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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소비 시대의 영화문화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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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소비하는 유형에는 그런 게 있다. 대상을 직접 소비하는 것보다는 이를 소비하는 문화 자체를 향유하는 일 말이다. 이를테면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나오면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기 위해서라도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드라마에 대한 평가에 우선하는 건 이 드라마를 보았기에 일상에서 드나드는 관련 대화들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드라마를 보고 나면 관련된 유머도 마음 편히 보고 웃을 수 있다. 드라마를 보고 나면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이를 어떠한 종류의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즉 이 소비는 전형적인 2차 소비 형태에 가깝다. 2차 창작이 작품을 보고서 이를 자기만의 맥락으로 옮긴다면 2차 소비는 본편을 향유하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2차 소비는 시작에서 끝까지 작품을 파먹는 물질 소비를 벗어나 다 쓴 재료를 회수해 이를 재처리, 또 다른 상품으로 내놓는 과정을 거친다. 마치 분리수거가 그러하듯 2차 소비는 이 점에서 경제적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종의 생태계가 구성된다는 점이다. 1차 생산자가 2차 소비자에 양분이 되고 다시금 최상위 포식자가 이를 소비하는 등의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종이 분할되면서 점차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고, 처음에는 교접이 가능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아예 아무런 생물학적 연결고리도 없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건 무엇인가? 단지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뿐일 테다. 문화를 직접 소비하는 게 아니라 그에 관한 문화 자체를 소비하는 일은 이렇게 생겨난다.


머무는 것과 머물지 않는 것으로 내외를 분간한다면, 한 세계는 우리가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 규범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인식을 발현하기가 힘들다. 2차 소비가 점점 많아질수록 이들 간에는 유전적인 공통점이 사라지게 되어, 끝내 본래 텍스트가 갖던 장소의 의미는 사라지고야 만다. 이때 2차 소비는 한 세계의 내부에 속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영향권 아래에 있기에 사람들 사이를 약하게라도 연결한다. 그리고 인간의 ‘사이’가 점점 약한 연결을 갖는 상황에서, 장소는 타자성을 재분배하는 계기가 된다. 작은 의미로 있던 교류의 장이 거시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이들 생태계는 하나의 ‘세계’로 발전한다. 이는 물론 어딘가에 머문다기보다 한 세계에 감금되는 쪽에 가깝다. 이로 인해 ‘바깥’을 인지하기란 더욱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타자성은 우리가 자신에서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해 이를 이어가려는 속성이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는 모두 같아 보이지만 속에서는 미래에 닿는 서로 다른 방식이 있다. 이는 영화가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하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성취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영화문화는 바로 이렇게 인간이 길을 찾는 방식에 관하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세속적’ 문화를 낳는다. 오늘날 시네필 문화는 이처럼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이를 구성하는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한다. 이 안에서 타자성은 바깥의 자기에 관한 수행의식이며, 세계는 비록 배반당하더라도 우리가 말하는 ‘예외적인 순간’을 위한 동료의식을 발현한다.


가령 시네필들 사이에는 무엇이 영화를 향유하는 방법인지를 묻는 게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일에는 별다른 구분이 없다고 보면서도 정작 영화를 향유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갈라놓으려 한다.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가늠하고자 영화를 눈금자로 사용한다. 이때 영화는 서로를 이어주기보다 오히려 한 세계가 개념적으로 붕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불확실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는 세계가 파멸하지 않도록 눈을 감는 일에 불과하며, 이 혼돈이야말로 오늘날 영화를 이루는 질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혼돈은 영화가 세운 질서에 기반한 ‘2차 창작’, ‘서브’인 셈이다. 시네필 문화가 추방자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영화가 갖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거대한 황혼의 절벽에서 사람들이 많은 걸 보고 듣는다. 누군가가 다가올 밤을 생각한다면 어떤 이는 자신을 사로잡는 어둠에서 창공의 너비를 체감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하늘의 크기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늘이 하나의 거대한 천장처럼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보여주는 재현의 한 양상은 거대한 운명의 서사시가 아니라 속죄를 위한 여정의 한순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니 한 문화의 양상을 떠올리는 일은 이렇게 절벽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반대로 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하게 한다. 시네필 문화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세계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행하려 하는 재창기다.


