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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모든 것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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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은 ‘기시감’이라는 표현을 따라 ‘기멸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기멸감은 “이미 멸망한 것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는 듯한 감각”을 가리킨다. 이미 사라졌지만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세계가 야기하는 감정을 우리는 ‘기멸감’이라 불렀다. 특히 기멸감은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세계에 관해 말하기에 그 상실감이 배가된다. 왜냐하면 기멸감은 세계의 소실에 관해 그것이 회복되기보다는 이미 절멸해 가는 쪽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기멸감은 아무리 해도 되돌릴 수 없게 되는 시점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감각이다. 더는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 치료가 아니라 치유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세계는 거대한 상실의 늪에 빠져든다. 그러니 기멸감은 단순히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감각인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무기력과 절망이라는 희망의 반대편에 선다. 이 세계가 기멸감에 빠져들지 않게끔 해야 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존재했던 것을 기억하고 이를 추모해야 한다. 하지만 이 존재함에 관해 말하는 일이 어느 임계점 바깥에서 이를 탈출하려는 시도에 대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붙잡으려 하는 순간은 허공에 발판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건너보려하는 순간과도 같다.

씨네21에 올라온 이우빈의 “언제까지 치유할 것인가? 언제까지 눈을 피할 것인가?”를 읽었다. 일본영화가 ‘치유’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는 동감하는 바가 크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전부 치유를 말하고 있던 건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즉, 도리어 우리가 치유에 관심이 있으니 그런 쪽의 작품을 더 눈여겨본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일본영화에서 치유를 키워드로 발견하는 일은 반대로 왜 ‘치유’가 영화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영화란 더 풀어가 볼만한 이야기가 남았을 때를 가리키므로 ‘치유’를 영화화하는 일은 어떤 쪽으로든 잔여가 남았음을 뜻한다. 회복될 수 있거나, 소실되어 가는 와중이거나. 그리고 그 중간에도 이야기할 지점이 있다. 회복될 수도 없고 소실될 수도 없는 유예의 상태도 영화의 대상이 된다. 오히려 영화는 무언가를 말하는 일에 더 부담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회복될 수도 없고 소실될 수도 없다고 말하는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유예의 시간은 오직 영화에만 허락된 시간이다. 영화는 어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소년성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일본영화에서 치유를 발견하는 일은 기실 ‘소년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큰 범주로 보면 이러한 소년성은 일본영화에만 속한 성질이 아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항쟁의 기억을 다양한 인물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소설에서 소년은 광주에 대한 기억을 다양한 위치에서 바라보며 이를 하나의 교집합으로 묶는 ‘장소’가 되어주고 있다.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광주는 다양한 형태로 바라보아지며 변화를 마주했지만 소설이 다루는 광주는 아무런 것도 바꾸지 못했다. 광주는 있는 그대로의 광주였을 뿐이다. 무언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기억이 무너질 것만 같다고 느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오염과 충격에 취약해서 때 묻은 마음으로 대할 때 쉽게 망가진다. 영화가 지닌 불가침의 속성은 우리가 영화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오르세우스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오르세우스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어겨 사랑하는 아내를 저승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영화에서는 이와 반대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영화는 뒤를 돌아보면서 이를 스크린에 돌려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우리가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반대로 영화를 통해 우리의 세상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가 말하듯, “분노에 차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그런 기억을 재현하려 했던 걸까? 왜 소설의 제목은 ‘소년이 온다’일까? 무언가를 재현한다는 건 우리가 그에 묶여있다는 뜻과도 같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은 반대로 이를 잊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장하고 싶다면 이를 멀리해야 한다는 몇몇 의견이 있다. 그러나 한강은 “소년이었다”라거나 “소년은 간다”가 아니라 “소년이 온다”를 택했다. 소년이 ‘간다’가 회복될 수 없음을 택한다면 ‘온다’는 소실될 수 없음을 말한다. 즉 ‘온다’는 “기억할 수 없음”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음’에 대한 ‘없음’이다. 영화가 지닌 소년성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숲이 사라지지 않게 한다. ‘간다와 ‘온다’는 불가항력이 담겼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지만, 소년을 말하는 대목에서 서로 다르다. 그러니 이 질문은 방향성을 달리 해봐야 한다. 영화는 기억을 재현하려 했던 게 아니라 묘사해 보려 했던 것뿐이다. 어른이기보다는 어른을 연기하고, 괜찮아졌다고 말하기보다는 괜찮은 척을 한다. 인간의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언제까지 치유할 것인지, 혹은 눈을 피할 것인지를 묻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항상 거기 있으니까 언제라도 뒤를 돌아봐야 한다.

