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처의 ‘서브’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서브컬처란 메인스트림을 기반으로 설계된 무대다. 주류에 파생돼 또 다른 가능성을 설계하고 바라보는 게 바로 서브컬처다. 물론 이 말이 서브가 메인에 우선하지 않으니까 등급으로도 더 후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서브컬처는 현실에 전위로 설계된 시뮬레이션 우주에 더 가깝다. 현실의 온갖 잡다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무대로서 서브컬처는 추상게임과 조합게임의 현장이 되어왔다. 상상이 현실을 초과한다고들 흔히 여겨지나, 도리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상상될 수도 없다. 즉 상상계는 현실의 강한 중력에 사로잡혀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셉션>과 같은 작품을 떠올리는 일은 어느 정도 서브컬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셉션>은 중력방정식이 발명돼 인류가 우주로 이주할 수 있게 된 세계를 다룬다. 영화는 야구배트를 휘둘러 날아가는 공과 함께 화면 너머에서 작은 모래입자가 폭풍으로 다가오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야구배트를 휘둘러 날려 보낸 야구공이 상부 천장 방향의 정거장 섹터에 부딪혀 유리를 깨트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장면 구성만 놓고 보면 기타노 다케시의 『3-4×10월』이 떠오르기도 하는 한편, 세계의 중심이 바닥에서 시선으로 넘어간 이들 세계의 새 가치관이 궁금해진다. 하늘이 바닥이기도 한 세계에서 ‘시선’은 곧 대지를 뜻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과거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구성하는 기억들에 자기를 헌신하는 게 아닌가.
중요한 건 <인셉션>의 중력이 시선을 과거에 던지는 능력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중력이 현실에 맞서는 상상력의 부유가 아니라 ‘바깥’을 구상하는 능력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치 기타노의 영화가 수미상관을 구성해 사이에 있던 일을 모두 상상인 것마냥 구상하듯, 서브컬처의 ‘서브’는 우리가 바깥으로 갈 수 없는 대신 우리 현실이 바로 바깥일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바닥에 가라앉는 시간이 기억의 깊이를 대변한다면 현실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미래의 기억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에 파생되어 존재하는 서브의 무대는 그러한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고, 또 이를 토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바깥’으로 위상전환한다. 즉 서브컬처란 현실에 관한 시뮬레이션 우주론과도 같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으로 이 이론의 핵심은 ‘바깥’에 있다. 뫼비우스의 띠가 2차원의 관점에서 바깥을 제공하지 않듯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우리 우주가 시간축을 포함한 4차원의 관점에서 ‘바깥’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른바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 밖을 바라보면서, 돌아가야 하는 곳을 돌아가고 싶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단지 직진이 아니라도 좋다. 우리는 얼마든지 같은 현실을 반복할 준비가 돼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계에 가로막힌 미래가 아니라 현실을 봉양하는 과거의 작은 몸짓이니 말이다. 결정론적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 세계가 자신을 속이는 만큼 자신도 세계를 속이는 일이다.
세상은 속고 싶어한다. 그러니 속여 주어라. <붕괴: 스타레일> 엠포리우스 이야기의 4장은 황금의 후예가 불을 쫓는 여정을 마무리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4막에서 히아킨이 반신에 올라 셀리오스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사이퍼라를 포함한 후예 다수가 희생된다. 이때 사이퍼라는 자신이 자그레우스의 신력으로 한 세계를 속여왔음을 고백하면서 ‘사실이라고 믿는 일을 구현하는 능력’을 언급한다. 그 말인즉 이 신력은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믿음에 대한 성원과 지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 세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세계도 사람들에 영원을 돌려준다. 이는 불을 쫓는 여정이 재창기에 대한 믿음이라는 뜻에서 ‘바깥’에 대한 믿음을 쫓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른바 폭발 이후에도 이 세계가 살아남는다면, ‘리부트’란 건 영원과의 단절이 아니라 올려 보이는 시선을 세계의 무게감에 덧씌우려는 시도인 셈이다. 그러니까 불을 쫓는 여정은 어떤 면에서 세기의 대폭발을 구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폭발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는 이후를 알 수 없기에 아무런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폭발 이후 세계가 재시동된다면 우리는 역시 이전을 알 수 없기에 무엇이 두려운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재창기는 한 미래로 가는 열림을 획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망각의 질서를 따라 한 세계의 꺼짐을 바라보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결국 이 세계는 묵시록이 아닐까? 이후 사이퍼라의 사망으로 오크마의 여명 기계가 꺼지면서 오크마에 검은 물결이 닥쳐온다. 모든 이야기가 영웅의 퇴장과 함께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시점은 개척자와 파이논, 미미와 히아킨이 천공에 올라 아퀼라를 상대하는 때로 이동한다. 