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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키라' 하지 않은 것을 위해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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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열의 「나는 어떻게 다섯 번의 초저예산 영화제를 했고 아직(도) 멀쩡한 (척하고 있는)가」를 읽었다. 얼마 전에 씨네21에서 다룬 마이크로시네마 특집과도 어느 정도 맥락이 겹치는 듯했지만, 이 글의 핵심은 따로 있다. “작년보다 후진 영화제를 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점이다. 사람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게 당연하지만 매번 더 나은 성과를 낼 수만은 없다. 혹은 전진하더라도 그 성과가 미미해서 단기적으로는 관찰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매일이나 매년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평균값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가 떨어졌다고 해서 모든 걸 끝낼 수는 없다. 매일의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면 마음고생으로 쉽게 지치고야 말 테다. 생각해보면 이 말은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매일 무언가를 동일하게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헬스트레이닝이든 그림 실력을 키우는 일이든 매일이 같은 일상이 될 수는 없다. 매일이 같은 일정으로 짜일 수는 있겠지만 매번 같은 반응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어떤 날엔 화장이 잘 먹을 수 있고, 어떤 날에는 같은 운동이라도 끔찍하게 몸이 아플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물도 마찬가지다. 영화 평론가가 되고 싶은 누군가가 매일 블로그에 글을 써서 올린다고 한들 무언가 반응이 단번에 확 오지는 않는다. 좋은 생각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저냥 좋지 않은 소재로도 글을 쓰게 된다. 좋은 글을 쓸 수 없으니까 글쓰기를 포기해버린다면, 글을 계속해서 쓰기란 어렵다. 글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글을 쓰는 일 자체에 재미를 느낄 때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다.


이 말을 다른 쪽으로도 적용해보자.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이 특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해버린다면, 끝내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꼭 더 나은 내일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보다 어쩌면 내 일을 더 챙기는 쪽이 나을 선택일 수 있다. 멀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는 계속해서 순간들을 인식하기에 가능하다. 목적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다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릴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지금 바로 다음에 자리할 정류장이 어딘지를 의식하는 것만이 목적지를 잘 찾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이 점에서 “지속 가능성이란 잘 버티는 힘이 아니라, 잘 줄이는 용기”라는 배은열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만 글 전체를 구성하면 글이 뒤죽박죽이되어버려서 읽기가 불편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주제 하나를 갖고 글을 구성하는 일이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하고 싶은 말을 덜어내는 등의 ‘포기’를 거친다. 영웅 영화에서 영웅들이 매번 ‘모두를 다 구할 수는 없다’고 한탄하듯 우리도 모든 담론을 끌고 갈 수는 없다. 대신 우리에겐 평행한 지면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글을 계속 써서 평행현실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꾸린 지면에서는 자신의 생각들을 구할 수 있고 필요한 건 단지 시간뿐이다. 분량상으로 뭔가를 요구하는 외부적인 여건이 없다면, 매일 하루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게 아니라 남은 하루에 배가 더부룩하지 않을 만큼의 식사량을 유지하는 것이다.


진보와 진화가 같은 뜻이 아니라는 걸 잊는 이들이 많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꼭 더 나은 미래를 뜻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듯, 성장이란 결국 매일을 얼마나 평화롭게 보낼 수 있는지가 아닐까 한다. 어른이 되면 단조롭고 평범한 일상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른은 결국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일에 숙달됐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어리광’은 어른의 ‘철듦’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확하게, ‘철듦’이라는 말은 그 무게감에서 어른의 삶이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 지속가능성이 잘 줄이는 용기라는 말은 그 매일의 무게를 차분히 줄여가면서, 무작정 버티기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라는 말과도 같다. 즉 “작년보다 후진 영화제를 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말은 적어도 여행의 맥락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쉽다. 여행을 할 때는 이 장소에 괜히 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항상 다음 장소가 어디일지를 자주 생각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그곳에 있을 때 자신이 어떤 순간에 놓일지를 가정한다. 감정이라는 건 특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행하는 쪽에서 나타나는 ‘격차’이자 ‘착오’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어느 곳에 가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말은 당장은 평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 영화가 어떤 형태의 단어로서 지칭되는 것도 그가 우리 일상에 대비해서 ‘발견’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재밌다거나 즐겁다는 말의 종착지가 아니라 비천함에서 출발하는 쪽을 더 강조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반영한다.


영화가 어디까지나 삶의 바깥에 자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영화제가 생계를 위한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실천(Action)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가 자신의 일상이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영화를 말하려면 결국 영화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건 영화에 속해있어서는 얻을 수 없는 부류의 감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것과 만드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이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줄곧 말하는 것이다. 영화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공한다면 영화제는 그런 미래들에 맺어지기 위한 장소이다. 영화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영화를 보며 자신이 사는 곳이 될 수 없다고 슬프게 우는 쪽이 더 현실감이 있다. 그건 마치 영화가 정말로 존재했었던 것처럼 여기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기멸감이 과연 자신의 비천함을 현재에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어떤 집단이든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크기는 정해져 있다. 이 크기를 넘어서면 성장하는 속도와 팬들의 성원, 외부관계등이 비자발적으로 벌어짐에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나가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가령 “나는 어른이 되기 싫은데 나이를 먹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질이 관념을 견인하는 셈인데 문화비평에서도 이 말은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 정도 규모가 좋은데 시장(팬)이 원하는 게 있으니 직원도 고용해야 하고 월급도 주려면 결국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지속가능함의 구조가 내일이 아니라 매일에 있음을 가리킨다. 더 나은 내일은 어느 순간 폭발을 거쳐서가 아니라 무료한 하루를 이겨내는 것에서 주어진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끝을 맞이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세계 어디를 가도 균일한 품질을 제공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맥도날드 같은 곳을 가보면 세계 어디를 가도 맛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게 우리가 말하는 단조롭고 무료한 일상에 가깝지만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맥도날드의 매력은 바로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매 하루가 엄청 좋지도 엄청 나쁘지도 않아야만 일상은 유지될 수 있다. 오늘이 기쁘면 내일이 아쉽고, 오늘이 나쁘면 내일에 기대를 걸게 된다. 항상 발걸음을 떼는 바로 그 순간처럼 매일이 호기심 어린 반복으로 계속되어야만 한다. 물론 자신에게 거는 기대감을 줄이라는 뜻은 아니다. 발걸음이 가볍다는 말이 아무런 무게감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복제품이 되는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선정 단계에서 감식안을 무력화할 수 있는 구조적 제약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릴 법한 정도로 자신을 간추리는 일은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대한 믿음을 선보이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서는 적어도 그 세계를 믿어 의심치 않고서 열렬한 지지를 보내야만 한다. 이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잘 알더라도 비슷한 매일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려면, 우리는 이 세계가 하려는 일을 잘 알고, 이를 믿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특별하게 하는 건 특정 부류의 실천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격자를 이해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식의 반항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철학이론을 빌려서만 이루어질 뿐이라면 그런 글은 표면으로만 이 세계에 반사될 뿐 차원 면에서 ‘존재’한다고는 볼 수 없다. 비평은 자신이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구조들을 무력화한 후, 그 안에 자신을 세우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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