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오>(2025)
근래 영화관에서 보았던 가장 기이한 모습은 <진격의 거인>의 극장판 홍보용 사진판넬을 앞두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 이상할 게 없지만, 영화를 보러 온 김에 사진을 찍는다는 개념이 새로웠다. 내용과는 관계없이 ‘포토존’ 자체가 마련됐다는 점이 이들을 사진으로 이끄는 것만 같았다. 한때 유행했던 문화적 아이콘에 대한 동행이 시작된 셈이다. 이를 보면 극장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영화를 잘 만들거나 못 만들거나를 넘어선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비롯한 ‘극장’의 근원적인 형태는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 꾸미는 일이다. 극장에 가면 안으로든 밖으로든 이야기가 통한다는 것, 작품 한 편을 관람하고 나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은 그 무엇보다 즐겁다. 안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이를 다시 다른 사람에 돌려준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닫혀있는 형식이 아니라 열린 형식이 된다. 그러니까 극장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이야기의 크기를 축소해 이를 적당한 형태로 바꾼다. 밤하늘을 전부 눈에 담을 수 없으니 별자리를 가리켰던 사람들처럼 극장은 ‘이야기를 눈에 담는다’.
<엘리오>의 첫 장면은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되어 지나간다. 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엘리오는 올가 고모의 손을 피해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이 장면에서 엘리오는 재난을 피해 대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지진 등의 재난에서 머리를 보호하는 요령으로 책상 밑에 들어가는 일이 제시되곤 하는데, 이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이 보호요령이 하늘에서의 낙하물을 피하고자 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후의 전개는 흥미롭다. 천체과학관에 방문한 엘리오가 보이저호를 비롯한 밤하늘 전반을 바라보며 눈길을 번득이는 모습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하늘을 두려워하던 소년이 하늘을 동경하게 되는 게 영화의 첫 출발점이다. 엘리오는 이 우주에 생명체는 인류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보이저호의 제안을 생각한다. 엘리오는 혼자가 된 후로 이 세상에 자신만 존재한다고 느꼈어서 우주로 나가 다른 지적생명체와 교류하고 싶어한다. 여기서 엘리오의 의중은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대피’하는 것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극장은 현실의 대피소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탈출하는 곳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극장의 속성인 ‘어두운 방’은 나머지 현실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영화가 자연을 편집해서 자신을 제시한다면 이는 현실을 망가트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고 여기서 어둠은 빛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줬다. 엘리오가 천체과학관에서 마주한 건 아마도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엘리오는 하늘의 낙하물을 피하기보다 길을 찾아 나서기를 선택한다. 하늘의 낙하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위험천만한 운석에서 별똥별로 생각이 바뀌면서 엘리오는 동경심을 품는다. 이어지는 짧은 묘사들에서 엘리오는 밤하늘의 우주인과 줄곧 대화하려 시도한다. 이 모습은 우주인에 무언가 ‘안녕’이라 인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이어서 굳이 따지자면 무인도의 조난 신호에 가깝다. 이 세계는 난파선과도 같아서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 자신을 데려가 달라며, 엘리오는 그렇게 말했다.
이후 우주로 간 보이저호를 커뮤니버스가 발견함에 따라 지구에 신호가 전해진다. 엘리오는 운 좋게 기기와 교신하게 되어 커뮤니버스의 초대를 받는다. 사실 엘리오가 보낸 편지는 커뮤니버스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여하튼 엘리오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커뮤니케이션의 방향이나 의도가 일치하지 않지만 도출되는 결과값이 일치한 이 모습은 영화라는 철학적 좀비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철학적 좀비는 겉모습과 행동거지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를 의식을 갖고 수행하지 않는 존재를 뜻한다. 단지 프로그램으로 짜인 기계에만 불과하면 어떻겠냐는 건데 여기엔 목적과 판단이 부재하는 대신 ‘반응’이 존재한다. 외부환경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도출해내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지성과 분간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이 영화에서 엘리오는 무언가를 직접 판단하려 들지 않고서 대신 ‘반응’하기만 한다. 반응으로만 삶을 꾸려나가니까 자신에 말을 건네거나 빛을 드리우는 편이 아니면 하나의 존재로서 존속하지 못한다. 엘리오는 어둠에서 아무런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항상 빛을 따라가고 있다.
