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요 몇 달간 봉준호의 <미키17>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송경원 편집장이 1498호 데스크 칼럼 “<봉준호 되기>를 읽으며 생각한 것”에서 진술했듯 씨네21은 1495호에서 97호까지 <미키17> 관련 글을 실었고, 이후 해당 칼럼이 실린 후 1499호와 1502호에 드문드문 관련 글이 실렸다. 송경원은 ‘상반기 최대 화제작’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면은 채워야 하는데 발제거리가 없으니 봉준호의 <미키17>을 아이템으로 삼자는 것이다. 분명 <미키17>은 봉준호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으며, 반대로 할리우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설국열차>가 외국배우를 데려다 찍은 한국영화라면 <미키17>은 기획부터 제작까지 모두 할리우드 손을 거쳤다. 해외에서도 <미키17>은 할리우드 영화로 분류되고 있고 씨네21조차 봉준호의 첫 할리우드 작품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가 아닌 이 영화를 그토록 길게 다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502호가 발간된 4월 초를 기준으로 하면 <미키17>은 극장에서 내려간 지 좀 됐다. 기사로서는 시의성이 없으니까 ‘봉준호 감독 인터뷰’라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무언가 <기생충>이라는 거대한 족적을 남긴 감독을 초대해 자리를 빛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즉 씨네21이 <미키17>을 요 몇 달간 길게 다루는 건 한국영화라서이기보다 봉준호라는 한 개인에 의존하는 게 더 크다. 물론 봉준호가 이렇게 길게 다룰 만큼 거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미키17>이 한국영화로서의 해석틀이나 옹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봉준호 감독이라는 작품 세계 안에서 군벌을 형성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영화를 선택하는 대신 한국영화감독을 선택한 것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미키17>의 경우는 영화에 대한 평가가 영화감독의 평가로 덮어씌워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봉준호 감독의 한국적인 세계관 안에서 봉준호의 첫 할리우드 작품인 <미키17>이 옹호받는 순간, <미키17>은 부모의 후광을 입고 등장한 재벌 후계자만큼이나 부질없이 등장한 것이 되어버린다. 부모 이름에 먹칠할 수 없으니까 어찌저찌 평가를 후광으로 밀어붙인다는 소리다.
다른 한편 판데믹 이후로 길게 드리워진 한국영화의 명암을 생각하게 된다. 씨네21이 한국에서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나가는 영화잡지라는 점에서, 이 기획에는 한국영화에 대한 부채감을 지워버리려는 인상이 있다. 영화 시장이 전반적으로 불황인 상황에서 한국영화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된다. 마치 자국산업을 보호하려는 무역처럼 한국영화는 외국영화에 가해지는 비평적 세금에서 자유롭고, 더 다룰만한 소재가 된다. 봉준호는 일인치의 장벽을 넘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는데 한국영화에는 반대로 무역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물론 ‘상반기 최대 화제작’이라는 표현대로 대중지에서 다룰 수 있는 소재는 결국 한정되었을 것이다. 지면을 다 외국영화로 채우기보다는 그래도 한국영화를 밀어주는 쪽이 여러 면에서 낫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영화 하나를 다양한 면으로 바라보며 기획을 이어가는 것도 주간지의 특성상 분량이 모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이 나쁘다고만 생각하진 않지만, ‘영화’를 산업으로 바라보는 경우의 수에서는 우리가 해볼 만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화 비평은 산업의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영화를 보호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한국영화가 나오는 건 아니다. 중간에 산업적으로 한국영화 시장의 전체적인 규모나 순환 등이 잘 형성되어 창작하기에 좋은 환경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단순히 영화에 돈을 때려 넣기만 하면 좋은 영화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영화를 중점으로 다룬다고 해서 그게 작품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중간에 비평적인 관점이 잘 발굴되어 봉준호 감독에 대한 이해나 세계관 등이 향상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건 봉준호 영화를 무작정 보도하기만 해서는 봉준호 영화를 화제작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키 17>에 대한 요 몇 달간의 지면 배치는 의도성이 다분하다. 만약 <미키17>이 비평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면 2주 분량을 한 묶음으로 이어서라도 특집호를 내지 않았을까? 한 영화만을 계속 다루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편집장이 항변하는 일은 사실은 꽤 변명 아닌 변명처럼 들린다. 한 작품을 최대한 깊게 다루는 것과 다양한 작품에 조명을 보내는 일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 선택은 다분히 산업적이다.
