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에 올라온 윤아랑의 “애니메이션과 멀티버스”를 읽었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멀티버스적인 존재론적 혼란’이라는 말로, 애니메이션이 멀티버스를 묘사하기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애니메이션이 평행세계를 묘사하기에 적합하다면 그 이유는 ‘메타’의 ‘베타’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메타’는 작품 안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안을 들여다볼 때만 비로소 언급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 하는 것도 메타 일종의 메타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그 물러남을 최종 판본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아직 미완의 현실로 여기며 이를 고치려 해보는 게 바로 ‘메타’의 ‘베타’다. 애니메이션은 꿈과 현실이 스크린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둘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고 말한다. 꿈의 변형 판본이 현실이든, 현실의 변형 판본이 꿈이든 간에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 건 멀티버스적인 상상력이다. 이때 애니메이션은 그런 혼합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이를 직접 실험해본다. 이들 애니메이션의 물성이 현실에 앞서 있기에 이들 세계는 ‘베타’를 실험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애니메이션이 현실에 앞서만 있을 뿐이라면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무언가 ‘모자라고’ ‘결핍된’ 게 되진 않을까. 바꾸어 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상처란 어떤 의미일까.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진정으로 다치거나 아파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렇게 묘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영화가 묘사하는 현실적인 질감보다는 못하며, 연출기법에서도 그걸 응용하는 쪽은 많다. <해피 트리 프렌즈>처럼 고어한 연출은 물론이거니와, 여타 평범한 만화들에서도 머리를 한 대 맞으면 작게 혹이 나는 등의 표현이 주를 이룬다. 즉, 애니메이션은 애초에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4K로 업스케일링 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를 봤다. 5년 만에 다시 보며 달라진 생각을 점검할 수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아카자가 쿄주로를 설득하는 장면이다. 아카자는 쿄주로에게 ‘젊고 팔팔한 채로 죽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쿄주로는 늙고 병드는 건 인간의 ‘특권’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혈귀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대화는 영화에서 신체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데 가령 영화 속 세계는 변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꿈속에 살고 싶어한다는 대목이 그렇다. 엔무가 사람들에 ‘좋은 꿈’을 꾸게 함으로써 힘을 얻는다면 여기서 열차는 무한한 꿈으로서의 영화 매체에 빗대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화 매체에 반해 늙고 병들고 다치는 신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게 바로 쿄주로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쿄주로의 몸은 너덜너덜해져 끝내 빈사 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쿄주로는 몸이 다칠수록 점점 정신이 또렷해져 마지막에 가서는 아카자를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기까지 한다. 아카자는 이를 의아하게 여기며 점점 죽어가는 자신을 돌아보라고, 현실자각을 좀 해보라고도 말한다. 아카자의 말처럼 인간은 혈귀와 달리 다친 몸이 회복되지 않고, 육체의 전성기를 보내고 나면 이후로는 점점 쇠약해져 찬란했던 시절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그러니까 아카자는 마치 보들레르처럼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연장하고 싶어한다. 아카자는 자신의 지난날에 사로잡혀 육체의 강함을 추구하게 됐다. 지금에 와서는 과거를 잊어버리고야 말았지만 몸만큼은 그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아카자는 사실 그 누구보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혈귀가 된 이후 몸을 다치거나 상처 입지 않는다면 이는 비단 현실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즉 아카자는 자신을 죽여줄 누군가를 원했을 것이다.