빛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는 존재로서 엘리오가 밤하늘에 매료됐던 건 아마도 ‘눈에 담을 수 있는 형태로서의 빛’을 제공해서가 아닐까. 일상에서 빛은 방이 어둡거나 잠자리에 들거나 하는 등 다른 무언가로 행동하기 위해서만 존속한다. 하지만 밤하늘에 있는 별빛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도리어 별빛은 꺼짐과 켜짐이라는 위태로운 상황에서야 비로소 사람들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극장이라는 공간에 의미가 있다면 아마도 이 부분이 주요하다. 영화는 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목격함이란 상상할 수 있음을,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SNS의 모 시네필은 영화를 두고서 “스스로 골라 선택할 수 있는 꿈만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단순히 꿈을 바라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한세상에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참된 기능은 아닐까. 그리고 극장은 화면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허락해줄 어느 세계를 찾아가는 공간인 게 아닐까. 엘리오의 작은 삶이 땅과 하늘의 경계에서 흔들릴 때 세상은 빛을 발했다.
엘리오는 커뮤니버스에 와서 자신이 바라 마지 않던 우정과 교류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것도 와닿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바라던 이미지를 관람하기만 할 뿐 직접 이미지의 수행 주체가 되고 있지는 못한다. 엘리오는 자신이 바라던 상황을 직접 보고 듣고 수행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어른이 아니다. 일설에 따르면 어른의 정의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엘리오는 사건 내내 이야기를 주도하지 않는다. 모험극이라는 컨셉에 맞게 영화는 기막힌 우연과 환상들로 가득 차 있다. 엘리오가 평소 살아왔던 일상과 비교하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곳이지만, 정작 이 안에서 엘리오가 쫓던 빛은 사라져버리고야 말았다. 이때 핵심은 개연성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엘리오가 꿈을 쫓는 과정에 있다. 직접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도피해온 것뿐이라는 점 말이다. 그런 엘리오가 스스로 행동하는 건 진심을 나눈 친구 글로든을 구하기 위해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쏟아져 내리는 세상을 피해 달아나던 엘리오는 이제 친구에게 마음을 쏟는 어엿한 어른이 됐다.
엘리오는 자신이 왜 밤하늘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단순히 “지금 이곳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 판단에는 ‘어디’에 대한 생각이 빠져있다.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엘리오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보이저호의 우주 탐사 목표는 “그냥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는 것”이었다. 엘리오도 단순히 지구에서 가장 멀리까지 떠나오고 싶었던 것 같다. 작품에서 엘리오의 위치는 집에서 미군 캠프로, 미군 캠프에서 수련 캠프로 점점 멀어지면서 끝내 우리 은하계 어딘가로까지 확장된다. 이 여정은 어느 시네필 집단이 사로잡은 영화가 반대로 시네필을 붙들어 가두는 무언가일 수도 있음을 연상케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도입과 전개, 결말을 따라나서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삶은 상대방이 자신에 맞장구쳐주기만 할 뿐인 것을 모른 채 신나서 혼자 떠들어대는 모양새에만 불과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뤼미에르 갤럭시가 자신의 존재와 변화를 동시에 이르는 ‘구성요인’이라는 점이다. 커뮤니버스는 엘리오의 홀로서기와 어른에 이르는 과정이 담긴 공간이었다.
처음에 엘리오는 세상이 쏟아질 것만 같다고 느꼈다. 이 감각은 수련 캠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쪽으로 확장된다.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엘리오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있다. 비행물체가 등장해오는 하늘 반대방향에 서 있는 엘리오는 관객의 시점인 카메라에 얼굴을 맞대어 선다. 주먹이 눈앞까지 닥쳐온 시점에 엘리오가 눈을 질끈 감자 다음 장면에는 하늘에서 빛이 쏟아진다. 엘리오는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으면서도 자신이 하늘에 끌려 올라간다며 기뻐한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만 이 장면에서 엘리오는 <지붕뚫고 하이킥>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 벌어진 모든 건 그저 환상이고, 영화고, 극장을 나오면 다시 우리 상상을 떠받들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들었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를 두고서 현실에 쏟아질 것만 같다거나 하는 식으로 두려움을 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던 엘리오는 아이의 미성숙함을 끝내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