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에서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기획을 진행한다. 1년여간 6개의 주제로 24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이 기획은 크게 보았을 때 ‘21세기만의 것’을 탐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여태껏 20세기의 거대이론이었던 들뢰즈나 라깡, 프랑스 철학 등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어떠한 뿌리의 이동에서 이탈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20세기의 다음으로서 21세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21세기 영화’란 엄밀히 말해 이상한 표현이다. 21세기 영화로 지칭되는 것들은 자신을 21세기 영화로 소개하지 않는다. ‘21세기’라는 꼬리표 자체가 20세기에 반해 성립하는 반면 ‘21세기 영화’는 자신을 무엇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다’. 무언가를 따라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앞선 것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자기를 소개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테다. 21세기 영화는 적어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출발해야 필요가 있다. 이민자의 경우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거와는 관계없이 ‘나’로 인정받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21세기 영화의 존재론적인 성격을 떠올리면 이는 더 심화된다. 21세기 영화는 본래 영화가 갖던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발현된 형태이면서 동시에 고전 영화 이론의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다(마지막 필름 영화는 21세기 들어 멸종했다). 그래서 21세기 영화는 자발적으로 나서 ‘21세기’를 자청하지 않았다.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우리의 호응이 그들을 ‘바깥’으로 내몰았을 뿐이다.
21세기 영화라는 말은 사실상 ‘뉴타입’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것 같다. 토미노의 ‘건담’ 시리즈에서 나온 이 설정은 우주로 나아간 인간이 인체의 남은 가능성을 사용해 더 높은 인지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 영화가 제작되어 유통되는 환경을 그렇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디지털 환경은 영화의 생존이나 활동을 제약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영화의 남은 가능성을 끌어내어 준다고. 이 논리대로라면 ‘디지털’은 영화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이 아니라 도리어 진화와 확장의 무대이다. 21세기 영화는 20세기의 다음에 오는 만큼 전보다 후퇴하는 건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동안 알아왔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등장했다는 의미에서 ‘뉴타입’에 보내는 경계 어린 시선이 있다. 뉴타입은 인류의 다음 단계이면서 동시에 동시에 통제 아래 두어야 하는 강한 힘을 지녔기도 하다. 이 양가성이 21세기 영화가 20세기에 투쟁심을 발휘하게 한다. 21세기라는 ‘바깥’으로 밀려났을 뿐인데 어찌하여 20세기는 우월한 것으로 취급되는 건가. 도리어 디지털 시대로 나아간 자신들이야말로 내재한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으니 더 우월한 게 아닌가. 디지털은 필름 영화가 할 수 없던 편집이나 질감, 작업효율 면에서 더 월등했다. 디지털이 처한 환경은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아서 부유하고 또 불안정했지만 그럼에도 이들에겐 자유가 있었다. 방향 없음의 자유, 뿌리가 없는 유목민족에서 창발성으로의 이행. 뉴타입은 편하게 부릴 수 있는 무언가다. 이른바 ‘21세기 영화’란 20세기 영화가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다.
21세기 영화는 고전 영화이론의 바깥이라는 점으로 이해됐다.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론들은 과거를 참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산을 물려받는 일처럼 여겨졌다. 만약 영화 매체가 하나의 산업이라면 21세기 영화는 가업을 물려받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영화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20세기 영화를 참조했다. 이는 영화의 역사가 어떠한 역사성과 계보학을 세워보려던 일에 비견될 수 있어 보인다. 미국의 역사가 슈퍼히어로 장르나 서부극 등에서 기원을 찾는 것만큼이나 고전 영화이론은 짧은 시기에 많은 장벽을 획득했다. 영화의 역사가 짧은 만큼 그 안에서 다시금 존재의 근거를 찾으려 하는 행동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유머는 실패한 농담이다. 영화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할수록 점점 더 영화는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21세기 영화는 실패를 피하고 자신의 안에 영화사를 붙들기보다 내부를 공란으로 두기를 택한다. 영화사를 ‘내포’하기보다는 단순히 안쪽에 둔다고만 가정하면 위험은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영화를 프레이밍하는 시도가 21세기 영화에 등장한다. 가령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영화 안에 공란으로 두고서는 이를 독자의 몫으로 둔다. 그 안에 어떤 현실이 있을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돌리며 영화가 지닐 수 있는 윤리학과 미학의 충돌지점을 교묘히 피해간다. 이 영화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어느 현실을 전달하는데 성공했지만, 한편으로는 ‘실패’의 ‘바깥’으로 획득해낸 성과이기도 하다.