즉, 쿄주로의 말은 현실에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영화가 다치지 않는 몸을 선사한다면 현실은 아프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아프거나 다치는 일을 보며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데 이는 영화가 행하는 시각이나 청각 등과는 달리 통각이 ‘촉각’이나 ‘후각’처럼 추체험될 수 있는 부류에 속함을 뜻한다. 즉 영화에서 통각은 사람들이 타인의 기억을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통증이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에는 별다른 기억이라는 게 없는 걸까. 애니메이션에서 신체는 영화와는 달리 통증을 느끼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꿈에 살고 싶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통증이 없으면 결국 성장도 없다. 다치지 않는다는 건 애초에 몸에 흠집이 나지 않을 만큼 강하거나, 혹은 고통을 느끼는 법을 잊어버린 것과도 같다. 결국 체험이 자기만의 것으로 남으면서 성장할 여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고통을 느끼는 법을 잊어버린 아카자가 자신의 유년기에서 더 성장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아카자는 혈귀가 되면 노화나 질병 없이 줄곧 강해질 수만 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혈귀는 꿈이 지배하는 밤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혈귀는 끝을 마주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이와 어른, 둘 중 어느 경계에도 속하지 못한다. 탄지로도 가족들이 함께하는 행복한 꿈에 머물고 싶어했다. 하지만 탄지로는 이미 끝난 일에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그런 꿈들에서 깨어난다. 탄지로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그런 끝을 마주하는 일이 과거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억해야 할 것들임을 잘 알았다. 어른이 아이였던 때를 잊지 않듯 탄지로는 자신이 아프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엔무의 꿈은 처음에 좋은 것만을 보여주다가 점점 악몽을 보여준다. 이 악몽에서 각성한 탄지로는 꿈에서 받은 상처가 현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까 두려워 자결하기를 망설인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탄지로가 목을 베어 현실에 깨어나자, 상처는 온데간데없고 모든 게 원래대로다. 이 장면에서 마음의 굳센 의지는 몸의 강인함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탄지로의 현실이 점점 피폐한 꿈을 닮아감에 따라 몸도 서서히 지쳐간다. 끝내 송곳에 몸을 찔린 탄지로는 아카자가 등장했을 때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탄지로는 분하지만 자신이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순간 타인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된다. 꿈이 현실을 밟고 올라서 있다면 우리는 꿈을 말하기 위해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꿈에서 받은 상처가 현실에서 말끔히 회복된다면 반대로 꿈이야말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무기력해야 한다면, 도리어 현실이 아니라 꿈이야말로 불변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 피터팬처럼 성장하지 않는 아이들이 자라온 이 꿈의 세계야말로 무한열차인 게 아닌가? 탄지로는 인간의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장난치는 일을 용서할 수 없다고 엔무에게 말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무런 성장도 없이 그저 머물러만 있고 싶다’는 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꿈 세계에서 아이는 철이 들 수 없고 어른은 어리광을 부릴 수 없다. 이에 렌고쿠는 변하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며 혈귀로 살기보다는 올려다보이는 하늘이 있는 곳에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렌고쿠가 탄지로에게 주가 되라고 했던 말은 현실과 꿈 모두의 주인으로 살라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의 물성이 현실에 앞서 있으니까 현실에서도 불변하는 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였던 때를 잊지 못한다면 철이 덜 든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본디 활동'사진'임에도 우리는 영화의 활동성이 영화에 본래한 것으로 여기고는 한다. 하지만 영화도 결국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까 그런 현실을 대체해보려는 시도로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 영화는 삶에서 영화적인 것을 발견하기를 유도하면서 모든 이의 마음에 초현실이 자리 잡기를 바란다. 실제로 현실을 살면서도 자신이 봤던 영화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는 일은 흔하다. 마치 그게 본래 자신의 현실을 구성하는 무언가였던 것처럼 꿈의 본질로서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자리한다. 그러나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불변하는 신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테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자신의 신체 컨디션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영화가 흘러가는 것만큼이나 인간이 병들고 아프고 늙어가는 것은 필연이다. 이 점에서 렌고쿠와 아카자의 설왕설래는 영화를 멈출 것인지의 문제부터 인간이 죽는다는 결론에서 도망치려는 ‘베타’를 떠올리게 한다. 아카자는 렌고쿠에게 아직 전성기가 아니라며 혈귀가 되면 자신이 아는 전성기의 수준보다 더 높은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지금 만난 렌고쿠가 ‘베타’라고 말한다. 그러나 렌고쿠는 자신이 설령 베타일지언정 인간이 죽는다는 한 결론에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반대로 그런 한계를 목표 삼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아는 게 바로 어른이라면, 탄지로에 용기를 전하는 쿄주로의 마지막 모습은 참된 의미의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