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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화’는 현실을 뜻하지 않는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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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과 <좀비딸>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서브컬처 원작이 있는 한국영화’로 서로 비교되고 있다. 나오는 이야기는 대개 비슷한데, 원작이 있는 작품은 원작 팬들에 의해 흥행이 망쳐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원작팬은 영화가 원작의 외견(Look)에 충실하지 않는 일을 경계한다. 원작의 세계를 다른 무대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본다. 즉, 이미 다른 곳으로 전제되는 순간부터 손상이 시작되기에 ‘제자리’에 있는 것이야말로 ‘원본’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많은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난점을 겪었다. 일부는 작가가 아예 영화화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못 박기도 했다. <반지의 제왕> 같은 경우, 톨킨이 생전에 영화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아예 판권을 헐값에 팔아버리기도 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어쨌든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전제되는 일을 낭만적으로 바라보지만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구상한 이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면서 망쳐지는 일을 경계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인데 정작 원작 팬이 흥행 리스크로 작동하는 일이 이 현상의 최대 난점이다.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에 의해 지지받아야 마땅한 작품이 어째서 원작팬을 경계하게 됐을까? ‘원작팬이 아닌 이들도 관람해야’ 본격적인 흥행에 오를 수 있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원작팬은 대개 작품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이거나, 의견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원작팬의 반응은 원작팬이 아닌 이들에게 영화를 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게 한다. 제작사는 그 점을 잘 알아서 원작팬들의 반응을 최대한 눈여겨본다. 반응이 좋지 않으면 원작은 원작일 뿐이라며 원작팬들의 반응과 대중의 반응을 분리해보기도 하고, 반응이 좋으면 원작팬도 보증한 작품이라며 작품을 홍보한다. 결국 원작이 있는 작품은 원작이 있기에 별도의 세계관이나 IP 발전이 필요하지 않은 대신 원작이 작품의 창작 한계로 작동하게 된다. 쉽게 말해 저점이 낮은 대신 고점이 낮다고 볼 수 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못 만들어도 어느정도 본전은 뽑을 수 있지만 잘 만들어도 그만한 수익을 거두기는 힘들다. 실사화에만 한정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의 논점은 따로 있다. 실사화를 거치며 외견이 원작에 어울리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실사화가 원작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대중을 끌어들인다는 점이 문제다. 과하게 선정적이거나 격하게 잔인한 작품, 실제 상황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만한 변두리의 문화적 코드 등이 현실에 구현될 때 관객은 이를 문화가 아니라 현실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게임 캐릭터는 죽어도 무게감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인간의 죽음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항상 무겁게 다가온다. 원작 팬들은 작품을 현실처럼 여기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로 여기지만 일반 대중에게 ‘실사화’는 현실을 뜻하지 않으며 이를 따라 원작이 아닌 현실의 외견을 따라 실사를 평가하게 된다. 쉽게 말해 서로가 말하는 죽음의 무게가 다르다.


