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임무는 먼 곳에 있는 자유의 파열을 예속의 시대 속에 새겨넣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글을 쓰고 싶어진다. 고쳐 말한다면 어딘가에 마음을 풀고 싶어지는 쪽에 가깝다. 한껏 생각에 빠져있으면 이것들에 발이 걸리지 않게 서둘러 매듭을 풀고 싶어진다. 글을 한 자씩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마음은 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과거에서 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감정을 돌려줄 뿐 애초에 없었던 걸 새로 만들지는 못한다. 영화를 보며 보고 듣는 것은 모두 한번쯤은 현실에서 겪어본 바 있는 것들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것은 정말로 현실에 존재했던 것들이며 영화는 우리 현실을 넘지 못한다. 영화는 우리의 과거에서 왔고 그러니 영화는 도리어 운명론에 속한다. 이미 한번 겪어보았던 일을 두고서 우리가 이를 떠올리는 과정이 바로 ‘영화’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적’이라는 말은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마주하는 일이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일을 뜻한다. 자신이 잊고 지내던 일들에 대한 발견은 현실을 개변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수정할 수 없는 오류에 놓는다. 이러한 ‘재배치’는 영화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말해준다. 영화는 가공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택받지 못한 과거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마주할 때 드는 감정은 대개 측은지심이 되는 때가 많다. 우리가 답을 구하지 못한 만큼이나 우리 자신도 영화를 구할 수 없다. 시간을 빌릴 수도 없고 용서를 빌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방금 마주했던 게 한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실존했던 과거임을 떠올리면서 이를 위한 애도나 추모를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영화 비평이라는 행위다.
영화글 쓰기에 대한 수요가 꾸준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영화글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달려나가는 일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낸 이 세계를 끝내는 일과도 같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들을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워서 이를 마주해서 다시금 무의 영역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에 맞서 싸우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진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단지 현재에 남겨질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분명 파멸의 길에 닿아있다. 극장을 나오면서 앞으로도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으리라는 점을 생각한다. 마치 장례식에 처음 다녀온 날 앞으로도 많은 이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것을 예감하듯 영화에 다녀온 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어떠한 시선으로 발 위에 남는다. 발 한걸음에 생각 하나가 돌고 나면 어느덧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 도착한다.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들 용기가 난다. 분명 이 세계에는 하늘이 없지만 뒤를 돌아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하늘이 되어줄 수 있다. 이는 남은 길을 끝내는 게 아니라 자신을 계속해서 미래에 넘기는 하나의 등속 운동에 가깝다. 극장을 나오면서 우리는 한 세계에 속했던 자신을 끌어안아야만 한다. 모든 영화는 서로 다른 세계를 갖기 때문에 반대로 모든 세계가 영화를 끌어안아야만 한다. 본디 이 세계는 우리의 과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재창기이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자신을 잊지 않고서 계속해서 과거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글쓰기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일이지만, 이는 특정한 기억이나 세계가 아니라 여기 이곳에 자신이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은 그 자체로 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본명 일상에 속해 있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감정은 일상적인 게 아니다. 영화에서 감정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어 영화를 본 후에 영화 속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동인이 된다. 마치 프루스트가 마들렌 향기에 용기를 얻듯 영화에서 감정은 현실에 빠져나오는 출구이면서 동시에 뒤를 돌아보는 ‘끌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영화가 자기반영성의 매체라면 영화 글쓰기는 반대로 에세이가 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자신의 사적인 면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부순다는 점이 그렇다. 꼭 이론을 활용하는 일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타인이 필요하다면 그건 결국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지만 이에 앞서 해야 할 건 우리의 세계와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꾸준히 자기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이따금 문화 이론 등등은 설명할 수 없는 자신에 각주를 덧붙이는 일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자신이 느낀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고 싶은 것도 같다. 이 특별한 감정에 이름을 붙여야만 비로소 가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 감정에 별다른 가치는 없다. 이름을 붙이는 일은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그 무언가가 등장한 후에 행해진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이름을 밝혀지지 않은 채로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항상 세계의 최전선에 서서 그 자신의 이름을 호명한다. 감정들이 뒤를 돌아봄으로써만 ‘가능한’ 세계라면, 이 세계에 이름을 붙인 건 역사 이후의 세계에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글을 쓰는 건 스스로 한 세계를 끝내는 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 역사 이후의 세계에서야 비로소 ‘감정’들이 대두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나 순간들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게 글쓰기의 역할이라면 영화는 결국 매 순간이 하나의 사건일 수 있음을 긍정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글을 쓰는 일은 자신을 애도하고 추모함으로써 과거를 마주할 수 있게 한다. 글을 쓰는 이의 관점에서 관객성은 그런 방향으로 이해돼야만 한다. 관객은 통일성을 지니고 한 세계의 내피에 맞닿는 존재가 아니라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면에 한발자국씩 글자를 써내려가는 이들이다. 어떤 세계에서도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건 가혹한 환경에 자신을 내치기 위함이 아니다. 문자의 세계에서 ‘자기’는 바라보이는 하늘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있다. 이곳을 전부 눈에 담을 수는 없더라도 자신을 담은 것에 자기를 돌려주는 일만큼은 충분히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이는 권력이나 서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세상을 가장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일 뿐이어서다. 에세이라는 글쓰기 형식에서 우리는 항상 세계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주인이 된다. 주인은 타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가 아니라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 사람이다. 영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만난 ‘세계’를 화면 안으로만 두는 게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덧씌우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의 현재가 과거에서 흘러왔거나 아니면 그냥 있는 그대로 뚝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출몰’은 유령성이 아니라 관객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영화가 우리의 삶에서 발견되는 일은 기적이나 우연을 희망하기보다 인간의 연결을 믿고 타인의 고통이 세상에 적당히 분배되어야 함을 믿는 것이다. 영화가 이 모든 순간을 구성한 게 아니라 우리가 구상해 왔던 어느 먼 미래의 한 날이 바로 영화라고 말이다.
어떤 경우 영화는 가공의 현실로 도피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는 문을 닫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만약 영화가 우리의 과거라면, 영화는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단지 일깨워질 뿐이다. 이 깨어난 세계에서 다시 현실에 돌아오려면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점을 알아채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 ‘끝’에 대한 관점을 종말이 아니라 ‘이후’로 파악하는 게 바로 영화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외로움에 스스로 답하며 다른 이들에게 빛을 발하는 행위이다. 이 세상에 혼자가 된 것만 같더라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느 세계에 삼켜지는 게 아니라 마음을 삼키며 세계를 상대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자문하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느꼈던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글을 적음으로써 우리는 한 감정에 대해 사고하기를 마친다. 글을 쓰는 것 또한, 글을 써내려가는 일에서 다음을 발견하고 이를 삼키는 과정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에 대한 글을 쓸 결심이 섰다면 이는 모든 것을 끝내려 함이 아니라 풀리지 않은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바르트는 극장을 나올 때야 비로소 영화가 시작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영화에 대해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 끝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화는 하나의 ‘내부’로서 사유되는데 그렇다면 글쓰기는 그것들을 최대한 눈에 담아보려는 시도일 테다. 몇몇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는 그곳에 다시 방문할 수 없다. 어떤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면 반대로 이를 잊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