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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현실 세계를 살고 있나요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2001)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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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 테러리즘이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테러가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폭력이나 소요 사태를 뜻한다면, 테러리즘은 이를 통해 사상이나 현상 등을 물리적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는 ‘테러’의 많은 면은 아마도 후자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테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행위나 현상이라면, 이의 행위주체를 알아내어 현장에 적용할 때 비로소 ‘테러리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큰 틀에서 보면 테러리즘을 연구하는 건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궁금해하면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예방할 수 있다. 적어도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보다는 테러리즘쪽이 더 예방하기가 쉽고 또 실제로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테러리즘이 ‘확신범’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어 영웅화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테러는 경찰이나 군대, 정부 등의 감시망을 피해 물리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 ‘예측불가능성’을 동반한다. 테러리즘은 바로 그 예측불가함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현재 상황에 돌파구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 천국의 문>은 기억을 잃은 특수부대원 ‘빈센트’의 테러 음모와 이에 대응하는 주인공 일행의 이야기를 다룬다. 빈센트는 과거 생물학 병기의 실험체로 사용된 후 타이탄에 버려졌고 이에 세상에 복수를 다짐하게 된 인물이다. 생물학 병기에 대응하는 항백신을 주입받은 그는 실험 이후 기억이 사라져 ‘현실’을 찰나의 꿈처럼 여긴다. 그래서 그는 모호해진 현실과 꿈의 경계를 두고서 세상을 무너뜨리려 한다. 림프구의 형태를 한 나노머신을 도시에 살포해 사람들을 몰살하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고 나면 ‘천국의 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즉 그는 ‘해방’되고 싶어한다. 단편적으로 보면 왜 테러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기억을 잃고 현실과 꿈 사이를 몽롱한 채로 걸어다닌다면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해있지 않은 것이다. 스파이크의 자기고백처럼, 빈센트는 “깨지 않는 꿈을 꾸는” 인물이었고 그 점에서 스파이크의 아치 에너미로 활약한다. 이 세상을 천국에 가지 못한 이들이 남겨진 ‘연옥’에 빗대는 그는, 스파이크에게 “이 세상이 현실도 꿈도 되지 못한 무언가로 애매하게 남겨졌다”고 말한다.


현실도 꿈도 될 수 없다는 말은 확실히 시적이다. 개연성보다 스타일을 우선하기에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지만 스파이크와의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소재가 하나 있다. 꿈에서 깨어남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더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며 절망한다. 이때 현실은 감각이란 게 붕 떠버려서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시체 비슷한 상태가 된다. ‘현실’에 발을 내딛으며 ‘걷는다’는 감각이 없으니 자연스레 온갖 종류의 규범을 벗어나게 된다. ‘꿈’은 이런 상황에서 현실의 대안으로 사용된다. 두 사람은 자신이 그저 긴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며 금방이라도 깨어나기만 하면 ‘진짜’ 현실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즉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이곳에도 ‘중력’이란 것이 작동할 것으로 믿는다. 공중에 떠 있기에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반대로 ‘방위’를 잃어버린 채 어디로도 가기 힘든 상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무중력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중력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중력은 강한 회전에서 발생한다. 그러니 빈센트에게 테러는 자신이 꿈을 부유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강한 회전’이었을 것이다. 원심력은 구심점을 만들고, 또 이를 등속 운동으로 변환한다.


생각해보면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의 중심 소재는 항상 꿈이었다.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한쪽 눈으로는 현재를 본다는 스파이크에게 ‘현실’은 항상 몽중과도 같았다. 과거 마피아 조직 ‘레드 드래곤’에 몸담았던 스파이크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 현실을 일깨웠지만, 반대로 조직과 사랑을 떠나면서 애써 붙잡은 현실도 잃어버리고야 만다. 이런 상황에서 스파이크는 동이 트기 전, 눈을 뜨기 전, 꿈과 현실의 경계를 향해 나아간다. <천국의 문> 중 황토빛 화성 대기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공중전은 스파이크가 꿈과 현실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할로윈 축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후반 전투도 그렇다. 빈센트는 왜 할로윈이었냐는 질문에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삶의 경계가 바로 할로윈’이라고 말한다. 경계와 구분이 흐려진다는 점에서 현실과 꿈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 말은 사람들에게 ‘깨어남’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깨어남’이 구체적인 상황이나 표지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빈센트의 욕망은 더는 흐린 경계에 서 있고 싶지 않다는 단순명료한 마음이었다. 비루한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천국의 문’을 찾아 헤매는 그에게 현실은 그저 연옥에 불과했다.


