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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건담 지쿠악스>의 영화론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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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결국 삶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일은 인생을 따라가는 일이 되고, 영화를 찍는 일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된다. 이런 뜻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애니메이션이 ‘살아있는 것을 찍는 긴장감’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삶이 먼저 드러나는 것을 뒤늦게 수습하는 형태라면, 애니메이션은 무엇이 드러날지를 먼저 결정할 수 있기에 ‘비인간적’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존재론이란 이 세계에 먼저 던져진 ‘화두’ 같은 것이며, 이를 고민하는 게 관객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고민하지 않는 관객을 불러들이기에 무용한 매체가 되는 것일까. 영화가 어떤 현실로서 사전에 주어져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자신이 바라는 세계를 사전에 적어두려 한다. 즉, 자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창조하고, 또 분류하는 건 애니메이션의 역할이다. 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건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현재를 살아가며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질문으로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 말이다.


<건담: 지쿠악스>는 이런 부류의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할 수 있다. 토미노 유시유키의 <퍼스트 건담>에서 시작된 이 작품 시리즈는 이미 모빌 슈트라는 컨셉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리즈가 오래될수록 변화를 줘야 하니 당연한 일이면서도, 누군가는 분명 아쉬워할 대목이라고도 생각된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가 쌓임으로써 가능한 일도 있는데, 바로 유사-현실이다. 최초의 <건담> 시리즈는 소위 말하는 ‘원본’으로서 향후 모든 파생작품들에 대한 기준점이 됐다. 이 과정에서 원본의 무게감은 점점 깊어져 끝내 ‘유사-현실’로 기능하게 됐다. 이는 즉 <건담>이 팬들에게 하나의 ‘영화’로서 가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쿠악스>를 보는 관객은 먼저 있는 우주세기 서사를 고민하며 이게 어떤 현실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평행우주를 그려낸 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현실은 이미 팬들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것들이기에 ‘살아있는 것’을 찍는 긴장감을 어느 정도 충족한다. 공식적인 건담 동인지라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에서는 그런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지쿠악스>의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샤아를 잃은 라라아 슨이 샤아가 살아남는 세계선을 줄곧 시도한다는 점이다. 라라아 슨은 아무리 해도 샤아는 건담에게 처치당했다고 말하며 줄곧 실망해왔는데 마지막으로 시도해 성공한 게 샤아를 건담에 태운 ‘지쿠악스’의 세계선이다. 라라아 슨으로서는 ‘샤아가 살아있는 형태의 현실’ 즉 ‘애니메이션’을 꾸려보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우주세기라는 ‘영화’에 관한 것으로, 작중 라라아 슨과 독자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외부’다. 이들 모두 먼저 존재하는 현실에 기반해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이미 벌어진 일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하게 된다. 이를 따른다면 <지쿠악스>는 작품 안팎 모두로 영화에 대한 애니메이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공통적인 형태로 주어진 ‘외부’가 거대 담론의 사후라는 거대한 틀 안에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특정한 세계관을 그리던 우주세기에서 벗어나 그저 끝없이 열린 외부로 향하는 일 말이다. 라라아 슨이 그러했듯, 이 시대에 대안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점은 과거 냉전 시기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때와는 정반대에 자리한다. 그때는 지금이 가장 좋은 상태라고 여겨서 바깥이 없다고 보았는데 오늘날에는 ‘지금’이 가장 좋은 상태라고 여겨서 바깥이 없다고 본다. 동어반복이 아니라,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은 없다. 문헌기록이 점점 촘촘해지는 세계에서 ‘어제’와 ‘지난날’은 다가올 미래보다 더 방대한 규모의 현실이다. 우리가 과거에 ‘주어진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면 지금에는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불안의 방향성도 당연히 다르다. 밀레니엄 시기를 지배했던 불안이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면 오늘날에 팽배한 불안은 이미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어떻게 해야 가장 고통스러운 중단의 순간을 겪지 않을 수 있는지에 관한다. 이를 위해 ‘리부트’와 같은 폭발과 가속의 행동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건담>과 <지쿠악스>의 결말을 차례대로 떠올려보자.


