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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를 과장한 세계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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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악스>에서 샤리아는 ‘2인조 전법’ 마브의 개발자로 자신이 언급되는 상황에 말을 얼버무리거나 하며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개발’한 게 아니라 뉴타입의 정신세계 안에서 ‘감응’했을 뿐이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일 수 있다. 뉴타입은 서로가 얽힘 관계에 있어서 무언가 행동하는 일이 곧 ‘결정’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에 연결돼있고 단지 표현하는 수단만 다르다면, 자신은 단지 수신기에 불과한 게 아닐까? 영화 비평도 비슷한 면이 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하고 그걸 어떻게 풀어쓰는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뿐이다. 김신은 KMDB에 기고한 글에서 시네필들이 마치 하나의 군체처럼 느껴진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은 시네필이 그만큼 폐쇄적이고 동질적인 유전자풀을 공유한다고, 이너 그룹 문화를 향유한다고 비판하는 쪽이지만 이런 쪽으로도 얘기해볼 수 있다. 같은 생각을 두고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어쩌면 ‘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이다. 우선 한 사회 안에서 대중은 집단으로 살거나 개인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받는다. 대중으로 산다는 건 대중의 일부로서 이미 전제된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 안에서 대중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적어도 외부를 향해 무언가를 ‘선언’하기 전에는 미확정인 상태로 규정된다. 즉, 영화평론가가 되려는 건 외부세계에 관측되고 싶다는 마음과도 같다. 외부에 관측되기 전에는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는 유독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하야오에게 비행기와 더불어 하늘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외부에 잘 관측될 만한 장소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천체 우주망원경은 외부의 간섭을 줄이려고 최대한 개방된 장소에 건설된다. 우주와 신호를 주고 받는 안테나 접시도 사방이 개방된 부지에 건설되는 건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외부’와 소통하려면 어떠한 형태로든 ‘열림’을 체득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선수와 코치의 페어로 구성되는 스포츠가 주는 깊은 감동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부터 츠루마 아카다의 <메달리스트>까지, 약한 연결고리를 넣는다면 <우마무스메>나 여성 주역으로 이뤄진 두 <건담> 시리즈까지. 이들 영화나 만화의 공통점은 외부에 의해 개인으로 발탁되는 쪽과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선언하는 쪽 모두에서 합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마음이 닫힌 쪽에 다가가 먼저 문을 두드리거나, 상대방에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면서 마주하는 미래를 안으로 내보내는 것. 스포츠 장르란 게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을 ‘전체’로 지속하는 일이라면, 이는 양쪽이 맞닿는다는 뜻에서 대중 안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특별함을 선사하는 것일 테다. 아직 ‘미래’에 ‘열림’을 확보하지 않았으면서도 동시에 개인으로서는 ‘열림’으로 존재하는 얽힘 상태 말이다.


이렇게 ‘링’ 위에 서는 감각을 잘 기억해두자. 전자가 어딘가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라면 후자는 누군가가 다가와 주었으면 하는 쪽이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에 영향을 미쳤을 때 나오는 움직임이 바로 포옹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포옹할 때 두 세계는 서로에 안고 안기는 두 가지를 함께 한다. 집단인 동시에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이 모습이야말로 아직 무언가 결정된 바 없다는 ‘미확정’의 상태다. 정해진 룰과 시간으로 지속하는 경기는 무대에 올라온 개인에 기회와 가능성을 부여한다. 패색이 짙어져 더는 무대를 진행하는 일이 의미가 없어질 때도 있지만, 이 경기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시간을 소유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마치 영화가 우리가 어떠한 ‘시간’을 구매하는 행위가 되는 것처럼 이 시간들은 전적으로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 영화 평론가가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듯, 우리에겐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메달리스트>는 피겨 스케이트가 웃는 얼굴을 끝까지 ‘연기’해야 하기도 하지만, 스케이트의 특성상 운동력을 밀고 나아가야 하므로 그만큼 시간이 운동-이미지에 등치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운동-이미지가 구성하는 형상은 스케이트가 체현하는 신체의 몸짓에 반응한다. 무엇보다 <메달리스트>는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눈에 비치는 세계의 저편에 자기를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응원하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끌어안은 문제가 있다. 이 ‘일부’를 과장한 세계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리코리스 리코일>은 여고생 암살자가 공공연하게 국가기관보다 상급기관으로 자리하면서 동시에 여러 하이퍼테크놀로지적인 기술력이 현대 일본에 적용된 애니메이션이다. 이것들은 각각 놓아 보았을 때 태클을 걸고 싶어지지만 한곳에 모아두면 어찌저찌 그런 세계라고 납득되는 듯하다. 영화란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세계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숨기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일부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과장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기를 ‘무슨 일’의 시초로 삼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넘어서 존재할 수 없다. 현실이 확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결과로서 제시하기에 얽힘 관계에 있는 영화도 현실과 동시적에만 존재할 수 있다. <건담 지쿠악스>를 언급해두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지쿠악스>의 감독 츠루마키 카즈야는 ‘지쿠악스’를 만들 때 스태프에서 들었던 말 중 하나가 “건담에 전쟁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그 말처럼 <지쿠악스>는 우주세기와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우주세기의 ‘if’로 설정된 대체 우주다. <지쿠악스>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전쟁이 끝난 후 여고생의 현대적인 일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연스레 ‘전후’를 살아가는 세대가 된다. 주인공 마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을 이 땅에 서 있게 하는 중력이 ‘가짜’라고 선언한다. 우주정거장이니까 구심점도 없어서 신체가 유일한 중심이 된다.