가령 미학에서 숭고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반대로 그런 사실 자체가 받아들여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숭고는 어떠한 예외를 구성함과 동시에 정상성에 대한 배중률이 된다. 영화가 자신에 섞여 들지 않아서 도리어 자기의 형상을 더욱 선명하게 할 수 있고, 영화야말로 한 세계의 유일한 운명이라 여기며 이를 적극적으로 쫓을 수 있다.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영화에 ‘먼 것’이 될 수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일이 한 세계가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는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이 세계를 지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세계에 대한 믿음,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으며 한 세계의 종말을 끝까지 완주하는 일이다. 이내 자신이 끝까지 완주한 세계가 새벽의 터울과 함께 점차 사라질 때 우리는 이 세계가 다시 태어나리라고 믿는다. 자기만의 시각과 해석을 곁들인 채로 다시 태어날 세계를 바라는 이 여정은 우리가 영화를 완주하는 이유가 된다. 한 세계를 끝내는 결정이 그 세계로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는 것. 이제 영화에 먼 것은 우리의 눈이 아니라 보내야 할 과거다. 무엇이 영화를 보는 옳은 방법인지를 따져 묻는 일은 삶에 정답을 구하는 일과도 같다. 좋은 영화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넘쳐나는 이 세계는 사람들에 삶의 정답을 강요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에게서 ‘어른’의 의미를 구하는 일은 영화가 바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는 점을 추억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이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참여의식을 갖는 일이다. 아무리 자신이 영화를 좋아한다 한들 현장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영화는 화면과 함께 생을 마치게 된다. 소속감이 없으면 결국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이루지 못하고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리기만 할 뿐이다. 과거에는 극장이 그런 일을 이루게 해주는 물리적인 기반이 되어줬지만 영화문화가 발달한 후로는 더는 물질성에만 국한하지 않게 됐다. 영화문화가 구성된 시점은 사람들이 서로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게 된 무렵,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에 ‘의미’를 갖고자 자발적 참여를 제안하게 된 무렵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 생겨나는데 무엇보다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시점을 떠올리자. 영화를 보는 일은 대립을 피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꺼내기에 효과적인 행위였다. 서로가 말하는 바로 그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영화를 보러 간다’는 문장 자체가 하나의 단어처럼 여겨졌다는 소리다. 즉 영화는 서로 다른 생각들을 물리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설계된 정치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우리가 비교적 혼란하거나 소란스럽게 여기는 몇몇 사실에 익숙하다. 아무리 괴이한 것이라도 영화 안에서는 살만한 게 되고, 품을 만한 게 되며, 끌어안을 만한 게 된다. 현실이라면 아무리 고민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들에서 영화는 자유롭다. 도리어 영화야말로 이렇다고 말하는 일은 영화를 보는 이들이 영화를 누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서로 같은 영화라도 현실은 운명을 다르게 피해 가니 말이다.


시네필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영화문화에 관한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영화 굿즈를 수집하는 사람이 진짜 영화팬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 생각에 영화팬은 영화제에 방문하거나 영화에 관한 이론적인 탐구 등을 진행해야만 한다. 예술 영화관에 대중교통으로 몇 번을 갈아타면서까지 방문하는 사람이 있고, 집 근처에서 하는 영화가 아니라면 결국 극장에서 보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 스트리밍이나 어둠의 경로로 영화를 보는 일도 영화를 만나는 장소가 바로 온라인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비용이나 시간 그 이상의 문제다. 사실 이런 고민보다 더 중요한 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다. 괜히 가족과 함께 티브이를 보면 평소라면 말하지 않을 속마음을 ‘관람평’으로 쏟아내듯 영화문화에서 커뮤니티의 존재는 우리가 자기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계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평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던 풍경들에 어떠한 ‘목소리’가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이곳이 아무런 장소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면 우리가 과연 혼잣말이라도 했을까? 적어도 영화에 관한 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 그렇다. 영화는 우리의 운명을 동일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영화는 신탁에 가깝고 따라서 세계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를 보는 건 좋은 세상의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2차 창작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싶은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재창기의 여운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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