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두루뭉술하고 현학적인 글이 좋았는데 점점 더 읽기 편한 글을 찾게 된다. 읽기 편한 글이 알맹이가 없는 글은 아니니까 읽기 편한 글을 소비하는 일에 별다른 생각은 없다. 다만 가독성을 두고서는 짧아진 집중력과 지식의 부족을 가늠질하기만 할 뿐이다. 이런 말을 꺼낸 건 제30회 씨네21 평론상 수상작을 읽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잡지의 성격상 저널리즘 성격이 있는 글을 뽑기는 했지만, 그래도 점점 더 대중이 읽기 편한 글이 뽑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꾸어 말하면 영화를 굳이 어렵고 현학적인 영화 비평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문화이론 쪽의 가벼운 담론으로 우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와의 정면승부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고, 필자들의 영화학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고도 볼 수 있지만, 가장 큰 건 영화의 ‘바깥’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대안’을 찾는 행보와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최근에 스튜디오 카라가 제작한 <건담: 지쿠악스>를 보며 들었던 생각인데, 이 작품은 원본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점을 도리어 역으로 활용했다. ‘공식적인 건담 동인지 같다’는 평은 ‘0점 맞은 시험지’처럼 도리어 모든 답을 알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씨네21 평론상은 ‘원본’을 얼마나 잘 해석하는지가 아니라, 원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두고서 자기만의 ‘동인 설정’을 덧붙이는 기술에 수여하는 ‘엑스포’처럼 변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씨네21은 작년을 기점으로 기성 평론가를 심사평에 언급하기 시작했다. 송경원 편집장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이 경향은 1) 지원자 수가 점점 줄어서 기성 평론가를 심사에 올리지 않으면 안 되거나 2) 신인 비평가의 전반적인 수준이 내려갔거나 둘 중 하나를 원인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시장이 점점 고인물화된다고 보면 전자가 더 합리적일 테고, 실제로 이는 평론상에 대한 호응이 떨어지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평론상을 수상한 이들이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가는 일과 그들을 현장에서 쓰는 일은 서로 별개다. 평론상이 활동에 힘을 실어줄 수는 있어도 결국 방향은 자신이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에 자신이 무언가 하던 게 있는 이들이 평론상에 도전하는 건 거진 필연인 듯 보인다. 완전한 무경력자를 찾을 수 없고, 반대로 완전히 영화만을 개척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결국 최우수상을 뽑지 못했다는 말이 자신들의 ‘이상향’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대체하고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위에서 말한 동인 설정이 등장한다. 영화 비평은 신규 독자 유입을 위해 기존 세계 해석과 확장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동인 설정과 ‘대체’ 현실을 창안하면서 ‘원본’이 아니라 ‘동인’에서 담론을 창출한다. 우스겟소리지만 어떤 담론을 붙이면 확산속도가 3배 빠르다면서 일종의 설정 놀음을 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지쿠악스>는 라라아 슨이 샤아의 운명을 바꾸려고 여러 번의 ‘대체’를 만들어내는 일에서 비롯됐다. 라라아는 어떤 기체에 태워도 샤아는 건담에 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면서 끝내 샤아를 건담에 태우는 초강수를 둔다. 현시점에서 영화 비평의 모습은 정확히 이것과 같다. 비평가는 영화 비평이 문화이론에 박살 나는 상황을 피해 보려고 여러 우회수단을 마련해보지만, 그 모든 시도가 실패한다. 비평가는 영화 비평을 문화이론에 탑승시켜버린다. 그렇게 영화 비평이 문화이론에 탑승한 상황에서 어느새 ‘영화’는 실종되어버리고 영화학을 벗어난 영화 비평이 망령처럼 이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이 흥미로운 세계에서 동인 설정은 영화가 선보이는 재현에서 벗어나 이미지의 상상된 표면을 조합해 결론에 향하는 새로운 판을 짜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에서 결과는 항상 같다. 영화 비평이 문화이론에 탑승하지 않는 이상 영화 비평은 얼마 가지 않아 폭사한다. 결국 영화 비평이라는 건 자신이 구축한 구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이를 ‘흑역사’로 취급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새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새로 뽑은 수상자는 도리어 이 세계를 끝내는 데 일조하기만 하는 것뿐 아닐까? 바꾸어 말하자면 씨네21이 말하는 ‘바깥’이란 본질적으로 ‘이 세계를 고쳐보자’는 생각에만 머무는 게 아닐까?
