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츄얼 스트리밍 업계에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연극과의 유사점이다. 연극은 실제 배우와 연극 속 배역을 한데 겹쳐 보는 매체로, 이 안에서 배우의 신체는 연기의 흐름에 종속된다. 연극을 하는 동안에 관객은 배우를 의식하지 않기로 합의하며 이는 곧 ‘영화’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그것이 실존하는 무언가라고 여기지만 사실 이 믿음의 뿌리는 그리 깊지 않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백 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일 수 있고 넓게 보면 모든 게 다 컴퓨터 그래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의 물성은 대개 ‘현실’이 아니라 ‘현실적’이라는 말로 지칭되고는 하며 이는 곧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들 생각이 다르니 객관적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대신해 ‘개연’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개연은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일을 뜻하는데 이에 따르자면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영상은 어떠한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전에 있던 것들의 역산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아직 구현되지 않은 영역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그럴듯한 이미지를 연산, 사람들에 미래를 펼쳐놓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이 미래는 대중이 깨부숴야 할 무언가가 아닐까. 사진이 어떠한 순간들을 저지한다면 영화는 바로 그 순간들에 ‘주저’한다. 영화의 순간들은 ‘발견’되는 게 아니라 ‘발산’되어야 한다. 이는 즉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 상정한다는 점을 뜻하며 결국 영화는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스크린에 겹쳐놓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의 순간들은 우리가 목격한 물리적인 신체에서 연극 속의 배역을 예측함으로써 실제 현실의 규칙들을 깨부순다. 배우의 연기가 항상 고유함을 갖는 것도 바로 그만이 할 수 있는 순간들을 연출하는 덕분이다. 이른바 연기는 한 세계를 배우 스스로 개변하는 일에 그 힘과 가치가 있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연기자와 배역이 서로 분리되어있다는 점에서 연극과 유사하다. 아바타를 연기자의 성격에 맞춰 맞춤 제작하는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아서 아바타는 연기자의 성격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이 일종의 ‘갭’이 되어 사람들의 흥미를 유인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갭은 겉으로 표출되는 아바타 이미지의 배후에서 실제 연기자의 모습을 유추하게 하므로 역산의 과정을 따른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제 현실(신체)이 제거되어 있으므로 각자가 생각하는 연기자의 모습, ‘어떤 이상형을 그려보고 싶은지’를 따라 그 외견이 제시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시청자는 버츄얼 스트리머의 물리적인 신체를 예측한다는 점이다. 여태까지 보여준 순간들에 따르면 그 세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보고 있는 아바타 이미지를 깨부수려 한다. 이에 따라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뒤에는 실제 물리적 현실과의 갭이 있으리라고 추측, 아바타와 연동해 스스로 현실을 개변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영화에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소 흥미롭다. 가령 리타가 <서브스턴스>에 관해 언급한 글을 살펴보자. 리타는 씨네21 1501호에 실린 ‘한국 ‘페미니스트’ 영화 ‘관객’은 이대로 괜찮은가’에서 “영화 경험은 동일시 대상으로서 결격 사유 없는 ‘나’와 유사한 인물을 선별하고 그 인물에 ‘나’를 투사하는 리비도 투자 과정일 따름이며, 영화 또한 그 자체로 ‘나’가 편재한 자기애적 연장(extension)에 불과하다”고 적는다. 그는 <서브스턴스>의 주연인 데미 무어가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한 사실에 슬퍼하던 몇몇 시네필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이 시네필들이 데미 무어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은 영화가 말하는 ‘나’의 동일시와는 다소 상반된 무언가임을 지적한다. 이때의 ‘나’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로 ‘영화’를 지정하고는 그 안의 ‘나’로 현실을 개변하는 존재다.
