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의 평론집 『빈손의 영화』를 읽었다. 김병규의 이 책은 그가 『FILO』로 등단한 2018년 이후 7년여간 쌓인 글을 간추린 것으로, 분량은 441페이지에 달한다. 종이를 두꺼운 걸 쓴 걸 감안하면 분량 대비 가격은 저렴한 편이어서 구매해서 읽기에는 부담이 없을 것 같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아마 책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 점에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야! 서평 아니야?” 책에 대한 글이라기보다 책에 관한 내용이 될 글을 적는 이유는 하나다. ‘빈손의 영화’라는 책의 제목처럼 다시금 책을 열기 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병규는 책의 서문에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세 가지로 ‘영화잡지’, ‘영화관’, ‘영화 촬영 현장’을 꼽는다. 이 말은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비평가와 영화, 그리고 감독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즉 김병규는 영화를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이들 간의 종합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즉 영화가 하나의 ‘장치’임을 뜻한다. 특히 영화를 촬영하는 노동의 과정과 글을 쓰는 시간 일부가 겹쳐있다는 말은, 성상민의 ‘글쓰기라는 노동 행위’를 연상케함과 동시에 영화를 ‘본다’는 말을 독서의 시간에 겹쳐놓는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장치의 흐름에 동참하는 일과도 같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어떠한 ‘영화’를 발견하고, 또 이를 평가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서 영화란 과연 무엇일까? 책의 제목을 따라 제안한다면 영화란 결국 빈손으로 있어야만 발견되거나, 아니면 빠져나올 때는 아무것도 들고 나올 수 없는 것일 테다. 이는 영화가 하나의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념적인 집합체임을 지목하고 있다.
한편 김병규는 “아무리 작은 비평의 제스처라도 거대한 영화사의 흔적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역사의 거대한 흔적 앞에 한 존재가 서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작은 몸짓이라도 영화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가령 영화를 본다는 말을 단순히 극장에 앉아 눈앞의 영상을 보는 일로만 규정할 때 우리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집에서 보면 영화를 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극장이 아니라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말은 끝내 영화제와 같은 극장 우위론으로 이어져 무엇이 영화인지에 대한 논의 없이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하지만 극장 없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판데믹 시기에 극장에 출입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영화에 대한 개념적인 논의가 다시 이루어졌다. 극장이라는 장소 자체에 대한 출입금지가 아니라, 극장에 아무런 영화가 걸리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이전까지 말해왔던 폐허는 전쟁 등으로 포격을 맞아 무너진 <독일영년> 같은 폐허였지만 이 시점에서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된다. 인간이 더는 갈 수 없는 곳을 논하면서 영화는 못다 한 현실의 각축전이 된다. 사람들은 영화를 여러 이념들이 대립하는 각축으로 삼는데 이는 영화가 갖는 공론장의 형성 기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이념들로 인해 무차별하게 파괴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1950년의 한반도처럼, 영화는 유력한 강대 이념들의 대리전이 되고야만 것이다.
특히 예전이라면 영화를 불량식품 취급하는 여러 힐난들에 직면했겠지만 근래의 우리가 마주하는 건 거대한 무관심이다. 영화는 힙스터들의 문화를 넘어 소수종이 됐다. 자신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는, 애초에 공급되는 영화의 절대적인 총량이 줄어듦으로써 딱히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만약 당신이 영화광이라면 극장에 내걸리는 예술영화는 모두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한번 내걸린 예술영화는 적은 상영작 수로 인해 비교적 오래 내걸리기 때문이다. 점점 극장에 내걸리는 영화의 장르적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건 장점이지만, 반대로 영화풀이 좁아지면서 이 영화 저 영화 가릴 것이 없이 다 보게 된다. 이 안에서 서로 교배하는 시네필은 끝내 서로 달라 보이지만 비슷한 유전자로 구성된 근연종이 된다. 이로 인해 전염병의 유행에도 취약해져 영화계에 특정 담론이 전파되면 손쓸 새도 없이 감염되어버린다. 주류 담론이 다수 시네필을 감염, 탈출로를 모색하기에 앞서 모두가 하나의 뇌로 통합되어버리고야 만다. 이제 자신이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어떤 영화를 보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화되었던 때는 이제 자기만의 반짝임을 찾는 때로 이행한다. ‘하나의 뇌’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뇌’를 구축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이 안에서 영화는 한 삶과의 반려종 선언을 위한 ‘평행우주’가 된다. 시네필은 자신이 마주한 ‘반짝이는 것’을 찾아 소수의 어둠 속에 마중 나오는 ‘뉴타입’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네필은 진화한 부류의 문화인은 아니다.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거대한 폭발 속에서 대안을 찾아보려는 쪽에 가깝다.
