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트의 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인물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순간에도 고도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진다. 고도가 언제 올것인지를 묻던 이들은 자리를 떠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고도가 고유명사처럼 보이는 것만큼이나 그들도 이 세계에 박혀 떠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서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가 그렇다. 영화에서 운동성은 시간의 지속과 얽혀있어서 자리를 뜨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말그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서 여운에 잠긴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 순간 시간이 멈췄고 영화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점은 그가 언제나 그곳에 멈춰있으므로 우리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이게 진정한 뜻에서의 이별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멈춘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정지’의 순간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특정한 좌표를 갖는다는 말은 이 시간이 하나의 평면으로 펼쳐져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이 공간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그저 걸음걸이 만으로 자기에 포섭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과거를 역행하는 게 아니라 그저 평면 위의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는 것 뿐이다.
<건담 지쿠악스>는 사이코뮤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런 식’이라고 말한 건 연출이 조금 더 요즘 분위기에 맞게 정돈됐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이코뮤는 보통 ‘또로롱’하는 효과음과 전개되는데 <지쿠악스>에서는 사이코뮤에 감응하는 일을 마치 뉴타입의 정신군체에 접속하는 일처럼 묘사한다. 주인공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향하며 자기와 멀리 떨어져있는 다른 뉴타입에 교류하게 된다. 중요한 건 여기서 시간은 공간적 개념이므로 자기보다 시간에 앞서 있거나 한 다른 누군가에 ‘감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롤로그의 일년전쟁 시점에서 실종됐던 붉은건담이 주인공의 정신에 끝없이 접속해온다. 샤아의 기체로 알려졌던 붉은 건담에 탑승한 게 다른 사람(슈우지 이토)임이 밝혀졌으므로 주인공이 과거의 뉴타입이었던 샤아와 정신공간에서 만난다는 이 추측을 사실로서 다룰 수는 없어보인다. 다만 샤아의 전우 샤리아 불이 ‘과거의 붉은 건담’을 쫓는다는 점에서 붉은 건담은 여전히 샤아로서의 표지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 붉은 건담과의 만남은 실질상으로 ‘과거’와의 감응처럼 보이게 된다’고 전제해두려 한다. 샤리아는 샤아가 실종된 이례 ‘뉴타입’의 감으로 그가 살아있으리라고 믿는다. 샤리아는 그동안 붉은 건담을 쫓아왔고 그때마다 샤아가 아닌 걸 알고 몹시 실망했다. 붉은 건담은 여전히 그를 사로잡는 기억이다.
샤리아가 붉은 건담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일은 전적으로 ‘논외’의 이야기다. 작품 본편만으로 보면 샤아는 누구인지 몰라도 별 상관없을 정도의 배경에 불과하다. 그러나 프롤로그 이후, 작품 밖의 독자들에게 ‘붉은 건담’은 여전히 샤아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며 주인공과 함께 하는 붉은 건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샤아는 붉은 건담이 되어 이들과 함께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중요한 건 뉴타입의 정신감응이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과거와 미래, 현재의 뉴타입을 한 자리에 공명하는 ‘의식’이 된다는 점이다. 뉴타입은 특정한 계보이기보다 카테고리군에 가까워서 ‘나’는 ‘너’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믿는다. 뉴타입은 선대와 후대가 아닌 ‘동질적인 인류군’에 속한다. 건담에서는 이를 ‘포스트 휴먼’ 타입으로 설명하는데 우주의 환경이 인류의 어떤 무언가를 자극해 새로운 능력이 발휘된다는, 그런 저런 가설로 두루뭉술하게 메워져있다. 이를 보면 뉴타입은 과거와 미래 같은 기존 시간이 아니라 분기가 되는 ‘이후’로의 시간을 살아간다고도 볼 수 있겠다. 뉴타입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에 의해 인류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진화의 관점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나아가야할 본산처럼 묘사된다. 마치 세계시민을 위한 감각적인 향유처럼, 뉴타입은 인간이 아직 진화중에 있음을 증명하는 지속의 의지적 발현처럼 묘사된다.
