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제게 바깥 세계를 알려준 선생이라면 애니는 제게 저에 관해서 알려준 친구입니다.”
이우빈 편집장은 <매거진 쿄로쿄로> 창간을 알리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말에서 ‘애니’라는 ‘만화’라는 말로 고쳐보고 싶다.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서로 다른 매체지만 그 결정가능성에서 ‘자유’라는 한 가지 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의 질감을 구현해야 하므로 항상 현실에 견주어 자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결정성’이라는 운명의 굴레에 속하게 된다. 반면 애니와 만화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상대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둘을 큰 범주에서 ‘만화’로 지칭해두려 한다. 영화가 항상 무언가에 대한 반-현실로 존재한다면, ‘만화’는 완전한 현실로 주어진다. 그리고 영화가 지닌 상대성이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에 관한 믿음과 지혜를 심어준다면 ‘만화’는 이곳에 등장해온 것을 긍정한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의 ‘기어5’가 만화적인 형태로 등장해온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사람을 웃게 하고 고뇌에서 해방하는 전사, ‘니카’는 아프리카의 설화인 ‘조이보이’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알려졌다. 조이보이는 춤추고 노래하며 고난을 웃음으로 승화한다. 이른바 조이보이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여기 이곳에 있는 자신에 관해 말한다. 그렇게 보면 ‘만화’는 자신의 취향이나 성격 등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무언가일 수 있다. 만화는 현실에 관한 자신이 아니라 그 무엇도 상대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든다. 그 안에서 자신은 그 무엇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면 된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자신에만 충실하면 된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와 같은 자기인지가 확고해진다. 이 과정에서 자기만의 것인 ‘취향’이 생겨나게 되고 우리는 이를 ‘나’라고 부른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관한 표준상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한다’는 게 아닐까 한다. 소위 말하는 오타쿠다. 단순히 생각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이겠지만, 도리어 이런 쪽으로도 생각해보고 싶다. 그 사람의 안에는 ‘자기’가 확고히 존재한다고. 사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 ‘오타쿠’적인 사고는 부러운 점도 분명 있다. 몸이 보내는 사소한 신호를 간과하다가 끝내 병원에 실려간다거나 하는 일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렇다. 아니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영화를 보면서는 항상 그 안에 자기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영화는 또 하나의 현실이고,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눈앞에 넘실대기에 이 안에선 ‘자기’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그냥 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만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데 이는 영화의 운동성을 개인의 운동경험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분명 험난한 것이 되리라고 예감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필요한 건 이 험난한 과정을 헤쳐나갈 용기가 우리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세계 안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안에서 ‘자기’가 사라지기 때문에 세계를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게 힘들다. 다만 영화는 또 다른 세계가 되어, 다시 현실에 돌아올 때 ‘자기’를 파악하게 해준다. 영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자신이 사는 이 세계에만 계속 머물러야 했을 테다. 벤야민의 말마따나 영화는 우리가 꿈을 꾸지 않고서도 이 세계에 깨어날 수 있게 해준다. 현실은 항상 최종판본이자 최후였지만 영화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영화는 항상 여행이나 모험 같은 단어와 연결되고는 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잠시나마 먼 세계를 돌아온다는 것과도 같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테다.