영화를 기억이 담긴 매체로 바라보면 영화에 이야기를 담는 일은 곧 우리가 이를 기억하는 행위 능력에 빗대어진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음은 그만큼 기억할 것들이 많다는 점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이야기할 게 없으면 아무런 기억할 것도 없다고 여기며 ‘침묵’을 경계하는 성향이 강하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침묵이 갖는 의미를 떠올리면 사람들이 왜 이와 같은 침묵을 경계하게 됐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법하다. 하지만 고통을 말하는 법에는 종류가 다양하다. 고통을 다르게 말한다고 해서 서로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듯 영화도 결국 한 세상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다큐멘터리’란 어떤 것을 가리킬까? 이우빈은 “한국영화의 픽션엔 다큐멘터리적인 감각이 부재하다”고 말하며 픽션과 치유를 가분의 관계로 설정한다. 이 물음은 개인적으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라는 이분법을 말하는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 말인즉, 한국의 상업영화에는 왜 예술적인 감각이 부재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는 소리다. 한국영화에서 예술적이라는 말은 영화학과 사회학의 결합, 즉 ‘침범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욕이다. 한국영화가 말하는 것들은 상대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것들로만 구성된다.

한국영화의 픽션에 다큐멘터리적인 감각 부재를 지적하는 일은 기실 그 안에 등장하는 개인들의 삶과 영역, 세계에 대한 관심이 부재하다고 말하는 일과 같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 아마도 한국에서 고통은 ‘말하는 것’이기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 주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리라. 불가능성으로의 재난을 바라보는 시점이 시선에도 적용됐고, 이를 따라 ‘다큐멘터리’란 건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고통은 나누어질 수 없다. 서로 짐을 나눌 수는 있지만 고통의 성격을 서로 다른 것으로 다룰 수는 없다. 고통은 말해야 하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두 개 방향으로만 갈릴 뿐 본질에서는 결국 하나다. 더는 치료가 무의미하고 치유하는 일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 다큐멘터리는 그 시선을 던지는 능력을 잃는다. 단순히 영상을 기록해 둔 조각모음집에만 머물게 되어 이 세계가 현실감을 잃지 않게만 해주는 보완기구에만 그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영화와의 결합에서 그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 장르로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현실의 성장동력으로서 다큐멘터리는 이 현실이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김병규가 말한 워크숍의 기능은 도리어 영화만이 진실된 의미의 공론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떠올리게도 한다. 워크숍은 현실의 ‘바깥’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꺼낼 수 있는 의안 설정 기구 역할을 한다고 그는 말한다. 가령, 현실에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채워져 합승하기 어렵다면 영화에서는 이를 극복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영화가 ‘바깥’이기에 불가능성을 말하고 꾸밀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말해질 수 없는 고통의 크기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를 따르자면 현실은 말하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 사이에 자리하면서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 이 기멸감은 동시에 우리가 왜 지난 날을 잊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한다.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이 이야기가 끝을 상대할 것이라는 점은 거진 죽음의 속성과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게 죽음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현실은 항상 무언가를 돌아보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많은 바깥들을 상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상대하면서 그 자신이 이 자리에 서있음을 느낀다. 설사 그게 선명하게 드리운 그림자의 구역이더라도, 언젠가 세계는 태어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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