그렇다면 뉴타입은 현재에서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라 그 과거가 현재에 닿을 수 있다고 보는 타입의 인간상은 아닐까? 마치 <진격의 거인>의 엘런처럼 뉴타입은 어떠한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순간의 경험을 확장해 자신의 온 삶으로 물들이는 게 바로 뉴타입의 세계다. 뉴타입은 자신의 과거를 ‘흑역사’로 처리하기보다 그것이 자기 삶의 한 구획이라고 본다. 원작에서 샤아가 속한 지온은 히틀러와 같은 나치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뉴타입은 그런 역사에 직접적으로 감응하며 포스트-진실을 현화하기 때문에 비극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지쿠악스>의 샤리아는 단순히 과거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그런 반복에서 자신이 이탈하지 않게끔 인식을 붙잡는 것처럼 보인다. 샤리아가 샤아를 바라보는 마음은 분명 동료의식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샤아가 있던 원본 우주세기의 ‘어둠’을 줄곧 되찾고 기억하려는 마음처럼 보인다. 이 만화에서 샤아는 우리가 아는 우주세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됐다. 작중 인물들은 샤아의 붉은 건담을 두고서 ‘유령’으로 취급하는데 그는 여기저기서 목격담으로만 유통된다. 원본이 흑역사로서 잊혀져야 할 ‘유산’이었다면, 본편의 샤아는 ‘유령’으로서 출몰해서는 안 될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이다.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 시점의 샤아를 만난다고 보면 이 뉴타입이란 것은 정말로 으스스한 게 된다. 주인공은 과거의 망령과 만나는 것일까? <지쿠악스>의 붉은 건담은 샤아를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떨어져나온 분기 이전으로서의 원작을 줄곧 생각하게 한다. 붉은 건담의 출현에 대한 인물들의 대화는 돌아온 과거에 대한 동경일 수도 혹은 경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가 정말로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뉴타입의 샤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 역사의 한 순간을 붙드는 건 이 세계를 동질적으로 바라보려는 공존과 평등함에의 매혹이다. 건담을 말하는 데 우주세기를 빼놓을 수 없듯 이 평행우주에서도 ‘붉은 건담’은 줄곧 작품 전반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를 구시대의 망령으로 두지 않고, 이시대의 유령으로 두는 일 말이다. 더 나아가 물리적 공간을 넘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건 공간으로서의 매체를 생각해보게 한다. 얼마나 떨어져있든 샤리아가 샤아의 ‘존재’를 느낀다는 점에서 이 둘은 마치 양자 얽힘 상태인 것만 같다. 양자 얽힘은 그 사이거리가 어떻든 간에 곧바로 이 둘을 동작시키며 이로 인해 관찰자에겐 그 둘이 시간을 극복한 듯 여겨진다. 빛의 속도 보다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핵심은 그 둘이 본래부터 하나였다는 점, ‘둘이였던 것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였던 게 둘이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양자역학은 그게 시간을 극복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였던 상태로 다른 좌표계에서 관측된 것일 뿐이므로 본질적으로는 ‘하나’인 순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영화는 이들이 어디를 가도 다시 한 순간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 논의를 따라가면 아무쪼록 비평의 원리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한 순간에 자신의 시간을 꽂는 일을 두고서 자리를 뜨지 않는 일로 설명한다. 마치 바다에 정박한 배가 자리를 뜨지 못하듯 무언가에 자신을 ‘던진다’는 건 한 세계에 빠져드는 일에 비견된다. 영화가 지닌 유령의 정서는 ‘한때 분명 실존했지만 지금은 현실에 부재한 것’을 한 장소에 불러내는 매체로서의 힘에서 파생된다. 그래서 이는 마치 한 매체를 두고서 한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각계각층으로서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샤아의 실종에서 출발한 이 만화는 본질적으로 그가 ‘생존’해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후에 등장하는 뉴타입도 자연스레 그를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따라 ‘위치짓기’는 영화의 공간 안에서 무력화된다. 이 영화는 하나의 순간으로서 관객을 서로 ‘얽힘’ 관계에 놓는다. 영화는 우리의 지나간 역사와 담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도 한 곳에 모을 수 있다. 이는 영화와 관객 간의 거리는 본질적으로 평행이 아니라 ‘즉각’에 가까울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엔 그런 힘이 있다. 영화는 우리가 무언가를 잃고 있다고 믿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