이 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건 역시 밀레니엄이다. 밀레니엄은 20세기와 21세기로 크게 구분되었기에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했다. 새 시대에 대한 명시적인 기대를 품을 수 있었고, 반대로 불안감도 몹시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센트’나 ‘스파이크’에 공감할 만한 구석이 많았으리라는 추측을 쉽게 해볼 수 있다. 예측하기 힘든 미래 환경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테러’와 같은 면으로 치환되었으리라고 추론 가능하다. 반면 이 극장판 작품에서 눈에 띠는 건 ‘테러’에 대한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생각 자체이다. 신이치로는 십수 년이 흐른 2014년에 테러를 소재로 한 작품 <잔향의 테러>를 만들었다. 작품은 테러를 통해 세상을 구한다는 컨셉으로 진행되며 이는 통상 ‘테러리스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정반대로 응용한 것이다. 한편 2016년에는 한국에서 와이랩이 비슷한 컨셉의 <테러맨> 웹툰을 내놓았다. 이 작품도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막을 방법은 ‘테러리스트’로 변장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작품들은 ‘테러’가 굳건한 현실 사회에 대한 해방책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마음을 ‘테러리즘’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테러는 그 사람이 테러리스트가 된 배경이나 환경 등이 있기에 이를 구조적으로 막아보려는 시도가 가능하다. 책임 소재가 명확하니 테러 피해자들에게 전할 위로 메시지도 간명하다. “재발방지하겠다…관계자에 책임을 묻겠다” 등이다. 반면 지진이나 해일에 비견될 만큼의 테러 행위들은 ‘묻지마’라는 접두어가 앞에 붙을 만큼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이 어떠한 ‘폭발’ 같은 구심점을 꿈꾸게 한다. 눈으로 뚜렷하게 관측될 만한 무언가가 있으면 적어도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만큼은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점에서 위 매체가 말하는 ‘테러리즘’이란 ‘테러’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손에 넣으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불확실성을 직접 다룰 수 있다면 반대로 확실함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테러’는 더는 두려워할 무언가가 아니게 된다. 테러를 통해 천국의 문을 열겠다는 빈센트의 마음은 아마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아무런 구분점도 없는 시간이 힘을 얻고 있다. 이 매끄러운 순간들 안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는 세기의 폭발을 일으키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면 차라리 폭발을 일으켜보자.


이 생각이 흥미로운 건 일반적으로 우리가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방법이 ‘보험’이기 때문이다. 집에 불이 날 것 같으면 화재보험을 들지 언제든 집을 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두는 사람이 있을까. 위험요인을 통제한답시고 더 위험한 걸 만들어낸다는 말은 기실 불확실함을 다루는 방법론의 부재를 가리킨다. 우선 중력이라도 만들어둬야 앞으로 나아가며 걸을 수 있다고 보는 쪽이 있는 한편, 아무런 방위도 정할 수 없다면 일단은 자리에 가만히 있는 편이 미아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는 쪽도 있다. 사실 <카우보이 비밥>은 발을 내딛기 직전의 감각을 줄곧 지속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놓고 싶지 않다.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다”는 스파이크의 말은 “그저 환상일 뿐이더라도 찰나를 사는 일에 충실한” 삶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테러가 매끄러운 시간들에 균열을 냄으로써 우리가 무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이를 충격경험이라 부른다. 극장판의 스태프 롤이 다 올라가고 나면 화면 구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표출된다. “지금 당신은 현실 세계를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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