솔직히 모든 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어렵다. 만약 모두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둘 중 하나다. 사실은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 현실 밖에 있거나. 전자는 그냥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일 뿐이라면 후자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그는 여러 뉴타입들의 이야기에서 반짝임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세기의 대폭발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폭발을 통해 이 세계와 비슷하지만 다른 평행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이 평행우주는 우리 현실에 외삽되어올 때 그가 제시한 현실 상태를 항상 당시 시점으로 보존한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만이 변혁을 이끌 수 있다. 이를 통해 시네필은 평행우주의 착오 에너지를 응용, 자기 현실을 변혁할 만한 힘을 얻는다. 하지만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얻고자 단순히 폭발을 일으키려 할 뿐이라면 이런 일은 무의미한 희생일 뿐이다. 자신도 알 수 없을뿐더러 어쩌면 많은 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그런 일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더 먼 곳까지 항해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시네필들은 영화란 것이 무엇인지를 암묵적으로 공감하고 또 감각하는 ‘뉴타입’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영화란 무엇인지를 깨닫을 수도 있고, 내면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강화인간이 되는 쪽도 가능하다. 적어도 이들 간에는 ‘영화’에 대한 공감대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에 외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동일하다.
영화에 대한 논의 없이 영화를 논할 수 없다는 것,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간명하다.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 우리는 이를 타인에 설명하기 위해 조종대를 잡아야 한다. 반대로 조종대를 잡기 때문에 그와 같은 뉴타입의 감각이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다. 양쪽 간의 진행 순서를 마땅히 구분하기 어려운 가운데 시네필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매끄러운 연결점에 균열을 내고, 이를 통해 바깥을 상상하려는 일. 누군가는 그걸 두고서 신에 들린 기동으로 우리에게 사고의 지평을 열어준다고도 하지만, 반대로 바깥을 상상함으로써 기회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가 결국 빈손의 예술이라는 건 그런 뜻이다. 다른 우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우리 우주의 것을 들고 갈 수 없다. 다만 통과하는 과정에서는 항상 무언가를 잡을 수 있도록 빈손을 만들어두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따금 영화가 물리적이거나 개념적인 형상의 총체처럼 묘사되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해 영화란 우리가 영화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빛이라 상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도 한순간의 빛을 터트리기보다는 길없이 꺼져만 가는 빛들에 반짝임을 부여하는 것일 테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소실되었으므로 세계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예전의 자리로 거슬러 돌아가려는 신체가 세계의 테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세계는 결국 영화로 통하는 길이며, 그 안에서 영화는 빛을 송과하는 틀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이 자리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김병규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건 시네필 사이의 어떤 명멸이다. 김병규는 꽤 젊은 나이에 좋은 글을 써서 유명해진 아마추어 필자였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단순히 더 나은 또래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의 존재가 사람들이 글을 쓰고, 글에 관해 이야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한 문화를 이끄는 건 결국 ‘반짝이는 것’에 대한 뉴타입적인 공명이 아닐까 한다. 분명 모든 인간이 빛이 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빛을 따라갈 수 있는 여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가 자신의 존재여건을 어둠으로 설정한 것은 오늘날 많은 시네필들이 별안간 우울감에 빠지는 이유다. 영화는 항상 터널 속에 있었고, 좁은 시야에 다 담기지 않는 넓은 세계를 품고 있었다. 이 안에서 시네필은 항상 스크린이라는 형식을 시야를 제약하는 무언가로 여겼던 것 같다. 영화를 뛰어넘어 안으로 향하는 건 더 가까이서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영화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영화에 있는 건 아무것도 들고 나올 수 없고, 반대로 아무런 것도 영화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영화는 평행우주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그 안에서라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은 물론, 자신이 진정으로 여기는 더 나은 세계의 뒷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나에게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점에서 ‘반짝이는 것’을 따라잡는 일이다. 이 안에서 정사는 별안간 여담으로 뒤바뀌어버릴지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뉴타입들을 만날 수 있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