일컫자면 이때의 ‘나’란 영화에 의해 역발산을 거친 상태로, 그 자신의 현실이 제거된 상태다. 한 현실을 바꾸려면 결국 이전에 있던 것을 비워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사례로 예를 들면, 사르트르는 이미지에 물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혼재한다고 말하며 전통적인 이미지를 ‘아날로곤’이라 불렀다. 아날로곤은 주체의 상상력이 투입되기 위해 공의 형태로 존재하는 물리적인 이미지를 가리킨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디지털 아바타는 롤플레잉을 시도하기 위해 제시되는 외적 테두리로 표상되며 이때 연기자는 시청자에 의해 역산된다. 이들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지만 반대로 어떠한 형태로의 현실을 회집하는 무대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버츄얼 스트리밍의 연기자는 그 자신이 현실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문화적인 관습 등에 얽힌 가상의 존재자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서브스턴스>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었음에도 여성 담론을 수행하는 주체로 이해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이 현실은 영화를 배역 삼아 연기하지만 반대로 그게 우리의 현실인 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은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산되는 순간들이 그 자신의 뼈대를 이루는 매체다. 이를 따라 영화는 한 현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자신이 아는 형태의 미래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것, 즉 ‘역산’의 산물로서 현실의 아바타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리타가 지적한 몇몇 시네필의 사례는 이러한 아바타에 들어가 버츄얼 스트리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테두리로만 존재한다면 이때 ‘나’란 아무런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말이다. 한 영화를 이해하는 일이 항상 어떤 현실에 깊게 의존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영화는 자신의 현실을 재창조하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전에 있던 것들의 역산으로 영화를 이해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고유함을 잃는다. 연극 속 배역은 우리가 지향하는 무언가가 될 수는 있지만 반대로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 될 때 현실을 위협한다. 특히 <조커: 폴리아 되>에서 아서 플렉이 그러하듯 자기애적 몰입은 현실의 붕괴를 서두르기만 할 뿐이다. 반대로 자기가 될 수 없는 사례도 떠올려보고 싶다. 자기애적 몰입이 있다면 타자애인 몰입도 있지 않을까. 버츄얼 스트리머 시장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는 신체의 물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버츄얼 스트리머가 마치 현실에 분명 존재하지만 단지 모습만 가상으로 표현될 뿐임을 서로 이해하는 듯하다. 버츄얼 스트리머가 신체의 생리적인 면을 드러내는 일은 1인 방송이 인간 존재자에서 비롯됐기에 그와 같은 ‘중단’을 관습적으로 재현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현실에도 존재하려면 시청자의 현실을 그런 쪽으로 개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버츄얼 스트리머가 자신의 팬이 존재하는 실제 현실에 물리적인 형태의 굿즈나 팬미팅, 행사 등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돼준다. 이 둘은 서로 다른 현실을 살아가지만 어느 한쪽이 자신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전파함으로써 둘 사이에 상호 합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영화가 허구의 진실임을 이해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투쟁이 대상이 되는 현실이 자신의 몸에 한정되는 점이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떠날 수 없지만 영화는 자신의 몸을 공란으로 둔 채 형태만을 유지하기에 마치 내부를 새로 꾸밀 수 있을 듯 여겨진다. 즉 영화는 자체적으로 현실에 앞서 무언가를 ‘재현’한다고 인식되며 이에 영화는 현실을 ‘반영’해서 ‘예측’하는 듯 느껴진다. 마치 영화의 운동 이미지가 프레임 사이를 주체의 상상력으로 보간하듯 영화와 주체 간에는 모종의 끌림이 자리한다. 이 현실은 어떤 형태로든 관객에게 역산된다.
무엇보다 버츄얼 스트리밍 시장에서는 연기자의 현실 성별을 유추할 수 있는 신체적인 특성이 도리어 시청자와의 공감대를 끌어낸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주된 시청층을 고려하면 상대 성별의 신체적인 면을 알 수 없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하겠지만, 상처 입고 느리게 회복하는 게 인간 존재자의 특성임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사이버 세상에서 상대방이 인간임을 알아차리는 건 유행어의 사용이나 동년배만 알 수 있는 문화적 코드, 밈의 사용으로 인한 동지애 등이 아니다. 인간은 상처 입는 존재다. 문득 댓글을 남기다가 날아온 답글 팝업에 ‘자신이 상처입었음’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겼을 때 우리는 상대방이 인간임을 알아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온라인 상에서 자신의 상처를 호소하며 우울증의 오오라를 뿜어내는 일은 단순한 연극이기보다 인간성을 역산해 한 세계를 바꿔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말이 터무니없게 들린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피를 흘리는 인간이라는 걸 드러냄으로 얻는 것이 그렇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보다 더 많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다시금 묻자. 왜 버츄얼 스트리머는 3D 풀 트래킹 장비를 사용하면서까지 최대한 물리적인 현실에 가까워지려 할까? 그게 더 인간적인 요소로 다가오기 때문이라는 건 누구라도 쉽게 말할 수 있다. 연예인이나 아이돌 그룹, 인플루언서가 나오는 예능이 인기를 끄는 건 평소 보여주지 않던 인간적인 면모가 그들이 ‘실존’하며 같은 ‘세계’를 살아가노라고 암시하는 덕분임을 떠올려보자. 가상성에서 출발한 버츄얼 스트리머가 역으로 현실의 물성을 획득하려는 하는 건 단순히 팬 상품을 판매하며 IP를 확장하려는 전략 때문일 수 있고, 시청자에 매력을 호소해 더 많은 수익을 취득하려는 PR 행위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버츄얼에서 배우는 건 가상성을 형상화하는 것, ‘기멸감’에 대응해 진정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