엠포리우스의 중간 막을 장식하는 이 전투에서 히아킨은 불을 쫓는 여정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을 시험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계를 멸하는 움직임에 내려진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다. 위대한 선조는 사실 겁을 먹고 도망친 세계의 망명자에 가까웠고, 아퀼라는 셀리오스에 의해 정복당해 자신의 어두운 면에 삼켜진 이후였다. 신에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하늘이므로 여정의 끝이 천공의 섬으로 향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테다. 그러나 이 믿음이 재창기에 관한 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세계에 대한 믿음이 깨어진 후에도 여전히 이 세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믿는다면, 사실 그 믿음은 ‘다시’가 아니라 죽음을 지연하는 궤적에 관한 게 아니었을까? 세계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항구적인 죽음의 상태를 경험해 보는 것이 바로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 침잠은 과거의 강한 사로잡힘이 아니라 미래에의 부상을 올려다보기 위한 솔리톤 방정식에 가깝다. 솔리톤 방정식은 현시점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 운명의 길이 현실에 구체화하는 과정을 가리켜왔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면 특정한 사건이나 현상이 현실에 분기되어 오는 순간을 연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지연하는 궤적에 관한 역산은 탄생의 순간을 ‘발동’하고 또 이를 포착하는 일에서 불확실성을 얻는다. 누스는 우주의 이 순간을 연산하는 데 성공해 지식의 사도가 됐고 이는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연산자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됐다.
작은 틀에서 엠포리우스는 이에 대한 실험대인 것처럼 보인다. <붕괴: 스타레일>의 엠포리우스는 ‘윤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설계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건 시뮬레이션 우주다. 뫼비우스 띠의 형태를 한 이 행성에서 황금의 후예는 재창기의 순간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이는 재창기가 곧 이전의 순간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죽음은 본질적으로 ‘바깥’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엠포리우스의 이야기는 인간이 신에 이르는 과정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예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다. 이 예언은 모든 불씨를 한데 모을 때 세계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신들의 죽음을 요구한다. 인간의 신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저버린 인간성의 면모를 살해하고 다시금 신격을 세계에 되돌리는 것처럼 보이므로 우리가 아는 어떤 의미에서의 ‘신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신격은 인간의 육신을 통해 운반되는 밈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이 밈은 단지 한 세계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필연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의 몸이 필히 멸한다면 신의 인격은 필히 닿는다고나 할까. 같은 의미에서 파이몬과 불을 훔치는 자의 관계는 인간 대 신으로 양분되어 있다. 파이몬이 어떤 세계에서도 여정의 마지막에 섰다면 불을 훔치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불씨를 따라잡는 게 가능했다. 이 둘의 관계는 결국 서로가 하나로 합해질 때 이야기가 멈추므로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끝내 그와 같은 반복이 계속돼야만 한다. 이게 바로 인간의 의지를 증명해 보이려 했던 최초의 황금이 다시금 천공에 오르게 된 계기다.
어떤 점에서는 게임이 갖는 반복 플레이의 속성 자체가 플레이어의 손으로 직접 단절되는 ‘바깥’의 경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엠포리우스의 여정에서 개척자의 개입은 그와 같은 반복에서 개척의 의지를 발현하고, 이를 토대로 ‘바깥’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에 단항은 은하열차로 돌아가면 엠포리우스의 모든 이야기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엠포리우스는 바깥에서는 내부가 관측되지 않으며 반대로 내부에서는 바깥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곳에서 리고스는 자신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라고 말하며 중립을 선언하지만 반대로 이는 우리가 매체에 보내는 중립적인 시선이 사실은 프로그래밍된 코드 안의 시뮬레이션 우주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하늘에 오르는 엠포리우스의 여정은 한 세계의 궤적을 따라가고 또 이를 다시금 ‘내부’로 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 우주라면 사물은 그 자리에 정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품에 안는다. 여기서 주체는 그와 같은 순간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어떠한 가능성이 확증되는 순간을 증명한다고도 여길 수 있다. 즉, 이미 모든 미래가 결정됐다면 이 운명은 과거의 한때를 확정 지을 수도 있을 테다. 결국 여기에 필요한 건 파국의 바람을 이겨내는 호랑이의 도약이다. 아퀼라는 태양을 숭상했지만 폭풍우치는 날을 몹시 싫어했다. 그렇다면 서브컬처가 우리 현실에 관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라는 말은 반대로 현실이 우리를 그와 같은 ‘바깥’으로 숭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