공교롭게도 이 생각을 떠올린 건 넷플릭스의 OTT 시리즈 <데빌 메이 크라이> 때문이다. <데빌 메이 크라이>는 동명의 게임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를 원작으로 했는데 매체 파생작 답게 평행우주에 더 가깝다. ‘버질’과 ‘단테’ 그리고 아뮬렛을 토대로 섞은 세계관이 이런저런 시의성 있는 이야기와 버무려져 서빙된다. 원작팬이라면 원작에서 만났던 몇몇 적들과 등장인물이 전혀 다른 시점이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내 단테는 이렇지 않아!’라며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가령 원작 3편에서 나온 레이디는 아버지의 광기로 어머니를 잃은 후 가출하며 단테는 악마가 된 레이디의 아버지를 상대하게 된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레이디의 아버지가 이른 시점에 사망해 원작과는 달리 경찰팀으로 활동한다. 1편에서 3편까지의 내용이 적절하게 혼합된 이 이야기에서 사운드트랙은 5편의 것을 따른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오마주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전개가 흥미로운 점은 ‘혼합’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예전에 원작 팬들에게 반발을 샀던 비슷한 사례로 ‘dmc 데빌메이크라이’(이하 dmc)가 있다. 게임으로 출시됐던 이 작품은 원작의 리부트로 기획됐으나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끝내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달라졌고 형의 역할도 달라졌으며, 스킬시스템도 패드위주에서 키보드 마우스 위주로 옮겨간 것도 한몫했다. 여하튼 캐릭터와 세계관의 기초 컨셉만을 갖고서 아예 이야기를 재구성했기 때문에 평행우주보다 더 넓은 범주에 속하는 변형이라 할 수 있겠다. 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끌고 나갈 때, 그 이야기가 나온 해당 시점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이렇게 이야기를 혼합하는 일은 무엇보다 동시대의 여러 관점을 수입해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어도, 기존 세계에 무리하게 이야기를 끼워 넣는 것보다는 아예 이야기를 재구축하며 혼합하는 편이 더 낫다. OTT 시리즈가 난민 이야기를 끌고 왔던 게임의 리부트 판본이 미디어와 매체 같은 통제사회를 비판했다는 점은 시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특히나 이 생각이 영화 비평 등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영화를 비평할 때는 항상 가장 끝에서 모든 일을 바라보고는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야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복선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감독의 작품들도 감도의 근작에 비추어 이전 작품을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일종의 계보학이라고나 할까. 아마 그래서 씨네21은 잡지의 30여 년을 봉준호의 30여 년에 빗대어 서로를 기념비적인 관계로 엮어보려 했을 테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이전 작품들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이야기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어쩌면 지금이라는 순간은 과거의 한순간에서 이미 주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일일이 연락을 돌리며 안부전화를 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일은 도리어 영화가 지닌 수축의 기능인 것만 같다. 가령 영화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했을 때는 시선이 소실점에 모이기 마련인데 이 경우 시점은 한곳에 모여 평탄화된다. 즉 전진이란 공간을 물리적으로 위로 옮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알아보기 쉬운 천장에 도달하는 일을 가리킨다. 낮은 천장에 올라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은 투자자에 저점에서 매수하라고 권하는 일과도 같다. 이때 뒤를 돌아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머무는 곳은 특정한 어디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를 향해 낙하할지를 고민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이를 추락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수상한 후 한국영화가 고점에 이르렀음을 인지한 결과가 도리어 한국영화에 대한 부채감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씨네21은 추락을 해부해 안전한 ‘낙하’로 바꿔보려 했던 것 같다. 분명 한국영화의 제3 르네상스 시기가 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형태의 충격량으로 해산하는 일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면 이는 반대로 우리의 과거를 더 세련된 방식으로 발굴할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관을 쭉 이어가는 일은 결과를 쭉 밀고 나가며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방대한 규모의 받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뒤를 돌아보는 일은 시간을 부정하거나 역행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테이블 위에 올릴 수 있는 ‘비상 대책 위원회’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씨네21의 연이은 봉준호 특집은 지난 30년을 앞으로의 위기로 엮으려는 끈끈함을 선보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