모든 우주인은 지구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21세기 영화는 디지털이기 전에 ‘영화’다. 아무리 21세기 영화가 자신을 ‘뉴타입’으로 바로 세우려 한들 고전 영화 이론의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두 세기의 관계가 그렇다. 21세기가 20세기를 실패의 역사로 바라볼 때 21세기가 말하는 성공이란 무언가를 성취한 게 아니라 ‘바깥’으로서 얻어진 것에 불과하다. 실패하지만 않았을 뿐이라면 실종상태로 사라져버린 것과 별다를 바 없다. 앞선 것을 두고 자기만의 것을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익숙한 담론이지만, 문제는 이와 같은 생각이 지배의 도구로 사용될 경우다. 21세기 영화는 20세기 영화보다 결코 더 우월한 건 아니었지만 계속되는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이 지구에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지구를 망가트려 버리면 되겠다고 혹자는 생각했다. 21세기 영화는 어느 순간 영화의 틀을 벗어났고, 20세기 영화만 없으면 세상이 자신의 세력원에 들어오리라고 여겼다. 이는 물론 자신들이 영화 매체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바깥’으로서 규정되는 21세기 영화는 자신이 직접 무언가에 작용하기보다 어느 현실에 반향되어 오는 처지일 뿐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디지털 영화는 자신이 떠나온 고전 영화 이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한 세기를 넘어온 영화는 개척자의 위대한 여정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해야만 했다. 지나온 현실이라도 이전과는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서는 안 됐다. 영화가 보여주는 담론에서 반복되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사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21세기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영화를 하나의 내부로 두기보다 한 세계의 ‘바깥’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열린 결말’이라던가 ‘맥거핀’이라던가 하는 말은 영화가 하나의 내부로만 존재하던 때의 산물이다. 그러나 21세기 영화는 내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기를 택한다. <노 베어스>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가 대표적이다. 이들 영화는 한 세계를 보여준다기보다 한 세계를 등지고 서 있다는 쪽에 가까워서 반대편에 있는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노 베어스>의 경우, 우리가 보지 못한 현실이 있지만 이 내용은 영화 안에 담기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뒤를 보는 법은 앞뒤로 거울을 두는 것뿐임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뒷모습은 영화 안에 담기지 않지만 그럼에도 영화 안에서 관찰가능한 형태로 제시된다. 과거에는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울처럼 기능했지만 오늘날에는 정반대로 영화가 우리 자신을 제시한다. 영화는 관찰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마주하게 될 미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20세기 영화가 한 세계의 틈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면, 21세기 영화는 우리에게 시간을 보여준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건 디지털이 갖는 특권이다. 시간을 쌓아올리는 게 아니라 이를 평면에서 관찰함으로써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올라올 수 있음을 믿는 것, 여기에는 역사학도 계보학도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바깥에 자리한 것들이 내부를 감금하거나 질량 있는 사물을 투하할 수 있다는 점뿐이다. 21세기는 20세기의 확장판본이자 식민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열을 갖지는 않는다.
높은 유동성을 지닌 디지털은 그보다 무거운 질량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질감에 우선했다. 그런 굳건함을 부러워하는 이도 있었지만, 반대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로 여기는 이도 이었다. 무엇보다 21세기 영화에서 잊지 말아야 할 건 ‘디지털’을 만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디지털은 위험한 현장이나 잊힌 과거를 살려내는 등 다양한 면에서 활용될 수 있다. 이 덕분에 21세기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물화하는 데 성공, 과거에서 미래라는 선형성에 구애받지 않게 됐다. 하지만 디지털은 현존했던 무언가를 쫓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두려워 미래를 섣불리 닫기보다는 등장하는 순서에 따라 미래를 마주하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21세기 영화와 20세기 영화 간의 관계는 구시대와 신시대가 아니라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영화가 자신의 시간성을 드러냄으로써 ‘착오’가 발흥하고 이는 소위 시대성이 아니라 카메라 하나 안에서만 존속하는 정체성에 가깝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의 ‘착오’를 전쟁이나 폭력 같은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 21세기 영화에서 ‘착오’는 영화와 우리 현실이 항상 나란히 공존함과 그것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온 문제임을 주지시킨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그렇다 한들 함께 살아가는 일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현실을 살아가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현실을 등진다면 이는 현실을 끌어안고 보호하고자 함이지 자리를 떠나 등을 돌리라는 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