신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한 이들이 이곳에서 하나의 빛이 된다. 이 간극이 시대착오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동시대성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시대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걸 두고서 ‘사이비(pseudo)’라며 비판해야만 하는 걸까? 진부한 답변이지만 결국 가짜와 진짜를 분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만 말해두려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짜와 진짜를 판가름하려는 이 시도가 몽타주를 갱신함에 따라 우리를 정주하지 않게 해준다는 점이다. ‘지브리풍’ 이미지가 예술성의 면에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이미지를 생성한다고 해서 사유의 무능함을 따져 물을 수는 없다. 도리어 지브리풍 이미지로 재구성된 한 세계를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 낯선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한 세계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물음이 던져짐에 따라 반대로 한 세계를 말하는 일이 어떠한지도 논하게 된다. 지브리풍이란 무엇일까? 지브리적인 것에 대해 묻는 일은 무엇이 한국적인지, 무엇이 씨네21식 비평인가를 묻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브리풍 그림을 사용하는 일이 지브리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옹호를 뜻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근작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된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완전한 지브리 영화의 신화’를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에서 왜가리는 소년에게 말한다. “너는 왜 아직도 저 세상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거냐. 잊어버려라”고. 이 말은 바르트의 ‘영화관을 나오며’라는 글을 떠올리게 한다. 글의 핵심은 우리가 그것들을 영영 기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리를 나와야만 하는 태도에 있다. ‘극장’은 ‘시작’의 순간이다.


왓챠 같은 곳에서 영화를 수천 시간 수만 시간을 본 사람도 결국 그런 시간들의 대부분을 잊어버린다. 기억에 남는 건 ‘좋았다’는 추상적인 이미지뿐이다. 원론적으로 이때 영화를 보았던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았던 순간들이 의미 없는 건 아니다. 존재와 무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듯 의미와 부재도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영화는 항상 의미 있는 순간들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목적지에 향하는 일에서 몇몇 과정을 빼놓으면 결말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역설적으로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화 같은 순간’을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결말을 스스로 바꿀 수 없거나 그게 힘들다는 걸 잘 안다. 이를테면 죽음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결말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기에 그 결말의 의미를 달리 보이게 할 만한 결정적인 순간들을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라는 건 아무런 것도 바꿀 수 없음에 체념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한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모두’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한 세계의 구원을 바란다. 그들은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이 ‘모두’가 바로 우리가 예측하던 결말의 궤적을 바꾸어 운명을 바꾼다고 믿는다. 이 결정론적 세계가 비디오테이프처럼 시작에서 끝을 반복한다면, 이 세계의 [운명]을 바꿀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줄곧 질문하며 이에 시선을 보내는 일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현실을 바꿀 수 없지만, 현실과 연결되며 소통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있다. “영화가 구성하는 몽타주의 논리를 해체”한다는 건 그런 뜻이다. 멋대로 결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모두’의 형상을 다시 그려보는 것.


지브리풍 이미지를 현실로 끄집어내는 건 현실이 영화이거나, 혹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일 테다. 지브리처럼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고 보는 건 너무 평면적인 생각이다. 바로 그렇기에 지브리풍은 스크린이라는 평면으로 추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들>에서 탑의 주인과 소년의 관계는 영화가 쌓아올린 이미지의 세계가 결코 마법적인 순간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소년이 스스로 무너트린 탑 속 세계는 한 영화가 삶을 거두어 숨을 끌어내는 모습과 닮아있다. 탑 속에서는 지브리적인 신화로 가득하던 영화는 탑이 무너져 앵무새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다시 현실에 돌아온다. 지브리 영화가 다 판타지를 다룬 건 아니니까 섬세히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이 이야기의 중요한 점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AI 생성 이미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AI가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식은 이미지를 분해해 필름 그레인을 재현하고, 이를 토대로 어떠한 형상에 다가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정확히 하나의 이미지를 분해해서 차이를 발생시킨 후 다시금 생성에 다가선다는 점에서 ‘단지 영상기록물에 불과할 뿐인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삶과 현실을 바꾸어나가는지’를 잘 설명한다. ‘세계는 단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를 중단하지는 않는다. 영화평론가가 영화적인 것을 믿어야만 하듯 지브리풍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적으로 말해 지브리풍 이미지에 대한 생각이 평면적이라면, 반대로 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비록 삶을 살아가는 일이 폭력적이라 한들 삶은 이어져야만 한다.


지브리풍 이미지에 대한 관점은 조금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브리풍에 대한 결론에서 출발하는 ‘지브리풍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지브리’를 위해 존재하는 ‘지브리풍’이 우리가 아는 결말을 뒤튼다는 점을 간과한다. 지브리풍 이미지가 마치 지브리 세계의 어떤 감성들을 쉽게 획득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건, 도리어 이 세계가 ‘살 만한 세계의 문제의식’을 해결하고 싶어함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지브리풍 이미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는 점이다. 현실의 모든 감정이나 실례들이 이미지 평면 위에서는 ‘지브리풍’의 행복감으로 씌워진다. 혹자는 이게 감정을 평탄화하는 이미지 스펙터클의 안 좋은 사례라고도 하지만 왜가리가 소년에게 전한 건 ‘마법’은 없다는 게 아니었다. 마법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단지 잊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며 어떤 마법 같은 나날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건 터무니 없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지브리풍 이미지는 사람들이 바라는 마법 같은 나날들에 대한 적당한 고유명사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지브리풍 이미지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화적인 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민과 불안을 안고서 자기 세계 안에 갇혀있다. 이 안에서 지브리풍 이미지는 하나의 ‘외부’가 되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줄 수 있다. 어느샌가 사람들을 표정을 짓는 법을 잊고서 거울 속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표정에 다가서는 법을 재현하면서 잊고 지내던 감정들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기분이나 환경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표면을 모두의 영화로 돌려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곳에서 눈은 입보다 시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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