영화가 ‘바깥’을 알려줬다는 이우빈의 말은 그 뜻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끝낼 수 있게 해줬다. 만화가 여기에 있을 때 영화는 여기에 남는다. 이 점에서 만화 영화를 모두 취할 방법 같은 건 있을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가령 영화를 말하는 것이 대개 사회학적인 이야기로 나아가는 일을 떠올려보자. 영화의 다큐멘터리적인 속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기록하므로 자연스레 진실 전달이라는 언론 역할을 한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만화는 현실에 견주어 자기를 다루지 않으므로 영화보다는 그 역할이 약하리라는 점을 쉽게 추론가능하다. 그러나 만화에 관해 물어야 할 것은 자기를 발견하는 그 과정이다. 가령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항상 바깥 세계에 견주어 돌아오는 ‘나’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만화도 ‘자기’를 발견함에서 필연으로 ‘바깥’을 요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물음에 관해서는 만화에 관해 ‘자기’가 ‘바깥’으로 기능한다고밖엔 말할 수 없다. ‘만화’는 도리어 ‘자기’의 내부에 자리잡아 스스로를 하나의 세계에 견주게끔 하는 셈이다. 즉 영화와 만화는 그 세계가 어디에 자리 잡느냐가 다를 뿐이다. 영화에 상대화해서 자기를 말하는 쪽이 있다면 반대로 만화에 상대화해서 자기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기보다 결국 자기에 다가서는 방식의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혹시 두 방법을 같이 사용하면 무언가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평소 줄곧 “‘영화는 주변부에 위치 지어지는 ‘서브’”라고 주장해왔던 입장에서 ‘자기’란 ‘비어있음’과도 같다. 그리고 이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빗금과는 다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려면 우선 그 무엇도 아닌 상태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싹 틀 숨구멍을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그곳엔 아무런 것도 피어날 수 없다. 이 점에서 영화든 뭐든 결국 서브컬처가 되어야 한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존재이고, 매체는 자기를 상대화할 용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현실주의자가 되는 건 그런 주변부의 것들이 부질없거나 몹쓸 것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은 자기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하기가 어렵다거나, 아니면 불가능한 무언가를 보고 있다거나 하는 말이 자기 존재의 발판이 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상대할 힘을 잃는다. 우리는 모두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혼자만의 힘으로 건너야 한다. 앞을 내다보는 일도, 발아래를 들여다보는 것도 모두 길을 걷는 일에 필요한 과정이다. 결국 영화나 만화나 한 사람이 현실을 가꾸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 둘을 같은 맥락에 두고 보는 건 합당하다. 보다 급진적으로 말한다면, 영화나 만화나 관점만 다를 뿐인 서로 같은 매체일 수 있다. 우리는 영화에서는 만화적인 것을 찾고 만화에서는 영화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서로는 각자 한 가지 면만을 다루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어느 다른 매체들도 이것저것 다 섞여버리면서 이야기가 복잡하게 되는 게 아니냐고 볼 수도 있다. 합당한 지적이지만 이 예시는 어디까지나 매체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와 만화 간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들은 이 세계를 바로잡기에 앞서 우리가 바로 서 있을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화에는 영화만의 것, 만화에는 만화만의 것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에 다양한 면이 있다고 해도 결국 그 일을 한 게 자신이라는 점은 변치 않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영화적’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만화적’이라는 말은 자주 듣지 못한 것 같다. 영화가 현실에 자주 빗대어지는 반면 만화는 주로 반대로 생각되고는 했다. 만화를 좋아하는 건 현실적이지 못한 일이고 그러니 어른이 되지 못한 거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계는 모두 ‘현실’적인 면에서 이해되고 판단되고 있다. 그렇다면 만화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영화적인 것이며, 영화는 만화를 이해해서는 안 되는 걸까. 구태여 순서를 따진다면 만화가 영화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상상 속의 친구를 갖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어른이 되어가며 차츰 사라지는데 이는 대개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묘사와 함께 나타나고는 한다. 특히 어린아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이 세상을 움켜쥐려 하지만 사실 순서는 반대다. 상상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반대로 이 세계에 태어난 우리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감정을 품게 된다. 현실의 우리는 상상의 ‘바깥’에로 추방된 상태나 다름없는 셈이다. 오늘날 만화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 상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 현실이 끝에 다다랐다고 여기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두렵거나 힘들 테다. 하지만 상상의 영역을 남겨둠으로써 도리어 이 세상이 아직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이른바 현실은 우리에게 현실을 완충하는 역할을 해준다. 이 자리에서 앞서 말했던 말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 영화가 바깥에 대해 알려준다면 만화는 자기를 말해준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아직 상상가능한 영역에 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몸에 성장판이 열려있었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상상판이 열려있다고, 그러니 결정된 게 아니라 성장가능한 미래로서 자신이 주어져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