원작팬이 게임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모험과 보상에 대한 실패를 ‘비현실적인’ 일로 여긴다면, 일반 대중은 현실의 리얼리즘을 따라 죽거나 다치지 않는 일을 ‘비현실적인’ 일로 여긴다. 구체적으로 보면, 게임 캐릭터에 죽음의 무게감을 부여하려면 그만한 서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에서는 죽음에 대한 무게가 배제됐고, 다음 단계로 가는 일에 실패하는 일이 이를 대체한다. 그래서 게임적 리얼리즘에서는 물리적으로 죽거나 다치는 일보다는 내적 성장이나 주어진 임무에 실패하는 일이 주로 부각된다. 원작팬이 이들 작품에서 추구하는 것도 그렇다. 현실에서는 한번의 실패가 나락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작품 안에서는 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내적 성장이나 임무 성공의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관찰자 시점은 ‘안전함’의 지위를 따른다. 그런데 실사화가 현실을 따른다면 당연히 관찰자 시점도 더는 안전할 수 없다. 실사화 이후에는 상대를 챙기기보다 자신을 돌보기에 급급한 건 그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지역이나 인종, 국가를 불문하고 항상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죽음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면 당연히 죽음을 말하는 방법도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차라리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는 편이 더 낫다. ‘원작’은 그런 뜻에서 죽음에 익숙치 않다. 원작이나 영화나 죽음의 무게는 같지만,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과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건 서로 다르다. 현실에서는 경험이 없어서 모험할 수 있지만, 다수의 경험이 중첩되는 원작에서는 도리어 실패를 잘 알기에 그게 어렵다. 즉 모험과 실패에 현실적인 요구가 뒤따르는 순간 무언가를 실현하는 일도 어렵게 된다. 원작에서 김독자는 항상 현실적으로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원작이 실사화되는 일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독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일을 바라보는 모습은 작품 밖에 있던 자신이 현실에 뛰어드는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독자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독자를 대변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실사로 옮기며 벌어지는 일은 대개 관찰자 시점의 붕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전독시>는 그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작품 밖의 독자였던 자신이 작품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새로 쓰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욕구와 이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의 대립이 주가 된다. 안전함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서로 대립하는 일이 작품을 읽는 주요 동인이 된다. <전독시>가 기본적으로 자기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독시>에서 주가 되는 건 작품 밖에서 안의 사람들을 보며 후원하는 성좌 시스템이나 죽음을 극복하는 회귀 시스템이 아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결말을 향해가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작품의 제목처럼 ‘전지적 독자 시점’은 자신이 인생의 리더(Leader)가 되어 이를 책 읽듯(Reader) 풀어가기를 희망하는 듯 보인다.


작중에서 김독자는 단순히 수치화된 데이터로 자신의 능력을 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멸살법’은 정해진 결말이 아니라 상대와 상황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이해하는 사람의 표본처럼 보이는 그는 자신이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알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만 쓸 뿐이다. <전독시>의 영화판이 원작팬들에게 가장 반발을 산 건 이 부분이다. 제4의 벽 스킬이 없는 김독자는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 더 집중한다. 상대방과 소통하려면 제4의 벽으로 마음을 방어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이는 관객이 김독자 개인에 이입하기 쉬운 구조지만, 반대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원작에 있던 매력 대부분을 잃는다. 영화의 김독자는 상대를 안다는 그 장점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한다.


<전독시>의 매력은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안다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요즘에는 조금만 손을 써도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다. SNS도 그렇지만, 주변에 상대방에 대해 묻거나 아니면 직접 가서 커피한잔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래도 오가는 말은 피상적인 때가 많아서, 무언가 대단한 말을 주고 받았다고 생각해도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때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걸 두고서 과연 ‘대화’했다고,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군가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은 영영 불가능하니까 그런 불완전함을 동인 삼아 서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니까, 자신의 등 뒤를 볼 수 없으니까 항상 등 뒤를 보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영화판의 김독자는 자신이 아는 그 등 뒤를 따라가는 일에 더 집중한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좀비딸>도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다. 작품은 원작을 잘 따라가는 편이다. 원작을 최대한 잘 고증하는 게 꼭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아는 상황에서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정환이 수아를 품는 과정이나 이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명확한 인지와 그에 따른 객관적인 현실 등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부합한다.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왜 그렇게 보고 듣고 느꼈는지를 이해하는 일 말이다. 매체가 말하는 서사란 현실의 압력을 대체하거나 혹은 이겨내는 부류의 힘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서사가 현실에 대체되기 때문이며, 서브컬처는 개개인의 현실을 상쇄하려는 힘이다. <좀비딸>은 이미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일련의 서사를 따른다. 원작의 팬들은 작품을 보며 자신의 현실을 개인에 따라 상쇄했고, 이를 현실에 가져다 놓으면서 이 세계도 동일하게 치유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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