피겨 스케이팅은 인체의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한 스포츠다. 흥미롭다기보다는 공교롭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레이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와 같은 ‘전후’를 계승하기 때문이다. 레이와는 전후에 태어난 이들이 대부분 사망했을 무렵이라,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를 찾기 힘들다. 레이와에 출생했거나 해당 시기 자라난 청소년 세대는, 전쟁 경험과는 간접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됐으며 이를 따라 전쟁론에 대한 ‘이후’가 부재한다. 거대서사의 영향 밖에서 태어난 이들 세대에게 하늘은 올려다보거나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들에게 바깥은 자신이 잃어버린 게 아니니까 구태여 돌아가거나 할 곳이 아니다. 즉 레이와는 인식론적으로 단절되었다는 뜻에서의 ‘포스트’로 이해된다. <지쿠악스>를 건담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그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처음 시작하면 우주세기의 주역인 샤아가 실종된다. 이보다 더 직설적으로 세대교체를 말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중요한 건 이 세대교체가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를 암시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최근 전쟁이 정말로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다른 나라로 떠날 수 있지만 여러 여건상 그게 힘든 상황’을 언급한다. 이는 작중에서 주인공 마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사는 콜로니의 인공 중력을 의식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설사 이 세계가 거짓이라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시네필처럼, 오늘날 영화는 ‘감금’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유사-감금의 경험을 제공한다.


스페이스 콜로니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은 바 없고, 건담이란 게 전쟁병기가 아니라 지하격투장에서 유사 전쟁 체험만을 제공하는 장비로 전락해버린 <지쿠악스>의 우주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밀레니엄 시네필들은 필름을 경험하지 않았으면서 필름룩을 그리워하거나 하는 식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유사-중력에 묶어두려 한다. 그래서 이따금 이 시대의 시네필이란 건 결국 ‘얽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동진이 한 영화가 좋다고 하면 나도 갑자기 그 영화가 좋아진다. 한 사람이 영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명하면 나도 그 연결고리에 들어가 무언가 힘을 보태고 싶다. 이 둘은 명시적으로 서로 무관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무관한 것들이 서로 즉각 영향을 주고받기에 ‘얽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리적인 형태의 영화와 연결점이 없는 세대가 영화의 물성을 그리워하는 일이 이상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금동현은 KMDB에 기고한 에서 마이크로시네마에 대한 최근 조명은 ‘포스트 2010년대’를 실천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 문화 자체가 전체 문화 안에서는 ‘개인’쪽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문화 안에서만 발효되어 효력을 갖는 이 양해각서는 영화의 영토를 벗어나면 휴짓조각이 돼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영화에 바친 이보다는 도리어 영화의 바깥에서 영화를 어떠한 삶의 영역처럼 여기는 편이 더 많다. 즉 시네필의 행동 특성이 ‘대중’쪽에 가깝다면 이는 사실 ‘거대한 개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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