팬들 간에 우주세기의 결말은 <역습의 샤아>인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아무로 레이와 샤아 이즈나블이 퇴장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말은 지구에 운석을 떨어트리려는 샤아의 음모를 아무로가 막아내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사이코 필드가 발생해 지구와의 충돌을 막아내기에 이른다. 원작이 어떤 형태로의 ‘끝’을 막으려 한다면 <지쿠악스>는 그런 ‘끝’을 연장하려 든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지쿠악스>를 구성하는 큰 흐름은 결국 도피다. 이 세계가 멸망한다는 사실만큼은 암암리에 모두가 공유하면서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 한다. 이 안에서 ‘외부’는 우리에게 나아갈 곳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무런 것도 알 수 없는 공백지대로 남는다. 그리고 이 공백지대를 관찰함으로써 무언가 평소 알지 못했던 예외적인 것들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것도 없다며 이를 폐허로 바라보았던 게 과거라면, ‘알 수 없으니까’ 도리어 더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는 게 이 시대의 주류의식이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레이와’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이와니까 뭔가 달라진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통칭 ‘레이와 건담’이라 불리는 <수성의 마녀>와 <지쿠악스>가 쌍방 기존 작품과는 다른 결을 한다는 점을 보면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지쿠악스>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평행우주 컨셉을 가져옴으로써 자신이 ‘이전 시대’에 관한 ‘이후’임을 의식하기도 한다. 시대는 바뀌었다. 새해 첫날 무언가를 다짐하는 이들처럼, 팬들이라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이 세계를 계속 끌고 갈 수 있을지도 고민했을 테다. 인간은 서른 정도 나이를 넘어가면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져 오기 시작한다. 이 아픈 몸을 갖고서 남은 70여년을 어떻게 살아갈 지를 고민하는 게 오늘날의 인류다. 마찬가지로 <건담>은 중장년 IP로서 줄곧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이미 이 세계에 던져진 ‘우주세기’라는 화두를 의식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그 결과로 선택한 건 평행우주다. 제작일화를 살펴보면 작품의 컨셉은 처음부터 ‘라라아 슨이 행복한 세계’로 정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위의 지적은 이 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쿠악스>는 이미 라라아 슨이 행복해진다는 결말을 목표로 이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레이와 시대의 특징이라 보는 것은 우선 ‘리얼리티’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면서 ‘영화’를 굳이 존재론과 엮지 않게 됨이 첫 번째다. 레이와가 말하는 ‘존재’란 대상과 현상 간의 관계 사이를 가리키므로 그 사실이 시시각각 변한다. 따라서 사전에 이미 주어진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도리어 자리를 이동함으로써 관계를 개선하거나 ‘외부’를 바꾸어보려는 시도가 가능해진다. 즉 애니메이션은 영화가 말하는 현실의 중력에 사로잡혀있지 않다. 바라는 것 안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등장하므로 “사실은 본래부터 이런 걸 좋아했었다”고 말할 법한 상황이 자주 생겨난다. 과거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엔 그런 게 가능하다. 이미 살아가는 세계 안에서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는 어느 한 인물이 새로이 등장해오는 일 말이다.


연구업계에서는 이를 포스트-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듯하다. 여기서는 이를 더 간단하게 줄여 재배치에 중점을 두고 싶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등을 보면 한 영화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가 한데 중첩되는 듯한 인상을 찾을 수 있다. 그 외, 영화와 현실 간을 교묘히 줄타기하는 아트하우스 영화들에서도 ‘외부’는 이들 두 카테고리를 안으로 밀어 넣기 위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지쿠악스>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건담>의 파생 세계는 동인지에서만 존재했다. 이는 흑역사라는 ‘바깥’의 사유에 근간한다. 그러나 동인설정이 안으로 들어온 이 세계에서 ‘흑역사’는 더는 쉬쉬하며 배제해야 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삶과 세계 안에 있다. 어쩌면 <지쿠악스>가 <신 에반게리온>의 결말과 유사한 인상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두 작품은 인물들이 각자의 미련을 끊어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을 묘사한다. 미혹을 끊어내어 어른이 되는 건 샤아나 신지나 별반 다르지 않다. 명실상부 이들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어둔 면’을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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