김병규 평론가는 씨네21이 기획한 30주년 특집 기획에서 “1995년 체제를 끝내자”고 말한다. 씨네21에 실린 이 글이 특이하게 보이는 건 씨네21 안에서 씨네21에 대한 자조적인 목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씨네21이 평론상에서 내비치는 뉘앙스는 ‘1995년 체제’로 꾸려진 현 상황을 끝내기보다 아직은 쓸만하니까 조금만 더 고쳐 써보자고 하는 쪽에 가깝다. 이를 위해 정답지에 가까운 ‘최우수상’을 기다리며 “영화 담론의 지평이 넓어지기를 희망한다”고 언급한다. ‘내부’에서 ‘바깥’을 구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기에 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영화비평이 일종의 동인 설정을 갖고 이루어지는 일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게 한다. 가령 흥미로운 동인 설정으로 한 세계를 꾸려간다는 말은 반대로 이 세계가 어떻게 해야 망쳐질 수 있는지도 잘 안다는 뜻이다. 씨네21도 그 점을 잘 알기에 점점 더 영화 평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사람들을 수상자로 채택하고 있다. 아마도 씨네21은 스스로의 힘으로 체제를 끝낼 수 없으니 이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이 세계가 파훼되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그러나 씨네21이 1995년 체제를 개혁해보려 한다면, 단순히 변형에 변형으로만 응수하기보다는 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속한 지난 세기를 부숴야 한다.
평론상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는 생각보다 큰 고민거리다. 아예 활동하지 않던 생판 신인에게 주는 게 취지에 맞는다고 보면, 이후 아무런 활동도 안 할 경우에는 귀중한 TO 하나를 날리는 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활동 이력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면 신인 발굴이라는 취지에 어긋난다는 말을 듣기 일쑤다. 결국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무난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도리어 영화학의 입지가 좁아진 현재 상황에서는 영화만을 다루는 사람을 뽑을 수 없다. 영화이론에 바삭한 사람을 뽑는 일이나 영화 내부에 머무를 수 있는 필자를 선출하는 건 필요하지만 낡은 일이 돼버렸고 또 찾기도 힘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씨네21이 개척해왔던 영화 비평의 한 영역은 ‘원본’으로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게 된다. 누군가는 동인 설정이라며 반발할 것도 같은 사실들이 ‘필요한 자세’와 ‘태도’로서 이 세계에 환원된다. 놀랍게도, IP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 세계를 끝내는 기술로서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의도로 씨네21 평론상을 기획하고 있다면 맞는 방향이겠지만 이 세계를 고쳐 사용해보려 한다고 보면 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한 프렌차이즈를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한 세계를 끝내는 이 방식은 ‘대체’ 현실이 결국 근본에서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만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서 씨네21은 ‘회사’의 미래를 그리면서도 ‘영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도 잡지로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창안해야 하니 ‘영화’ 잡지와 영화 ‘잡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지켜내고 싶은 게 평론상이라면 적어도 이 사실을 고백하는 자리에서는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씨네21의 근간은 사실 영화 담론을 선도하면서 시장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에 있다. 얼마 전 애니메이션 잡지 <쿄로쿄로>의 창간호에 씨네21의 송경원 편집장이 참여한 점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 잡지의 편집장이라고 하면 보통은 이런저런 멋진 자리에만 등장하고 싶어할 것 같은데 업계에서 막 시작하는 위치의 잡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편집장의 나이를 고려하면 <쿄로쿄로>가 다룬 <에반게리온>에 문화적인 향수가 깊을 테니 그리 이상하지만도 않지만, 평소 만화를 좋아하는 그였기에 이 등장은 각별하다. 애초에 비평의 출발점은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아무리 파괴된다 한들 그곳에 사람들이 있으면 언젠가 세계는 재건된다. 그러니 씨네21이 타인의 손을 빌려 한 세계를 끝내려 하는 듯 보인다면, 이 선택의 배경으로는 영화에 대해 말하고 웃고 떠들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다. 그러니 씨네21의 평론상이 점점 더 읽기 편해지는 건 이 세계의 비루한 운명에 심취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